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살려낸 것과 버려진 것으로 안양을 기억하다.

삼십여 년 전에 안양은 흰 연기를 뿜는 공장이 많으면서도 포도와 딸기 농사가 유명했다. 안양천의 맑은 물 덕분이다. 여름에는 안양유원지로 사람들이 몰려 북새통을 이뤘다고 한다.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에서 기차를 타고 떠난 여행에서 물놀이하며 포도를 먹는 것은 최고의 휴가였을 것이다.

공업과 농업을 적절하게 유지하던 안양은 1990년대에 공장이 이전하고 평촌 신도시가 개발되며 큰 변화가 있었다. 없어진 곳은 손에 꼽을 수도 없고 대부분 아파트 단지로 바뀌었다. 옛 흔적은 도시의 점처럼 남아있다. 기억을 남겨 활용했거나, 남아있지만 버려진 채 방치된 곳이 있다. 시작은 화려했으나, 시간이 지난 후에는 다른 모습이 된 것이다.

옛 기억을 ‘살려 낸’ 근대문화유산은 안양시 만안구 석수동에 위치한 안양예술공원(옛 안양유원지)과 김중업건축박물관(옛 유유산업)이다.

안양유원지는 2003년에 시작한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로 탈바꿈하였고, 유유산업은 우여곡절 끝에 김중업건축박물관으로 개관했다. 2014년 3월의 일이다. 해당 홈페이지의 연혁에 따르면, 안양시가 2007년에 토지를 매입하여 매장유물, 안양사라는 이름이 적힌 와편 발굴을 거쳤다.

이곳은 통일신라 중초사와 고려 안양사가 있던 가람터의 기억과 근대건축문화유산이 어우러진 계획을 이루었다.

▲ 옛 안양유원지(위)와 현 안양예술공원(아래)의 모습
먼저 옛 안양유원지를 알아봐야겠다. 오래전에도 삼성산 계곡물에서 탁족을 했으나, 돌을 쌓은 인공 풀을 만든 때는 1932년이다. 철도수입 증대와 안양리 개발을 위하여 안양역장, 서이면장, 시흥 군수 및 지역유지가 힘을 합쳐 계곡물로 안양풀을 만들었다.

초석에 새긴 ‘안양 풀 소화 7년 8월 준공(安養 プ-ル 昭和 七年 八月 竣工)’으로 알 수 있다. 안양유원지의 시작이다. 지금은 초석 바위 아랫부분이 콘크리트에 묻히고, 일제강점기 일본 연호였던 소화(昭和)는 지운 흔적이 있다.

경부선 안양역에서 안양유원지까지 도보로 가는 것은 약간 불편했다. 안양역장이 1935년, 1939년 여름에 안양풀장역을 임시 개통했으나, 단발성이었다. 1960년대부터 여름에 물놀이하는 문화가 성행하며 안양유원지는 더욱 유명해진다. 1966년에 안양풀장역을 다시 열어 여름철 주말과 공휴일에 평일 4만명, 주말 10만명이 타고 내렸으나 1969년 여름을 끝으로 안양풀장역은 사라진다.

행락객이 줄어들던 중에 1977년에 큰 수해가 있었다. 삼성산에서 내려온 바위와 돌이 안양대교를 반파할 정도였다. 이 피해로 아름다운 경관이 사라져 계곡은 특색을 잃고, 음식점만 무질서하게 난무했다.
▲ 안양예술공원 파빌리온.

점점 쇠락하는 환경을 개선하려는 노력이 일어났다. 앞서 말한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로 안양파빌리온(알바로 시저 홀), 인공폭포, 야외무대, 산책로, 전망대, 다양한 예술 작품을 설치하고 안양예술공원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이때 지역이 다시 활발해졌으나, 안양유원지의 흔적이 무시된 것은 아쉽다. 특히 인공풀과 가까워 번화했던 골목은 쓸쓸하다. 걸어서 안양유원지를 찾았던 사람들이 자동차로 오는 일이 많아지며 길의 위계가 바뀐 것이다.

그래도 일제강점기 주택으로 추정하는 백운여관과 영남여관은 자리를 지킨다. 드라마 촬영지였던 백운여관은 영업이 끊기고 영남여관이 근근이 맥을 잇는다. 왕궁카바레였던 카페 ‘데이지아’는 쓰러지기 직전이다. 이 길은 쇠락한 건물군과 군데군데 공터로 을씨년스럽다.

