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전기의 경기문화 (33)백자, 조선의 운명과 함께 하다

조선시대 유교의 이념을 담은 그릇이었던 백자는 조선 왕조와 함께 존속하면서 다사다난한 역정을 보인다. 500여 년 간 유교의 이념을 고수한 국가는 전세계 조선이 유일하다. 그만큼 백자는 실용적이고 과하지 않은 장식으로 소박함을 유지했고 긴 시간 동안 왕조의 흥망성쇠한 운명을 온몸으로 표현하고 있다. 왕조의 기운이 넘치고 융성할 때는 백자도 당당한 자태를 보이며 눈처럼 고운 최고의 백색을 띤다. 그렇지만 전쟁과 가뭄 등으로 국운이 쇄했을 때는 회색으로 색이 바랬고 해학적인 문양으로 극복하고자 했다. 조선시대 역사의 흐름과 궤를 같이한 백자는 역사의 회오리 속에 변화의 기점이 되는 큰 사건을 맞게 된다. 임진왜란·분원(分院)의 고정(1752년)·분원의 민영화(1884년)라는 세 가지 사건들을 중심으로 큰 변화를 겪는다.



유교의 정신을 담은 백자의 탄생과 기술의 발전 : 전 기(1392-1599년)

조선 전기 200여 년 동안은 새나라의 건설과 안정화를 위해 조선 왕조가 분주하게 움직이던 변혁의 시대였다. 이 속에서 벌어진 도자사에서의 주요 사건으로 조선백자의 성립과 세련·분원의 설치·청화백자의 발생 등을 꼽을 수 있다.

조선 왕실에선 검약과 실질을 숭상하는 유교 이념에 따라 백자 산업을 부흥시키고자 노력했을 것이다. 유교적 애민 사상의 전형을 보여준 세종대왕(1419-1450년)은 어기(御器)를 백자로 전용했으며 마침내 1470년 경 광주의 경안천(慶安川) 주변에 왕실 소용의 그릇을 담당하는 사옹원(司饔院)의 분원(分院)이 설치됐다.

조선 초기 도자사의 최대 사건은 청화백자의 발생이다. 현재 청화백자의 발생 시기를 15세기 중엽경으로 보고 있는데 특히 세조(世祖·1455-1468년) 때 국산 청화인 토청(土靑)의 개발에 노력했다는 기록이 있어 이를 뒷받침 한다. 당시 중국을 통해 수입한 청화 안료인 회회청(回回靑)의 값이 금값과 맞먹는 고가였다. 특히 청화백자를 제작하기 위해서는 최상질의 태토와 최고 기술의 유약, 완벽한 환원염의 조화가 이뤄질 때 비로소 백자 기술과 미학의 절정체인 청화백자가 탄생하게 된다.

조선 전기는 신흥 왕조의 활기찬 기풍을 반영하듯 전체적으로 기운이 넘치고 당당한 자태를 보이며 내면의 높은 정신 세계를 추구한 성리학자들의 안목을 과시하듯 엄정한 기품이 서려있다. 또한 고결한 인품을 대변하는 티없이 깨끗한 순백의 아름다움을 추구했다.



▲ 백자철화끈무늬병
‘격조格調의 미학’으로 위기를 딛고 일어선 백자 : 중 기(1600-1751년)

임진왜란이 끝난 직후인 17세기부터 광주의 분원이 남종면 분원리로 고정된 1751년까지의 150여 년 간을 말한다. 7년간의 전쟁으로 나라는 황폐화되고 분원은 정상적인 조업이 어려웠다. 그러나 17세기 중엽경 다시 재기돼 선동리 가마에서 활발한 생산 활동의 흔적을 보이고 있다.

한편 이 시기 청 왕조가 들어서자 조선에서는 만주족이 세운 청을 ‘야만’이라 규정하고 ‘조선중화주의(朝鮮中華主義)’를 제창하면서 조선적인 문화를 발전시킨다. 중기의 백자는 이러한 시대 분위기에 편승해 가장 조선적인 도자 미의 세계를 이뤘으며 그 독특한 아름다움은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중기 백자의 문화는 백자질의 변화와 새로운 기형의 창출, 철화백자의 성행, 간결한 청화문의 유행 등으로 그 특징이 대표된다.

