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전기의 경기문화- (32)조선전기 왕릉의 정비와 석물의 의미

왕릉 석조물의 정비

2009년 6월30일 스페인의 세비야에서 개최된 33차 세계문화유산위원회에서는 조선시대에 조성된 왕릉 40기를 유네스코 세문화유산으로 등재했다. 이는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유례를 볼 수 없는 일로써, 조선이라는 국가 전체를 온 인류가 지키고 보존해야 할 귀준한 문화유산으로 인정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왕릉이라 함은 추존왕과 왕비를 비롯해 왕과 왕비의 무덤인 능을 지칭하고 있고 이들이 바로 조선시대를 통치했던 지배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왕릉은 왕실문화를 대변하는 지표라 하겠다.

조선시대에 조성된 왕릉에는 전 시대에 걸쳐 다양한 석물(石物)이 조성되는데, 이들은 피장자의 권위와 신분을 나타내는 표상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의 조성에는 피장자인 왕의 사망 연대가 확실함에 따라 당시 조각의 기법과 양식을 파악하는데 매우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조선전기에 조성된 왕릉에 대해서는 전하는 의궤가 없어 자세한 상황은 알 수 없지만 ‘조선왕조실록’을 통해서 파악할 수 있다. 즉 ‘세종실록’의 기록을 통해 문관(文官)과 무관(武官)의 석인 1쌍 및 석양(石羊)과 석호(石虎)가 조성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더불어 장명등과 망주석을 비롯한 다양한 시설물도 조성되고 있음은 현존하는 왕릉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조선전기 왕릉의 정비는 주로 고려왕실에서 이룩된 전통의 계승, 명나라 예제(禮制)의 도입. 조선만의 독자적인 예제 확립이라는 측면이 강조되고 있고 이중에서도 고려와 명나라와는 다른 조선만의 독자적인 왕릉 예제의 확립이라는 측면이 돋보인다.

그렇지만, 조선전기 왕릉에서 이룩된 석물 조성은 비단 고려와 조선시대에 국한된 것만은 아니었다.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괘릉(원성왕릉으로 추정, 재위 785~798년)에서는 봉분을 둘러싼 호석과 더불어 사자상으로부터 석주와 문관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석물이 전면에 배치되고 있어 후대 왕릉 석물배치의 기원을 보이고 있다. 뿐만 아니라 성덕왕릉(재위 701-737년)과 흥덕왕릉(재위 826-836년)에서 문·무관석이 배치된 예를 볼 수 있다. 이 같은 점에서 보면 왕릉에서 석물의 배치는 조선시대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통일신라시대로부터 오랜 연원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통일신라시대에 시작된 왕릉의 석물조성은 고려시대에 조성된 공민왕릉에서 완성을 추구하고 있다. 즉, 봉분은 물론 이를 둘러싼 호석과 난석석, 주변에 배치된 석양과 석호 그리고 무덤 전면에 배치된 장명등과 두 쌍의 문·무관석은 지금까지의 왕릉애서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제도였고 이는 조선시대로 전승돼 조선왕릉의 성립에 지대한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이상과 같은 관점에서 보면 보편적인 역사적 사실과는 달리 조선 전기에 조성된 왕릉은 송과 명나라의 제도를 그대로 답습한 것만은 아니었다. 즉, 통일신라시대 이래로 계승됐던 왕릉의 형식과 당시 중국에서 성행하던 의례에 그들만의 문화적 소양을 더해 새로운 형식의 왕릉을 조성한 것으로 판단된다.



석물의 구성과 상징

조선시대에 조성된 왕릉에서 능(陵)의 구역은 상계(上階)·중계(中階)·하계(下階)로 구분된다. 석물은 바로 이 구역 안에 배치되는데, 대체로 하계에는 무인석과 석마(石馬), 중계에는 문관석과 석마, 상계에는 석호와 석양을 비롯해 망주석, 상석, 장명등이 배치되는 것이 일반적인 예이다. 더불어 봉분에는 호석과 난간석이 조성되고 있다. 이중 석마는 건원능(조선태조의 능, 1408년)을 비롯해 정종 후릉(1420년), 태종 헌릉(1422년)에서는 조성되지 않다가 1441년(세종 24년)에 이르러 세자빈인 현덕빈(顯德嬪, 1418-1441년)의 묘 조성을 계기로 건원능과 후릉, 헌릉에 추가 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들이 지닌 구성과 의의를 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봉분의 중단이하에 조성된 호석은 장방형 판석을 사용해 조성했고 벽면에는 다양한 문양이 조식돼 있다. 이처럼 봉분의 하단에 조성되는 호석은 고구려의 장군총 주변에 세워진 거대한 석재를 가장 이른 예로 보고 있다. 이같은 호석은 백제 한성도읍기에 조성된 석촌동 고분군뿐만 아니라 경주에서 볼 수 있는 적석목관분의 하단부에서도 그 잔재를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초기적인 양식으로서 봉분에 직접 호석을 돌리지 않았다. 이후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왕릉에서 판석형의 호석이 채용되고 부분적으로는 12지상을 새긴 것도 등장하고 있다. 이같은 전통은 고려시대에 조성된 공민왕릉으로 이행돼 조선전기의 왕릉에까지 영향을 준 것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조성 왕릉의 봉분에서 확인되는 호석은 삼국시대에 조성된 왕릉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다.

