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으로 보는 경기(京畿)- (30)경기도 출신 문인화가와 직업화가

▲ 윤정립 作 행선도
 풍토성이나 지정학적 미감(美感)이란 용어가 말해주듯 풍광(風光)이 수려한 곳에서 아름다운 그림이 탄생함은 동서양이 다르지 않다. 우리들이 여행 중 아름다운 정경 앞에선 사진으로 찍듯, 승경(勝景)은 누구나가 기억에 담고 싶음은 과거나 오늘이나 같을 것이다. 중국의 오악(五惡)을 비롯해 황산(黃山)이나 우리의 금강산(金剛山), 일본의 후지산(富士山)은 각기 그림과 시문(詩文)에 끼친 영향이 참으로 크다.

 조선의 수도 한양은 오늘날에 비하면 턱 없이 좁다. 강남과 강북의 경계가 한강이 아닌 청계천(淸溪川)이었다. 암사동 선사시대 주거지가 말해주듯 한강은 우리 민족에 있어 문명 탄생의 진원지이자, 오랜 세월에 걸쳐 젖줄이었다. 이를 차지한 집단이 통일의 주역이 됐다. 한강이 풍족한 수량으로 도도히 흐르는 경기도는 왕릉 및 사대부들의 종가(宗家)및 유택(幽宅)들이 군집해 있다.

 

▲ .'절매삽병도', 전 강희안, 비단에 채색 각110.5x61.0cm, 국립중앙박물관
 인재 강희안 형제-조선 초 최고의 문인화가

 조선시대 화단에서 경기도 출신 서화가의 활약은 돋보인다. 이들의 주된 활동무대가 서울일지라도 경기와 연관되니 왕조 초부터 말에 이르기까지 회화사적 족적이 선명한 거장들이 두루 포진하고 있다. 조선 초기(1392-1550 경) 서화는 오늘에 전하는 작품이 몹시 드물다. 조선 최초의 원예서적 '양화소록(養?小錄)'을 남긴 조선 초 최고의 문인화가인 인재(仁齋) 강희안(姜希顔, 1417-1464)은 시와 그림과 글씨 세 분야 두루 능했다. 세종의 비가 강희안의 이모이니 세종의 아들인 문종과 세조, 조선 초 최고의 수장가로 서예가인 안평대군 등과는 이종사촌 형제들이다. 고려에서 조선에 이르기까지 대표적인 왕비족인 진주 강씨의 그림의 흐름은 18세기 예원의 총수인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 1713-1791) 및 후손에 이르기까지 오래고 길다.

 한편 인재가 서예에 뛰어남을 입증하는 가장 분명한 사실은 을해자(乙亥字, 1455)의 존재이다. 안평대군(安平大君) 이용(李瑢, 1418-1453)의 글씨로 새긴 경오자(庚午字, 1450)를 녹여 인재의 글씨로 주자소에서 을해자를 제작했다. 다음으로 임진왜란 전까지 오래 사용했으며 국보 제212호 '능엄경언(楞嚴經諺解)' '세종장헌대왕실록(世宗莊憲大王實錄)' '훈사(訓辭)' 등 150여 종이 알려져 있다. 이 활자는 갑인자(甲寅字, 1434)와 함께 조선 전기 활자 인쇄의 주류로 오래 사용됐으나 임진왜란 중에 상당량이 유실돼, 공신도감에서 갑인자나 목활자와 함께 섞어서 찍은 책들이 전한다.

 그의 그림에 부친 제시며 문헌기록에 의할 때 산수 외에 초충에도 뛰어났으니 소품만이 전한다. '명상에 잠긴 선비'로 불리기도 하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고사관수도'는 그의 대표작인 양 잘 알려졌다. 화면 내 인물이 점하는 비중이 크며 산수는 인물배경의 무대처럼 보인다. 강한 흑백대조, 다소 거칠고 부산한 필치를 특징으로 하는 이 같은 화풍은 조선중기(1550-1700경) 크게 유행한 시대화풍이다. 바위에 기대 물을 응시하는 듯 보이는 최근 학계의 연구 결과 그의 생애보다 적어도 1세기 이상 후의 화풍으로 파악돼 전칭(傳稱)임을 면하기 어렵게 됐다. 이를 대신해 기준작은 간송미술관 소장 '청산모우도(靑山暮雨圖)'와 국립중앙박물관의 '교두연수도(橋頭煙樹圖)' 2점이 제시된다. 여름과 가을 풍광인 이 두 그림은 사시팔경도 같은 일괄 그림에 속한 것일 가능성도 없지 않다. 이 두 점은 모두 18세기 대수장가 김광국에 의해 꾸며진 화첩에 속했다. 또한 '고사도교도(高士渡橋圖)' '소동개문도(小童開門圖)' '절매삽병도(折梅揷甁圖)' 등 3점은 한 작품의 잔결로 사료된다.

