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건국과 경기제(京畿制)의 확대-(31)한양 가는 길

조선시대 한양은 도읍이며 경제와 문화의 중심지였다.

한양은 국왕과 양반 관료의 통치와 생활에 필요한 물자들이 집중됐다. 권력과 물자를 따라 상인, 수공업자, 노동자, 노비 등 지배층의 수 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도 몰렸다. 한양은 다양한 신분의 사람들이 어울려 사는 상대적으로 역동적인 도시였다. 한양 과밀화는 지금보다 심하면 심했지 덜 하지 않았다. 토지를 기반으로 인적 구성이 크게 변화되지 않는 지방사회와는 확연히 구분됐다.

양반들은 과거를 통해 관직에 진출하기 위해, 백성들은 새로운 삶의 기회를 찾아, 한양 가는 길로 들어섰다. 한양을 떠나는 낙향은 낭만적일지는 몰라도 현실적으로는 권력과 경제의 중심을 이탈하는 것이었다.

도시의 성장과 유지에는 사통팔달로 뻗어가는 길이 필수적이다. 한양도 마찬가지였다. 조선 태조 3년 좌정승 조준과 우정승 김사형은 한양을 가르켜 “사방으로 통하는 도로의 거리가 고르며 배와 수레도 통할 수 있으니, 여기에 영구히 도읍을 정하는 것이 하늘과 백성의 뜻에 맞을까 합니다”라고 했다. 고려 개경은 사실 도읍으로서 조건이 한양에 미치지 못했다. 한반도의 기본적인 교통축은 ‘X’자형을 이루게 되는데 그 중심이 바로 한양이다. 한강 수로는 서해는 물론 내륙지역까지 이어지는 지금의 고속도로와 같다. ‘사방으로 통하는 도로의 거리가 고르다’ ‘배와 수레가 통할 수 있다’는 조선 정치가들의 인식은 현재와도 다르지 않다.

▲ 조선시대 주요 도로 중 하나였던 동래로 옛길 중 가장 험난한 길로 알려진 '관갑천잔도'.
한양이 도읍으로 정해지면서 한양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통하는 길이 정비됐다. 이는 고려시대에 정비됐던 교통로를 조선의 실정에 맞도록 변형시킨 것이다. 성종대에 이르러 기본적인 골격이 완성됐는데 ‘경국대전’에 의하면 41역도 500여 개의 역로망이 구성됐다. 간선은 중앙과 지방 중요도시(각도 감영) 및 변경 군사적 요충지(병영, 수영, 진보) 등을 연결하는 것이었다.

물자의 수송은 주로 수로를 중심으로 정비했는데 수레 보다는 배를 활용하는 것이 편리하다는 인식 때문이었다. 이 밖에도 감영과 그 소속 군현의 치소를 서로 연결하는 교통로, 감영 및 군현과 병영 및 수영 사이에 상호연락과 지원을 위한 교통로도 정비됐다. 41역도 500여 역로망은 간선과 지선들이 서로 엮이면서 형성된 일종의 기간 교통망이었다. 이는 행정과 군사 및 외교 등 주로 통치자 중심으로 교통로가 정비됐던 사정을 보여준다.

조선시대 간선 도로망에 대해서 조선 후기 학자인 신경준(申景濬)이 저술한 ‘도로고’에는 6대로가 소개돼 있다. 제1로 의주로(義州路, 홍제원-벽제-임진나루-개성-의주), 제2로 경흥로(慶興路, 수유리점-노원점-의정부-축석령-포천-철원-원산-함흥-서수라보), 제3로 평해로(平海路, 망우리현-남양주-양평-여주-원주-평해), 제4로 동래로(東萊路, 한강진-양재역-판교-용인-죽산-충주-부산진), 제5로 제주로(濟州路, 동작진-과천-수원-평택·안성-천안-공주-목포-제주), 제6로 강화로(江華路, 양화나루-김포-강화부) 등이다.

여기에는 누락됐지만 봉화로(奉化路, 살곶이다리-뚝섬-송파나루-하남-광주-이천-음죽-충주-단양-풍기-봉화)도 대로에 해당된다.

도로와 교량에 대한 건설과 관리는 공조와 형조에서 각각 나눠 맡았다. 건설과 관련된 토목이나 공역은 공조에 소속된 관부인 영조사(營造司)가 담당했다. 지금의 국토관리청이나 도로공사와 유사하다. 형조 소속 관청인 장금사(掌禁司)는 도로 불법 이용이나 도적이나 불한당을 검문하고 단속했다. 지금의 교통경찰과 유사한 역할이다.

교통로를 활용하기 위해서는 교통수단과 노변 편의시설이 필요하다. 교통수단으로는 말, 수레, 배 등이 있고 노변 시설로는 역, 원, 주막 등이 있었다. 조선시대 교통로를 역로라 부르는 것은 역을 서로 연결해 도로망이 형성됐기 때문이다. 원래 역은 출장 가는 관리들에게 교통수단과 편의를 제공하기 위한 것이다. 역에 소속된 관리로는 찰방·역승 등이 있었다. 그 아래 역장·역리·역노비 등 역민도 있었다.

