[시대의 전환기를 이끈 경기인] (28)고려 말 역경을 몸으로 버텨낸 최영



강직한 문관 출신 가문의 무장

최영은 1316년(충숙왕 6)에 태어나 1388년(우왕 14)에 사망한 고려의 장군이다. 그의 본관은 철원(창원)이며 그의 선대부터 개경에서 거주했던 고려의 명문가 출신이었다.

최영의 아버지는 사헌규정 최원직(崔元直)으로 그의 집안은 5대조 최유청(崔惟淸)이 고려 예종 때 집현전 대학사를 지냈을 정도로 학식 있는 문관 출신의 문벌이었다. 그러나 최영은 이러한 집안의 내력과는 달리 무예를 즐겼다고 한다.

최영의 성품은 우직한 일면이 있어서 그의 아버지가 남긴 유언인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라는 말을 평생 실천에 옮겼다는 것은 지금까지도 여러사람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최영은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라는 말을 마음 속 깊이 간직하고 재물에 관여하지 않았으며 거처하는 집이 초라했음에도 만족하고 살았다. 의복과 음식을 검소하게 해 때로 식량이 모자랄 경우도 있었다. 다른 사람이 좋은 말을 타거나 좋은 의복을 입은 것을 보면 하찮게 여겼다. 지위는 비록 재상과 장군을 겸하고 오랫동안 병권을 장악했으나 뇌물과 칭탁을 받지 않았으므로 세상에서 그 청백함에 탄복했다. - 《고려사》 권 113, 〈열전〉 제26, 최영



최영의 검소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과 무예를 중요하게 여겼던 자세는 지금까지도 고려의 충신이라는 기억과 함께 청백리로서도 추앙되고 있다. 특히 고려라는 국가를 수호하기 위해 이성계 등의 역성혁명에 끝까지 반대했던 충절은 현재에도 살아 있는 호국의 정령으로서 길이 추앙을 받고 있다.

황금을 돌 같이 알았다는 그의 성품에서 비롯해 만들어진 적묘(赤墓, 풀이 나지 않아 붉은 흙이 드러난 묘)는 현재 경기도 고양시 일산에 있으며 그 정신을 기리는 많은 이들의 참배를 받고 있다.


▲ 신격화된 최영 장군을 묘사해 그린 무신도.

어디서나 나타나는 흰 머리의 최만호

최영의 생애를 일괄하면 여러 정치적 역경도 있었으나, 한마디로 나라를 위해 온 몸을 던진 그야말로 나라 지킨 일생이라고 할 수 있다.

최영이 살았던 시대는 우리 역사에서 가장 험난하게 외적의 침입을 받았던 시기이기도 했다. 북로남왜(北虜南倭)라고 해 북쪽에서는 홍건적의 침입이 있었고 남쪽에서는 왜구가 끊이지 않았다. 이러한 절대절명의 시대에 최영은 고려를 국난에서 여러차례 구해 낸 인물이었다. 단재 신채호는 이러한 최영의 활동을 ‘동국거걸 최도통전’으로 저술하기도 했다.

최영은 1352년(공민왕 1)에 조일신(趙日新)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호군(護軍)에 올랐다. 1354년(공민왕 3)에는 대호군(大護軍)이 돼 원나라의 요청으로 유탁(柳濯), 염제신(廉悌臣) 등과 함께 고우(高郵), 사주(四州) 등지에서 장사성 등의 반란군을 토벌해 국제전에서 명성을 얻었다. 최영은 이 전투에서 창에 여러 번 찔리는 등의 혈전을 경험했다.

1356년(공민왕 5)에는 공민왕이 반원(反元) 개혁정치를 시작할 때 영토를 회복하기 위해 인당(印?), 신순(辛珣), 유홍(兪弘), 최부개(崔夫介) 등과 압록강 서쪽 8참(站)을 공략해 성과를 거뒀다.

이후 최영의 활약은 외적과의 전투에서 거둔 승리가 많았다. 전라도 오예포(吾乂浦)에 침입했던 왜구의 400여 척을 격파했으며 1359년(공민왕 8)에는 일어난 홍건적 4만여 명이 서경을 점령하자 서북면병마사로 이방실(李芳實) 등과 함께 이를 격퇴했다. 또한 1361년(공민왕 10)에도 홍건적이 개경을 점령하자 이를 물리치는 공을 세웠다.

또한 전투가 끝난 뒤에는 전사자의 시체를 거둬 매장을 하는 등 무인으로서의 예를 갖췄다. 그리고 구제소를 설치해 식량을 보급하거나 곡식의 종자를 나눠줘 백성들의 생계를 위한 활동도 했다.

1363년(공민왕 12)에는 김용(金鏞)이 난을 진압했다. 김용은 공민왕의 시종으로 총애를 받아 고위직에 오르자 자신이 왕이 되고자 공민왕을 죽이려 했다. 최영은 우제(禹?), 안우경(安遇慶), 김장수(金長壽) 등과 함께 반란군을 처단하고 일등 공신이 됐다. 또한 최영은 최유(崔濡)가 덕흥군을 옹립해 압록강을 건너오자 도순위사(都巡慰使)로 참전해 격파했다.