 그의 아우로 사숙재(私淑齋) 강희맹(姜希孟, 1424-1483) 또한 소나무와 대나무 및 산수에도 능했으니 일본 도쿄국립박물관에는 이들 형제의 그림으로 전하는 비교적 큰 작품이 전하나 이들 또한 전칭작임을 면하기 힘들다. 이들 형제는 시흥에 연원을 두고 있다.

 

 인물의 최경과 산수의 안견 등-지곡의 문제점

 조선 초기(1392-1550 경) 화단에서 제도권에서 활약한 직업화가로는 인물화의 대가로 명성을 얻은 최경(崔涇)을 꼽게 된다. 세종 때에 화원(?員)이 됐으며 성종 때에 가장 이름을 날렸다. 인물화에 뛰어났으며 산수화의 대가인 안견(安堅)과 병칭됐다. 안산에서 소금을 굽는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그림에 뛰어난 소질이 드러나 도화원별좌가 됐다. 성종 때 소헌왕후·세조·예종·덕종의 어용(御容)을 성공적으로 그려 화원으로서는 희귀한 예로 당상관에 제수되는 파격적인 대우를 받기도 했으나 많은 신하들의 반대로 인해 취소됐다.

 초상과 도석인물 등 인물에 있어서 뛰어났으나 허세에 과시적인 성격으로 승진과 도화원파직 후 관노(官奴)가 되기도 하는 등 파란이 많은 생애의 소유자로 알려져 있다. 도화서 동료로 안귀생(安貴生)과 배련(裵蓮) 등과 함께 활동했다. 북송(北宋)의 이공린(李公麟)과 남송(南宋)의 유송년(劉松年) 등의 화풍의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여겨지지만 남아 있는 작품이 없어 확인할 길이 없다. 일본에 그의 이름이 있는 '백의관음상(白衣觀音像)'이 전하나 전칭을 면치 못한다.

 한편 조선 초 최고로 첫손 꼽히는 화원 현동자(玄洞子) 안견(安堅, 15세기) 또한 경기지역 출신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조선 3대화가'의 첫머리를 장식한 그의 자(字)는 지곡(池谷)이다. 광해군 11년(1619) 한여현(韓汝賢)이 편찬한 '호산록(湖山錄)'에 의거한다. 충청도 지역에서 현전하는 가장 오래된 필사본으로 서산에 대한 사찬읍지이다. 이 중에 본읍을 지곡(地谷)으로 명시하고 그의 위상을 서술하고 있다. '호산록'에선 지곡(池谷)과 달리, 지(地)와 지(智)로 혼용되고 있다. 우리나라 미술사의 아버지 고유섭(高裕燮, 1905-1944)은 광주 부근임을 일찍이 천명해 이 또한 재고를 요한다.

 서예에선 조선 전기의 4대 명필이 경기도에서 활동했다. 세종의 아들인 안평대군은 송설체에 탁월해 중국에서도 유명했고 포천의 양사언(楊士彦, 1517-1584)은 해서와 초서에 능했다. 조선고유 서체인 석봉체(石峯體)를 창안한 한호(韓濩, 1543-1605)도 빠트릴 수 없다.

 

 조선 중기의 화가들-경기 관찰사 윤의립과 홍수주 외

 한자문화권에 있어 화가는 천시되고 그림은 홀대받은 것으로 간주되기 쉽다. 그러나 실상은 다르다. 그림은 교화를 이루며 인륜을 돕고 신묘한 조화를 탐구하며 그윽하고 미묘한 것을 헤아리기에 공은 6경과 같다고 당대 힘줘 말하고 있다. 중국에선 북송 8대 황제 휘종(徽宗, 1082-1135), 명 5대 선종(宣宗, 1399-1435), 청 6대 고종 건륭(乾隆, 1711-1799) 등이 그림에 이름을 남겼다.

 우리나라도 중국과 크게 다르지 않다. 고려왕조에선 공민왕(恭愍王, 1330-1374)을 비롯한 6명의 임금, 조선에서 성군(聖君)으로 지칭되는 세종·숙종·영조·정조 등은 그림감상만이 아닌 직접 붓을 들어 사군자와 산수화 등을 즐겼다. 한자문화권의 문인화가의 존재가 말해주듯 위로는 서화를 즐긴 황실과 관료, 선비들이 한둘이 아니다. 다만 조선왕조는 신분사회로 제도권 내에서 활동한 직업화가인 화원의 신분이 양반 아닌 중인(中人)이기에 신분에 따른 폄훼일 뿐이다.

 조선시대 경기도의 도백(道伯)인 관찰사 수는 600명에 가깝다. 2회와 3회 나아가 4회까지 역임한 이들도 있다. 이들 중에는 청렴과 근신 및 효자들, 정사·개국·원종 등 공신(功臣)들, 천문·지리·수학·역학·의약에 정통했거나 아악 정리한 이들, 서예가 그리고 학문과 문장에 능해 저술을 남겼거나, 그림으로 이름을 얻은 문인화가들도 있다.