▲ 김중업건축박물관
골목을 지나서 안양예술공원의 입구 쪽으로 오면 김중업건축박물관(옛 유유산업)이 있다. 김중업은 현대건축의 거장으로 불리는 르코르뷔지에 건축연구소에서 서양근대건축을 접한 후에 유유산업(1959)을 설계했다. 대표작은 서강대학교 본관(1958), 주한프랑스대사관(1960), 제주대학 본관(1964), 서산부인과의원(1965), 부산 UN묘지 정문(1966), 3·1빌딩(1969), 올림픽공원 상징조형물(1988) 등이 있다. 그는 유연한 곡선과 원형, 직선 등으로 예술적 감각을 살린 건축가로 한국현대건축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김중업건축박물관은 문화지킴소의 왼편에 통일 신라 중초사 3층 석탑과 당간지주를 두고 김중업관, 문화누리관, 어울마당, 공장 굴뚝, 안양사지관이 줄지어 위치해있다.

옛 수위실은 문화지킴소가 되었다. 날렵하고 독특한 계단을 오르면 모든 벽을 유리창으로 한 둥근 평면의 건물이다. 방문객에게 부드럽고 경쾌하고 밝은 분위기를 주었을 것이다. 옛 사무동을 활용한 김중업관은 건축 모형과 디지털과 영상자료 등으로 김중업을 알려준다.

김중업관의 외관은 독특하다. 단순한 형태의 건물이지만, 기둥의 역할을 하는 구조물을 외부로 노출시켜 변화를 주었다. 길게 뻗은 현관 지붕은 X자형 기둥으로 지지한다. 김중업관이 건축구조로 예술적 표현을 하였다면, 옛 연구동이었던 문화누리관은 예술 작품을 직접 설치한 건축물이다. 예술품을 덩그러니 놔두지 않았다. 2층 코너에 조각가 박종배의 모자상과 파이오니아 조각상을 설치한 것은 순수 예술과 건축의 훌륭한 조화이다. 젖꼭지 형태의 붉은 조형물은 냉난방 환기구로 파격적 시도이다. 투박한 어울마당(옛 보일러실)과 뒤쪽 굴뚝을 보면 공장이었던 것을 손쉽게 기억할 수 있다.

구석에 있는 안양지관 옛 창고를 확장하여 출토유물을 전시하고 과거와 근현대, 미래를 표현한 영상물을 볼 수 있다. 중앙 마당은 유유산업 공장의 일부였던 기둥의 잔재로 ‘사라져가는 문자들의 정원’이라는 배영환의 작품을 설치하였다.

이제 소개할 건물은 풍전등화 같은 상황에 닥친 ‘버려진’ 곳이다. 그저 남아있을 뿐이다. 안양시 만안구 안양동의 농림축산검역본부와 옛 안양경찰서이다. 농림축산검역본부는 작년 말부터 김천혁신도시로 이전을 시작하였다. 올 4월에 이사가 끝난 후 8월19일에 안양시와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MOU를 체결하고 복합개발을 계획 중이다. 옛 안양경찰서는 2003년에 리노베이션하여 안양신필름예술센터로 2년 정도 이용되었으나, 만안경찰서로 임시 사용하고 2012년부터 방치된 상태로 활용방안을 강구하는 중이다.

농림중앙식품부 농림축산검역본부(옛 가축위생시험소)는 안양의 옛 도심을 관통하는 안양로에 있다. 옛 가축위생시험소가 1942년부터 안양에서 70여년동안 가축의 전염병과 질병에 대한 예방을 연구하는 축산 계통의 의학 연구소였다. 정문을 들어서 왼쪽 끝부분에 남아있는 건물은 1950년 후반에 한미경제 원조로 이광노가 설계를 헸다. 그는 1954년에 아이 엠 페이(I.M.Pei) 사무실을 거쳐 무애건축을 개설한 후, 안양 컨트리클럽하우스, 동숭동 서울대학병원, 여의도 국회의사당 등 건축 활동과 서울대학교에서 후학을 양성한 한국 현대건축계의 원로이다.