그러나 그의 강직한 성품으로 인해 최영은 어려움에 봉착하기도 했다. 신돈(辛旽)이 실력자가 돼 그의 참소로 경주윤으로 좌천됐다가 다시 6년간의 유배라는 고초를 겪기도 했다. 그렇지만 신돈이 실각한 뒤에는 다시 기용돼 왜구를 격토하고 제주도 반란을 평정하기도 했다.


▲ 위화도 회군.

요동 정벌 계획과 최영

공민왕의 뒤를 이어 우왕이 즉위했다. 이때에도 왜구는 기승을 부렸고 최영은 왜구 격퇴에 전력을 다했다. 1376년(우왕 2)의 홍산전투는 왜구토벌사에 있어서 중요 대첩 가운데 하나다. 왜구들이 연산(連山)에 침입해 원수 박인계(朴仁桂)를 죽이고 노략질이 심해지자 60세의 최영이 참전을 자청했다. 왕은 그의 나이가 많다고 해 만류하자 최영은 “저는 비록 몸은 늙었으나 뜻은 꺾이지 않아 종묘와 국가를 편히 하고 왕실을 보위하려는 일념뿐입니다. 바로 휘하를 인솔해 나가 싸우게 해 주기 바랍니다.”(《고려사》 권 113, 〈열전〉 제26, 최영)라고 해 허락을 얻어냈다. 최영은 홍산(鴻山)에서 왜구를 대파했다. 왕이 그 공으로 최영에게 시중의 직을 제의하자 최영은 “시중이 되면 때를 맞춰 전선으로 나갈 수 없을 것이므로 왜구를 평정한 다음이 좋을 것”이라며 사양했다.

당시 왜구들은 다른 누구 보다도 ‘흰머리(나이가 많다는 뜻)의 최만호(최영의 별명)’를 가장 두려워 했다고 한다. 그리고 최영은 수시중을 거쳐 판문하부사 문하시중이 됐다가 1388년(우왕 14)에는 수문하시중이 됐다. 그런데 이무렵 고려는 명나라로부터 철령(鐵嶺) 이북의 땅을 내놓으라는 강요를 당하고 있었다. 철령 이북 지역은 원나라가 강제로 점거해 쌍성총관부를 두었던 곳으로 공민왕 때 최영이 출정해 수복한 고려의 영토였다.

명나라의 강요에 대해 최영은 우왕에게 요동 정벌을 청했다. 최영은 명나라가 국가를 세운지 얼마 되지 않아 경쟁할만 하다고 판단하고 전쟁 준비에 들어갔다. 1388년(우왕 14) 5월, 최영은 팔도도통사로 요동 정벌에 나섰다. 그러나 이때 요동 정벌에 반대했던 이성계(李成桂) 등이 ‘전쟁이 불가한 네 가지 이유(四不可論)’를 들어 단행한 위화도 회군으로 유배됐다가, 그해 12월에 참수됐다.


▲ 고양시 덕양구 대자산 기슭에 있는 최영 장군의 묘.

고려의 멸망과 최영의 일화

최영의 죽음만으로 고려가 몰락한 것은 아니었지만, 고려인들에게는 최영의 죽음이 고려의 운명을 좌우하는 커다란 사건이었다. 개성 덕물산에서는 최영의 사망일에 굿이 열리는데, 판이 끝나고 나면 주먹크기만한 고기덩어리를 나누어줬다고 한다. 그 고기 이름이 ‘성계고기(成桂肉)’였다.

최영을 생각하면서 그를 죽이고 고려를 멸망에 이르게 한 이성계를 씹으면서 분을 삭히라는 의미일 것이다. 그런 연유에서인지 지금도 개성에서는 돼지고기를 성계고기라고 부르기도 한다는 사실을 작년 만월대 남북 합동 발굴 조사 보고시에 방문해 안내원으로부터 듣기도 했다.

그 안내원은 아울러 개성 조랭이 떡국의 떡이 작은 것은 칼로 이성계의 목을 치듯 빨리 자르기 위해서라는 것과 개성만두의 비짐이 뒤틀린 것은 이성계를 포박해 예성강에 빠뜨려 죽이자는 의미가 있다고도 했다. 개성인들은 조선시대에 과거에 응시하지도 않았고 조선의 관직에 나서지도 않았다. 개성인들은 자신들의 삶의 수단으로 경제활동을 중시해 송상(松商, 개성상인)이 태어났다고도 한다.

최영은 고려를 상징하는 무장이었다. 고려를 위해 국제전에 나서기도 했고 많은 이민족들과의 전투에서 승리하기도 했다. 지금까지도 최영은 고려의 충신으로 고려의 호국 장군으로서 기념돼 왔고 앞으로도 계속돼질 것이다.

이재범 경기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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