 이들 중 중기(1550-1700 경) 화단에서 17세기 전반의 월담(月潭) 윤의립(尹毅立, 1568-1643)과 조선왕조에서 즐겨 그려 독자적인 화경을 이룩한 묵포도(墨葡萄)와 묵매(墨梅)에 이름을 얻은 17세기 후반의 호은(壺隱) 홍수주(洪受疇, 1642-1704)를 들게 된다. 모두 타계 한해 전인 1643년과 1703년 짧은 기간 경기도 관찰사를 역임했다.

 윤의립은 그의 조부가 선조의 어린 시절 사부였으며 부친은 공조판서를 역임한 명문가의 후예이다. 27세에 문과급제 후 공조·예조판서를 역임하는 등 50년 가까이 공직에 있었다. 경기 전에 경상·함경·충청도 관찰사를 거쳤다. 월담의 유작은 매우 드무나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6폭의 '산수화첩'은 네 계절을 8폭에 담은 사시팔경도 계열이었으나 2폭이 산락됐을 가능성이 크다. 끝 폭 겨울 장면엔 그의 호 '월담(月潭)'을 쓴 붉은 먹으로 쓴 행서체 관지가 있다. 소품의 정형산수로 크기와는 별개로 특징 있는 계절의 표현, 화면 구성과 세부 묘사에서 녹록하지 않은 기량과 격조를 읽게 된다.

 그의 아우 윤정립(尹貞立, 1571-1627) 또한 조선후기 대 수장가인 김광국이 모은 화첩인 '화원별집'(국립중앙박물관 소장)내에 '폭포 아래서 피서(瀑下避暑圖)'와 개인소장의 '관폭도'·'행선도(行船圖)' 쌍폭 등 3점이 알려져 있다. '관폭도'에는 폭포를 바라보는 두 노인 주변에서 시중드는 세 동자가 등장하며 이 중 한명은 차를 준비하고 있어 시선을 모은다. 윤의립·정립은 형제가 함께 화가로서 명성을 얻었다.

 경기도 관찰사를 역임했고 글씨에도 능한 홍명원(洪命元, 1573-1623)의 손자 홍수주는 가풍을 이어 청신하고 기발한 근체시로 동시대 시단에서 높게 평가됐다. 문인화가로 그는 묵매와 묵죽를 비롯해 묵포도로 16세기 황집중(黃執中, 1532-1592 이후), 17세기 전반 이계호(李繼祜, 1574-1645)를 이어 17세기 후반 명성을 날렸다.

 홍수주는 41세에 과거에 급제했으나 2년 뒤 파직된다. 김정희가 그러하듯 43세부터 근 10년에 걸친 유배생활을 했다. 이 시절은 학문과 서화에 잠심한 또 다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귀양서 풀린 뒤 타계까지 10년은 분주했으니 사신으로 연경을 다녀오고 동부승지로 원접사로 청 사신을 맞이하기도 해 예조참의·경기도 관찰사·도승지·형조참판에 이르렀다. 홍수주는 청빈한 삶으로 회갑 때 변변한 옷조차 마련할 수 없었고 어린 딸은 남의 옷을 빌려 입었다. 빌린 치마에 간장물이 튀자 치마폭에 포도를 그려 중국 북경에서 비싼 가격에 판 일화도 전한다. 유작도 여러 점 알려져 있으며 포도 쌍폭 중 하나엔 잎뿐 포도송이를 그리지 못한 채로 전해진 것은 둘째 아들 홍우열이 완성한 일화가 전한다. 그는 조실부모해 직접 지도를 업을 받진 못했으나 작품을 통한 가풍(家風)의 전수는 가능했다. 동아시아에서 중국 원(元)에서 시작한 묵포도는 동아시아 삼국 중 조선이 선호해 16세기부터 조선 말기에 이르기까지 즐겨 그려진 소재였다.

▲ '달마', 김명국, 종이에 수묵 83.0x57.0cm, 국립중앙박물관
 화원으로 '조선 중기의 최고의 개성파 화가'로 지칭되는 김명국(金明國, 1600경-1663 이후)은 안산 출신이다. 적지 아니한 일화를 남긴 화가로 특히 일본에 두 차례나 조선통신사 수행으로 참가했다. 여러 점에 이르는 '달마'를 비롯한 이른바 선종화(禪宗?) 계열 그림은 우리보다는 일본 체류 시 일본인들의 요청에 의해 제작된 것들로 사료된다. 그는 국제적인 명성을 얻은 화원으로 유작의 상당량이 일본에서 확인된다.

 오랜 세월 학문과 예술이 어우러져 지속적인 민족문화 창달이 이뤄진 경기도는 마르지 않은 깊은 샘으로 개혁의 중심이었다. 조선 근본의 땅(朝鮮根本之地)으로 불리는 데는 그만한 몫과 역할의 수행이 함께 했으니 이는 분명한 역사적 진실로 그림에서도 예외가 아니라 하겠다.

이원복 문화재위원, 전 경기도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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