옛 가축위생시험소는 국제주의적 경향의 디자인으로 모던한 느낌이다. 현관 지붕은 다소 과장된 크기이지만, 앞부분을 들어올려 날렵함을 강조하여 경쾌한 기분을 준다. 내부는 당시 업무시설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현관 전면에 군더더기가 없는 단순한 형태의 계단이 있으며, 복도 양옆에 사무실이 있다. 지금은 바닥이 비닐 타일로 바뀌었으나, 인조석 물갈기 바닥이 남아있을 것이다. 건립 때에는 항생항습실, 무균작업실 등 특수 시설을 갖추었으나, 실 구획 정도가 남아있다. 실의 흔적은 외관 창에서 확인할 수 있는 정도이다. 재료의 변화가 적은 1층 외관을 보면, 실의 종류에 따라 창턱의 높이를 다르게 했으며, 창의 형태도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현관 오른쪽 창은 남동 향으로 살짝 비틀었으며, 거친 느낌을 살린 창턱이 튀어나와 있다. 아마도 실의 용도에 맞춰 햇빛의 영향을 고려한 설계일 것이다.

정면 3층은 한국 현대미술사의 대표 조각가 김문기가 동물을 구상화하여 디자인하였다. 동물을 다루는 연구소로 인간을 위해 생명을 바친 동물을 기리는 의미있는 상징이다. 앞뜰 정원의 동물 위령비도 마찬가지이다. 1969년 10월20일에 세워진 비석으로 연구소 직원이었던 최재윤 박사가 작성한 ‘열 목숨 얻기 위해 한 목숨 바친 그대 희생 빛내리. 넋이여 고이 잠들라’는 비문이 새겨져 있었으나, 김천으로 이전했다.

국립수의과학검역원을 뒤로 하고, 남쪽으로 내려 오면 성결대학교 사거리에서 명학역 방향으로 옛 안양경찰서가 있다. 지금은 용도 없이 비어있고 주차장에 건축 자재와 장비들이 쌓여있을 뿐이다.

2003년에 신상옥 감독과 최은희 배우가 안양신필름예술센터를 개소하여 2년 여 동안 아역, 대학입시, 연기자, 가수, 영화감독 등을 위한 교육을 하였다. 앙가주망 건축사사무소의 최승원이 리노베이션을 했다. 2003년 ‘경기도 근대문화유산 조사 및 목록화 보고서’ 조사 당시를 기억해보면, 앞의 업무동은 사무실, 강사실, 강의실로, 뒷쪽은 공연장과 준비실, 스튜디오 등으로 사용했다. 특히 둥근 형태의 유치장을 살려내 공연장과 연습실로 재활용한 좋은 사례였다.

안양경찰서를 영화관련 공간으로 바꾼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1957년부터 안양시 석수동에 안양영화촬영소가 있었다. 영화촬영, 편집, 현상, 미술, 음악, 사진, 소품, 분장 등 모든 분야의 제작이 가능한 시설을 구비한 곳이었다. 한국 근대영화의 역사를 주도하며, 1960~1970년대 한국 영화의 대표작품이 제작되었다. 이러한 지역 역사를 살려 2002년 11월에 ‘안양영화촬영소회고전’과 신필름에서 제작한 한국영화를 상영하고 영화산업 육성방안을 개최하기도 하였다.

안양시에서 옛 안양경찰서를 매입하여 리노베이션과 신필름이 임대하는 과정에서 논란이 많았다. 시민과 협의하지 못한 채 영화의 도시로 만들려는 계획은 어긋났다.

최근 동향은 안양시는 민간개발업자에게 매각을 추진 중이다. 일부 시의원과 시민은 이곳이 만안구과 동안구를 잇는 교통의 중심지이므로 시외버스 환승터미널과 공공 기관을 유치할 것을 제안하기도 한다. 거센 바람 앞에서 폐허로 서 있는 안양경찰서에 덩그러니 남은 ‘제1회 안양국제청소년영화제’ 현수막이 안타깝다.

경기도근대문화유산을 찾아보는 일에 안양을 정한 것은 남아있는 것이 꽤 있다는 것을 이야기해보고 싶어서였다. 공들여 남겨놓은 김중업건축박물관을 보면 비슷한 시기에 생겼던 옛 가축위생시험소는 안쓰럽다. 비어있는 건물과 터에 어떠한 계획이 이루어질까? 개발 계획을 젖혀두고, 옛 의미를 찾으려니 글을 쓰는 동안 착잡한 마음이었다. 터의 의미를 알 수 있고 시간의 흐름과 가까운 과거를 기억할 수 있는 계획이 이루어지길 빌어본다.

이현정 건축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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