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비슷한 때를 두고 토종과 미국의 재난영화가 이어졌다. ‘터널’과 ‘설리(허드슨강의 기적) ’ . ‘터널’이 가상 설정이라면 ‘설리’는 실제 상황. 두 영화 모두가 자국민들의 불안한 시기를 오버랩 해가며 재미를 더해간다. 잊을만 하면 터지는 국내 재난사고와 미국인들의 침착하고 영웅을 만들어 내는 비상한 재주. 여기에 이어지는 당사자들과 이들을 바라보는 관객들의 불안한 심리. 분명 어느 국가에서든지 공포는 자유롭지 못하다. 영화 ‘터널’은 지금 우리가 처한 모든 위기의 복사판이다. 영화 그 어떤 상황에서도 지금 우리와 비슷한 광경이 목격된다. 마치 경주의 지진후 몰려다니는 시시각각의 관심들처럼, 우왕좌왕(右往左往). 그리고 내려진 결론 각자도생(各自圖生).

#2 다른 장면. 2009년 1월15일, 뉴욕의 영하날씨에 승객 155명을 태운 US항공 1천549편이 허드슨강에 불시착했다. 이륙하던 비행기가 새떼에 부딪히며 양쪽 날개 엔진이 모두 손상돼 빽빽한 도심빌딩을 피해 비상착수 한 것. 우리 안방뉴스에도 소개된 이 기막힌 상황의 사상자는 0명. 노련한 경험으로 그리고 침착함을 잊지 않고 모든 승객들을 끝까지 살려낸 기장 체슬리 설렌버거(애칭이 ‘설리’)는 단박에 미국인들의 영웅이 된다. 물론 톰 행크스가 분한 설리는 아내와의 통화에서 그 자신이 포스트 9·11과 경제 불황의 불안한 그늘 아래 살아가고 있음을 고백해 그 안의 공포를 함께 내비친다.

터널 안에 갇힌 이정수 역시 설리와 마찬가지로 비정한 세계 속에서 인간다움을 잃지 않으려 애쓰며 자기와의 싸움을 이어나간다. 그것은 모두 공포 안에 있다. 컴컴한 터널안의 이정수나 차디찬 강물로 비행기를 몰아간 설리, 혼란은 재난을 마주 했을 때 보다 더한 공포를 갖고 있다. 다만 다른 재난영화와 다른 것은 두 영화 모두 주인공들이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을 느끼지 않도록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는 점. 대개의 재난영화들이 사고의 트라우마와 살아남았다는 죄책감 등 혼란을 껴안고 사는 반면 깔끔하게 끝을 내 관객들의 마음을 정리해 준다. 단지 두 영화에서 공포의 종류는 어둠과 비상착수란 준비되지 않은 매뉴얼로 다르지만 갑작스럽게 찾아올 수 있다는 점에서는 같다.

사실상 공포는 얼마 전 우리 국민 모두가 겪은 경주지진처럼 갑자기 문을 두드린다. 그 차가운 노크에 놀라는 사람이 있었고 다 죽어가는 사람이 있는 반면 매일 있는 간단한 교통사고처럼 개의치 않는 사람마저 있었다. 물론 영화에서는 약하고 피곤한 개인의 어깨에 재난의 짐을 얹어 사회가 처한 위기를 슬쩍 얹어 그 위기를 흘려보내기도(모두가 눈치 챌 수는 없어도...) 한다. 문제는 모든 위기의 결과를 국민 모두가 나눌 수 없다는 것을 이제 서로가 안 일이다. 지진이나 전쟁이 한꺼번에 국민 모두에게 떨림을 줄 수 있지만 각자도생이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어디까지나 이제 어떤 조직이나 큰 덩어리에도 의지하기 어렵다는 것을 증명한 셈이다.

대개의 영화는 그저 재미있게 보면 그 뿐이다. 영화에서 공통된 감정이나 쓸데없는 보람 같은 감정등 뭔가를 건지려 애쓰면 쓸수록 괜한 인건비(?)만 더해져 지쳐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는 지금 이 글을 잘 펼쳐내려 ‘설리’안의 공포를 집게로 헤집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와 다른 미국인들의 감정을 대비하려 애썼다. 비행기가 허드슨강에 비상착수하며 승객 중 하나가 구조대원에게 자신들이 괜찮은지 묻는다. 그러자 구조대원은 자신있게 말한다. “오늘은 아무도 죽지 않는다” 하지만 ‘터널’에서 구조대원들은 의로운 구조대장의 돌발행동으로 성공했을 뿐 언론이나 정치인들의 실현가능한 우왕좌왕식 무책임과 구경꾼식 행동으로 일관한다. 바로, 이거야. 코 큰 사람들은 저리 침착하게 대응하고 구조대원들마저 멋진 대사를 읋어 대는데 우리는 왜 이렇게 공포에 초연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것인지.

하지만 이런 부질없는 생각이 곧 들통 난 것은 불행중 다행이었다. ‘터널’에서 이정수가 구조되자 장관의 방문을 기다렸다가 떠나라는 어처구니없는 지시가 내려오고 사고현장에 널린 언론매체와 고위 관계자들 사이에 정수는 구조대장에게 “꺼져, 이 개XX들아!” 이라고 첫 귓속말을 전한다. 영화가 끝나면서 이 말 하나로 관객들은 답답했던 마음을 털어냈겠다. 그냥 영화라 가능한 얘기일 뿐이다. 또 공포 끝에 안도(安堵)의 끝이 만들어 낸 결과다.

갑자기 많은 공포가 대한민국에 몰려오고 있다. 북한의 핵은 모두가 같은 시간에 같이 겪은 지진에 ‘깜’도 안된다. 아직 겪어보지 못해서다. 그렇게 공포는 경험하지 못한게 더 크다. 하지만 언제든 공포는 찾아오기 마련이다. 마치 대선주자들이 반기문의 공포에 떨고 있고 국민들은 정치인들의 이상한 행보에 공포를 느끼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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