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건국과 경기제(京畿制)의 확대] (29) 정도전과 삼봉집목판

▲ 정도전

조선의 개국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인물은 정도전이었다. 그에 대한 평가는 극명하게 나눠진다. 일부에서는 고려를 멸망시킨 주역으로 기억하기도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조선 개국의 핵심 주역으로서 고려 말의 사회모순을 해결하고 이를 개혁하기 위해 새로운 왕조의 개창에 앞장섰으며 조선 건국 후에는 각종 제도의 개혁과 정비를 통해 조선왕조 500년의 기틀을 다진 인물로 평가하고 있다.



이색의 문인-정몽주와 절친

고려 말의 조정은 매우 위태로웠다. 대외적으로는 종래의 친원정책에서 방향을 바꿔 친명정책을 표방했지만 뚜렷한 명분이 없어 관료들은 두 파로 갈렸고 대내적으로는 권문세가의 토지 독점, 승려의 타락 등 정치·사회적인 모순들이 드러나고 있었다. 이러한 국가의 위기 속에서 새로운 부류들이 등장하고 이들이 중심이 돼 고려의 사회·정치적 모순을 해결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러한 일련의 부류를 신진 사대부라 했으니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정몽주(鄭夢周)·이색(李穡)·이숭인(李崇仁)·길재(吉再)·이성계(李成桂)·정도전 등이 그들이다.

그러나 이들은 망국의 병을 치유하는 방법에 있어 둘로 갈라진다. 하나는 정몽주가 중심이 돼 고려왕조를 유지하면서 개혁을 주도하려는 부류와 차제에 이미 명운이 다한 고려를 대신할 새로운 국가를 세우고자 하는 부류였으니 이성계와 정도전이 대표적 인물이었다. 정몽주와 정도전은 이색의 문하에서 함께 공부하면서 친분이 두터웠지만 결국 고려의 운명을 두고 서로 다른 길을 가야만 하는 운명이었다.



대표적 신진사대부 출신

정도전(1342~1398)의 호는 삼봉(三峯)이고 자는 종지(宗之), 본관은 봉화(奉化)이다. 아버지 정운경(鄭云敬)은 진사시에 합격해 공민왕 대에 형부상서를 지냈으며 어머니는 우연(禹淵)의 서녀(庶女)이다. 당시 유학자로서 명망이 높았던 이색의 문하에서 공부했다. 본래 정도전의 가문은 한미한 지방 향리 출신으로서 정도전의 출세는 당시 새로운 정치세력의 등장을 의미한다.

즉 조선 건국의 주요세력인 신진사대부의 등장을 대변해 주는 대표적인 가문이 봉화 정씨이다. 1362년(공민왕 11) 과거에 급제해 관직 생활을 시작해 1375년(우왕 1) 북원(北元)의 사신을 맞이하는 관리로 임명된 것에 반발했다가 나주로 유배됐다. 1388년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단행해 권력을 잡자 그의 천거로 요직에 등용됐고 이듬해 창왕을 폐위하고 공양왕을 옹립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해 공신에 책봉됐다.

1391년(공양왕 3) 과전법(科田法)을 시행하는 과정에서 반대파의 탄핵으로 봉화로 유배됐다가 이방원(李芳遠)이 정몽주를 제거한 뒤 다시 중앙으로 복귀했다. 이 해에 조준(趙浚), 남은(南誾) 등과 함께 이성계를 왕으로 옹립해 실권을 장악하고 반대파를 숙청했다. 개국 후 태조의 두 번째 부인인 강씨의 둘째 아들 방석(芳碩)을 세자로 책봉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군사와 재정의 실권을 장악하고 조선의 국가 체제를 정비했다.

1396년 명나라에서 외교 문서의 내용을 문제 삼아 정도전에게 명나라로 입조할 것을 요구했으나 병을 핑계로 거부했다. 1397년 요동 정벌을 주도했으나 이듬해 이방원에 의해 피살됐다.



▲ 평택시에 있는 '문헌사'. '유종공종(儒宗功宗)'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 사당 안에는 정도전의 위폐와 영정이 모셔져 있다.
나라의 주인은 백성이다-민본주의 천명

‘모든 정치는 백성을 근본으로 삼는다’는 것을 최고의 덕목으로 여기는 성리학적 관점에서 볼 때 조선의 건국은 백성들에게 착취와 수탈, 잦은 병화로 인한 공포, 인신 구속과 노동 착취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커다란 변혁이었다. 이처럼 고려와는 다른 새로운 국가를 세우고, 그에 상응하는 통치이념을 설계한 인물이 바로 정도전이었다. 그는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앞서 저술한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에서 “국가를 바르게 하려면 무엇보다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다스려야 하고 생활을 안정시키고 백성의 뜻에 따라 정책을 결정해야 한다. 만약 임금이 백성의 뜻을 어기면 백성은 임금을 버린다. 나라의 주인은 임금이 아니라 백성이고 백성을 주인으로 모시는 정치가 곧 민본정치이다”라며 민본주의를 천명한다.