역승은 종9품 하급 관리로 역이 있는 지역의 유지 중에서 골랐다. 그런데 점차 지역 사정에 밝은 역승이 사적인 이익을 챙겨 문제가 됐다. 또한 말단관리이다 보니 대부분 높은 관리들이 이용하는 역에서 그들의 부당한 요구를 거부할 수 없었다. 결국 세조 때에 역의 최고 책임자로 종6품의 문관인 찰방을 두게 됐다. 역장은 역리 중에서 2∼3명 뽑았으며 역노비는 상등역에 50명, 중등역에 40명, 하등역에 30명씩 배정됐다.

역에는 상당수의 인력과 역마가 있었다. 따라서 이에 소요되는 비용이 만만하지가 않았다. 역에 소요되는 경비는 국가가 지원을 했지만 역로의 사정에 따라서 소요되는 비용은 차이가 있었다.

특히 외국 사신이나 고위 관료가 빈번히 통행하는 역로와 역은 문제가 심각했다. 이들이 역에 유숙할 때 과도한 접대가 이뤄지기 때문이다. 접대에 대한 부담은 역에 소속된 역민들은 물론이고 주변지역의 일반 백성들에게도 폐해가 됐다. 15세기 중기부터 그 폐해가 지적됐지만 16세기에 이르러서는 거의 전국적으로 문제가 됐다. 역민이 도주하고 역도 피폐화 돼갔다. 임진왜란을 거친 후에는 대부분의 역은 점차 기능을 상실했다.

원도 전국 대부분의 교통의 요지에 설치됐다. 고려시대 원은 민간에서 운영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대체로 사찰에 부속돼 운영됐다. 조선시대 숭유억불 정책이 시행되면서 사찰에 부속된 원도 국유화시켜서 국가에서 직영으로 바뀌었다. 일부 승려들은 환속돼 원 운영의 책임자(원주)로 임명됐다. 원도 국가에서 운영비를 받았다. 원을 이용하는데 신분의 제한이 따로 없었으나 대부분 관료들이나 양반들이었다.

백성이 이들과 어울려서 원을 이용하기는 어려웠다. 높은 신분의 사람들과 같은 공간에 머물러 봤자 여행의 편의는 고사하고 괴롭힘을 당하기 일쑤다. 원도 국가 재정이 악화되면서 점차점 쇠퇴해 갔다. 더구나 관료나 양반들도 과도한 접대 요구 역시 원의 재정 악화의 원인이었다. 16세기를 지나면서 대부분 국가에서 운영하는 원은 문을 닫고 그 기능은 민간에서 설치한 주막으로 이전됐다.

주막이 크게 성행하게 된 것은 조선후기이다. 상업이 발달되면서 여행자의 수가 급증하고 역과 원이 쇠퇴했던 것이 원인이었다. 교통의 요지에 여러 채의 주막이 밀집하여 주막촌도 형성됐다. 한국의 마을은 대부문 큰 길에서 벗어난 곳에 입지했다. 큰 길은 외지인의 왕래로 병이나 나쁜 풍속이 유입되는 통로로 마을 공동체를 파괴한다는 관념이 반영된 결과다.

하지만 주막촌은 대로변에 형성되는 것이 특징이었다. 성남 판교, 서울 노원, 파주 파주리, 과천, 포천 송우리, 송파, 양재, 용인 구성 등은 한양 가는 길에 대표적인 주막촌이었다. 길가를 따라서 주막이 연이어 늘어져 있었고 과객, 상인 등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모였다. 민간의 주막은 이용자의 권력이 아니라 경제력에 따라서 독실부터 다인실까지 다양한 형태의 편의를 제공했다.

조선시대 초기 역로와 노변시설은 철저하게 국가주도로 설계되고 운영됐다. 정치 군사적인 목적이 깊게 투영된 결과였다. 하지만 16세기 이후 지방에 기반을 둔 사림세력의 등장과 이에 따른 사회 변화가 이뤄지면서 한양 가는 교통로와 노변시설 역시 변화됐다. 관리와 사신의 편의를 중심으로 설계된 길과 편의시설이 점차 민간의 통행과 안전을 위한 체계로 변화돼 갔다. 국가가 교통망을 장악하고 철저하게 통제하고 관리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다.

조선 후기 상업이 발달하고 여행자의 숫자가 급증하면서 이러한 변화는 더욱 가속됐다. 민간에서 사용하는 교통로가 국가 교통체계에 새로 편입되는 일도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삼방로이다. 삼방로는 한양과 원산을 연결하는 교통로다. 이 노선의 조선의 공식 교통로는 철령로였다. 삼방로는 명태의 길이기도 했다. 원산에서 잡히는 명태가 한양의 밥상에 오르면서 보다 빠른 길이 필요했다. 철령로는 국방상 이유로 곳곳에서 여행자에 대한 통제와 감시가 심했다. 명태가 상하기 전, 3일 안에 원산에서 서울에 도달해야 하는 상인들은 그 불편을 감수할 수 없었다. 그들은 관원과 군인들의 눈을 피해 폐기한 삼방로를 지름길로 이용하기 시작했다. 결국 정부도 기존의 정책을 포기하고 삼방로를 활용할 수 있도록 조치했다.

이렇게 보면 조선시대 ‘한양 가는 길’의 변화는 통치자 중심의 길에서 점차 이용자 중심으로 재편되는 과정이었다.

서영일 한백문화재연구원장








저작권자 © 중부일보 - 경기·인천의 든든한 친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