우선 백자는 17세기 전반 회백색(灰白色)을 띠지만 점차 백자질이 좋아지다가 18세기 전반에는 눈같이 희고 아름다운 백자인 소위 ‘금사리(金沙里) 백자’를 생산했다. 형태는 전기의 양감이 강조된 당당한 모습에서 위아래로 세장해진 준수한 형태로 변모하며 몸체를 각(角)지게 깎은 것이 새롭게 유행하게 되는데, 조선 백자 미학의 정수라 평가되는 ‘달항아리’가 이 시기의 후반에 완성된다. 문양 장식도 크게 변해 17세기에는 철화백자의 전성기를 맞으면서 해학적인 운룡문(雲龍文)과 간단한 필치의 추상적인 초화문(草花文)이 성행했으며 18세기에 들면 청화백자가 새로운 경지를 이뤄 한국적인 서정미와 고아(高雅)한 문기(文氣)를 짙게 내보이는 난초문 계통의 간결한 초화문이 성행했다.

▲ 백자달항아리, 보물1437호.

실생활 속으로 스며든 청화백자의 부흥과 아쉬운 소멸 : 후 기(1752-1884년)

분원 이설(移設)에 따른 갖가지 문제로 인해 고심 끝에 영조(英祖·1725-1776년)는 1752년에 수운이 가장 편리한 남한강과 북한강의 합류지점인 남종면 분원리에 분원을 고정시킨다. 이후 분원은 한 곳에 정착해 왕성한 활동을 벌이지만 19세기 말에 재원 조달의 어려움과 민간 자본의 유입이 심화되자 1884년 분원의 민영화가 결정되면서 중앙 관요로서의 분원의 종말을 고한다. 후기는 분원리에서 정착·활동한 150여 년 간을 말하며 이 시기의 백자를 통칭 ‘분원자’라 부른다.

조선 후기 백자는 실용성과 장식성이 강화돼 ‘생활의 미’를 추구한 것이 두드러진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기형은 실용에 치중하고 기벽(器壁)이 두터워져 중후한 조형감을 보이지만, 유색은 ‘청백자’로 부를 정도로 벽옥 같은 화사한 색감을 보인다. 기종은 앞 시기에 비해 다양해지며 특히 양반계층의 확산에 따라 문방구류의 생산이 급격히 많아졌다.

이 시기의 백자에서는 일찍이 볼 수 없었던 다양한 장식 문양이 등장해 당시의 사치스런 풍조를 반영하고 있다. 순백자류에도 투각이나 양각 문양이 화려하게 장식된 것들이 많아지며 무엇보다 청화백자의 생산이 급격히 증가해 가히 ‘청화백자의 시대’라 부를 만하다. 18세기 후반에는 사군자·산수·운용문 등이 유행하는데 궁중 화원의 출중한 회화적 기량을 보여 주는 볼만한 도화(陶畵)들이 많다. 19세기 이후에는 민예적인 성격이 강한 길상문(吉祥文)이 대거 등장하고 화려한 색감의 동화 사용도 늘어난다. 또한 한 기물 위에 청화와 철화·동화를 혼용해 화사하게 장식한 다채(多彩) 장식 백자도 성행했다.

19세기 후반 무렵부터 국운이 쇠퇴해 사회가 어지러워지면서 조선 백자도 정체를 잃고 혼탁하게 변하다가 분원이 혁파되고 일본의 신기술이 밀려들면서 급격히 몰락의 길을 걷게 됐다. 백자는 조선시대와 운명을 함께했고 그들의 정신세계와 문화를 형태와 색채로 표현했다. 이제 우리는 박물관 쇼케이스 넘어 백자를 보면서 그들의 치열했던 그리고 당당하고 지조있었던 역사와도 조우할 수 있을 것이다.

김영미 경기도어린이박물관 학예운영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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