이러한 정도전의 사상과 정치적 지향을 담고 있는 책이 ‘삼봉집’이다. ‘삼봉집’은 우왕 말년에 작성된 권근(權近)의 서문이 있어 이 때 처음 간행된 것으로 추정되며 1397년(태조 6) 아들 정진(鄭津)이 부친의 시문(詩文)을 모아 2권으로 간행했고 1465년(세조 11)에 증손 정문형(鄭文炯)이 경상도 안동부에서 ‘경제문감(經濟文鑑)’ ‘조선경국전’ ‘불씨잡변(佛氏雜辨)’ ‘심기리편(心氣理篇)’ ‘심문천답(心問天答)’ 등을 추가해 6책으로 1481년(성종 18)에는 시부(詩賦) 100여 수와 ‘경제문감별집(經濟文鑑別集)’을 추가해 간행했다. 그리고 1791년(정조 15) 왕명에 따라 성종대의 판본을 정리해 경상감영에서 14권 7책으로 다시 간행했는데 현재 전해지는 판본의 대부분은 정조 때 간행된 것이다.

이 ‘삼봉집’은 고려를 대신한 조선의 사상적, 법제적 기초를 닦은 책으로 평가돼 지난 1986년 5월7일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32호로 지정돼 현재 정도전을 모신 평택의 문헌사(文憲詞) 경내의 삼봉기념관에 보관돼 있다. 또한 1394년에 발간된 ‘조선경국전’은 그 가치를 인정받아 지난달 말 보물지정이 예고돼 있어 연내에 보물로 지정될 전망이다.



▲ 정도전이 집필한 '삼봉집'과 그 목판 모습.
‘삼봉집’-조선건국을 위한 법제 완비, 성리학적 이념 정립

사상적 관점에서의 ‘삼봉집’은 불교를 대신해 성리학의 이념적 위치를 확립했다는 점이다. ‘불씨잡변’은 고려 말에 제기된 배불론(排佛論)을 집대성한 것으로서 이전의 단편적 비판을 넘어 체계적으로 비판을 시도한 것이다. 물론 불교에 대한 깊이 있는 철학적 이해를 바탕으로 제시된 비판이기 보다는 불교에 대한 성리학의 우위를 제시한다는 정치적 목적성이 강하게 반영돼 있기는 하지만 성리학의 정착을 위한 기초 작업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법제적 관점에서 보면 15세기 조선의 국가 체제 정비를 위한 초석을 놓았다는 점이다. 조선은 태조대에 ‘경제육전(經濟六典)’의 편찬을 시작으로 육전 체제에 입각한 법전의 정비를 모색했고 이후 보완을 거쳐 성종대에 영구히 지켜 나갈 법전으로서 ‘경국대전’을 반포하는 것으로 마무리 됐다. 정도전이 저술한 ‘조선경국전’은 바로 법전에 입각한 조선의 국가 운영을 위한 출발점이 되는 것이었다.

이처럼 ‘삼봉집’은 조선 국가의 중심 이념이라 할 수 있는 성리학과 법전 체제를 정비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실제 당대에는 지성사적으로 높이 평가받지는 못하는데 정도전과 태종간의 권력 투쟁 결과가 그 여파가 아닌가 생각되며 아울러 후대의 학인들 조차도 정치적 측면에서 정도전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경향이 있었기에 ‘삼봉집’도 주목받지 못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봉집’에서 제시한 조선 국가 체제의 이념적 원리는 조선 후기까지 유지됐다. 정조는 1785년(정조 9) ‘대전통편(大典通編)’을 편찬해 법전 체제의 재정비를 도모했고 1791년에는 왕명으로 ‘삼봉집’을 다시 간행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삼봉집’이 조선조 500년간 국가 체제를 유지하는데 큰 토대가 된 저작(著作)으로 인정받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조선 500년 최고의 경세가, 대학자

정도전은 조선의 제도적 기본 틀을 구축하고 이념적 바탕을 마련한 경세가이자 혁명가다. 지방의 하급 향리출신으로 아버지 대에 중앙관계에 등장한 전형적인 신진사대부이다. 즉 정치·경제적 배경이 아닌 자신의 재능으로 성공한 인물이었다. 특히 그가 반지주적인 균전제론과 철저한 능력본위제를 주장할 수 있었던 것은 청빈한 가풍과 친원책에 반대해 얻은 유배생활의 체험에서 민본적 의식과 과격한 개혁사상을 체득했기 때문이며 스승 이색의 문하에서 받은 개혁적인 학문적 영향이 크게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얼마 전 인기리에 방영된 드라마에서 정도전은 조선왕조의 설계자로 부각되며 재조명됐다. 이러한 배경에는 현실정치에 대한 국민들의 의식이 잠재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국민들의 희망은 정도전과 같은 혁명적 사상가, 실천적 지식인, 국민을 섬기는 민본적 정치인의 등장을 바라는 시대적 요청이 반영된 결과가 아닐까 생각된다.

장덕호 실학박물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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