봉분의 후면에 배치된 석양과 석호는 북송(北宋)과 명나라 때의 능에서도 확인되지만, 조선 전기 왕릉과는 차별성을 보이고 있어 직접적인 영향을 논하기에는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때문에 조선 전기의 왕릉에서 확인되는 석양과 석호는 공민왕릉과 친연성이 있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석양과 석호는 봉분의 후면을 중심으로 좌우 대칭을 이루며 모두 8마리가 배치되고 있다. 이중 석양은 4개의 다리를 곧게 편 입상(立像)의 형상인데 효(孝)와 길상(吉祥)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더불어 희생과 묘주(墓主)의 영혼을 천상으로 운반하는 승천, 악귀를 물리치는 신수(神獸)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석호는 뒷다리는 무릎을 꿇고 앞다리는 곧게 세운 정면상으로 만들어졌으며 벽사(辟邪)를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봉분의 정면 중앙에는 상석과 장명등이 배치되는데, 이중 주목되는 것은 장명등이다.

장명등은 봉분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는데 묘역(墓域)을 밝히는 등(燈)이다. 실제로 등을 켰는지는 알 수 없지만 불을 밝히기 위한 도구라는 점에서 기능 이상의 상징성을 지닌 것으로 판단된다. 이처럼 실제 사용 여부를 떠나 주변을 밝힌다는 상징과 기능성은 불교의 석등에서 유래된 것이다.

석등은 사찰의 법당이나 석탑 앞에 조성돼 꺼지지 않는 불법(佛法)을 상징하는 조형물이었다. 그런데 통일신라시대 후기에 조성된 강원도 양양에 있는 선림원지 석등이 기왕에 확립된 법식과는 달리 홍각석사탑 전면에 배치됨으로써 헌등(獻燈)의 의미로 변화되고 있다. 이후 고려말에 조성된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 앞 석등, 양주 회암사 나옹화상·지공화상·무학대사 승탑 앞 석등으로 계승되고 있다. 고려말에 조성된 3기의 석등은 모두 승려의 사리가 봉안된 승탑 앞에 건립된 점으로 보아 불교적 의미의 석등이 이 시기에 이르러 장명등으로 그 성격이 변화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더불어 공민왕릉 전면에 배치됨으로써 장명등으로서의 기능과 성격이 명확히 수립됐고 이후 조선 전기 왕릉에도 영향을 준 것으로 이해된다. 더불어 무덤은 암흑의 공간이라는 상징에 견주어 볼 때 고구려와 백제시대의 석실분 및 전축분에서 실제 등잔을 놓았을 것으로 보인다. 때문에 지상으로 그 위치가 이동됐다는 점 역시 주목되는 대목이다. 이같은 점을 보면 장명등은 암흑으로 점철된 죽음의 세계에 밝음이라는 새로운 세계를 제공하는 상징물로서의 의미가 부여된 것으로 생각된다.

문관석과 무관석은 각각 중계와 하계에 위치하는데, 각각 한 쌍씩 조성됨과 동시에 서로 마주보고 건립되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이들은 파장자인 왕의 권위와 위엄을 표상하고 있는데 문관석에서는 당시 문인들의 의복에서 관모에 이르기까지 의생활을 알 수 있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이에 반해 무인석은 모두 갑옷을 입고 칼을 쥐고 있는 자세를 취하고 있는데, 당대 무인의 기상을 잘 반영하고 있다. 더불어 이들이 착용하고 있는 갑옷과 무기들을 통해 당시 무인들의 무장상태를 파악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이처럼 조선시대의 왕릉앞에 조성된 문관석과 문인석은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경주 괘릉의 전면에 배치된 석인상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다. 괘릉의 무인석은 서역인의 모습으로 표현됐음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지만 이들에게서 풍기는 강인함은 왕릉의 수호자로서의 역할을 하기에 충분한 것으로 파악된다. 이처럼 왕릉앞에 등장하는 석인(石人)은 통일신라시대의 왕릉에서 시작됐으며 이후 공민왕릉을 거쳐 조선 왕릉에서 규범으로 정착됐음을 알 수 있다.

이같은 무인석과 문관석의 뒤에는 석마(石馬)가 위치하고 있다. 석마는 조선시대 이전의 능에서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동상으로 1442년(세종 24년)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석물이다. 4개 다리를 곧게 편 정면상으로, 하늘로의 승천(昇天)과 무덤의 수호를 의미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더불어 문관석과 무인석의 인근에 배치됨을 볼 때 왕의 권력을 수호하고 위엄을 표방하는 의미로도 해석되고 있다.



석물의 의의

조선시대 전기에 조성된 왕릉 앞에 조성된 석물은 피장자인 왕의 권위와 위엄을 표방하는 대표적인 조형물이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길상(吉祥), 벽사(辟邪), 수호(守護)의 의미를 지닌 것으로 파악되는데 왕실의 권위와 위상을 가장 함축적으로 표현한 조형물이다. 뿐만 아니라 조선전기에 조성된 왕릉에 조성된 석인과 석양을 비롯한 석수(石獸)는 조선의 통치이념과 사상은 물론 학문과 예술 전반에 이르기까지의 제반 사항을 인간과 동물에 투영된 왕실문화의 한 표상이다. 뿐만 아니라 왕릉의 조성과 동시에 조성된 석물은 건립연대가 분명하기에 조선전기 미술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게다가 자유분방하게 조성된 민간예술에 비해 묘역의 위치 선정으로부터 석물의 조성에 이르기까지 국가에서 주도된 탓에 당시 정치, 사회, 문화계의 현상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더불어 왕릉의 정비와 함께 정착된 석물의 배치는 송과 명나라의 제도를 수용했다기 보다는 주로 고려시대에 조성된 공민왕릉의 그것을 계승 발전시킨 탓에 조선만의 독자적인 석물의 양식과 배치를 완성한 것으로 판단된다.


박경식 단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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