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건국과 경기제의 확대 (34)방어와 통신…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다

▲ 해동팔도산악봉화지도(고려대도서관소장)
경기도는 한양으로 진입하는 길목이기 때문에 한양의 방어를 위해서는 아주 중요한 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 한양의 방어는 중앙군인 시위군이 담당했다. 지방 각도의 요충지에는 진(鎭)과 영(營)이 설치됐다. 여기에서 복무하는 군사를 각각 진군(鎭軍)·영군(營軍)이라고 했다. 영군은 병마도절제사가 지휘했고 진군은 첨절제사가 지휘했다. 이들을 합쳐서 영진군 또는 영진유방군(營鎭留防軍)으로 불렀다.

영진군 복무지역은 대부분 변방지역이었다. 이들이 변경 지역을 중심으로 배치돼 있다 보니 자연히 내륙지역은 방어상 공백이 생기게 됐다. 경기도는 아예 영진이 설치돼 있지 않았다. 이러한 문제점을 보완하기 위해 세조 때 진관체제가 시행됐다.

진관체제는 일종의 지역단위 방어체제이다. 각각의 군현이 스스로 자기 고장을 방어하는 것이다. 먼저 각 도에 병영을 설치해 이를 주진(主鎭)으로 삼고 병마절도사를 파견했다. 주진 아래에는 거진(巨鎭)이 있고 첨절제사가 파견됐으나 대부분 목사가 겸직했다. 거진 아래에는 여러 진들(제진· 諸鎭)이 있었는데 군수 이하의 지방관이 지휘·통솔했다.

수군도 육군의 진관체제에 따라 진관조직을 갖췄다. 다만, 제주도나 교동도 등을 제외하고는 지방관이 겸임하지 않고 수군절도사의 관할 아래 우후·첨절제사·만호 등을 뒀다.

경기도의 병마절도사는 관찰사가 겸했다. 경기 감영이 한양 돈의문 밖에 위치하고 있었으므로 경기도의 주진은 한양이었다. 거진은 수원, 양주, 파주, 광주 등에 뒀다. 파주는 임진나루에서 한양으로 진입하는 길목이다. 평안도 방면에서 한양으로 진입하려는 외적을 방어하기 위한 군사적 요충지가 된다. 양주는 함경도와 강원도 방면에서 한양으로 진입하는 길목에 해당된다. 광주는 영남과 충청 지역에서 한양으로 진입하는 요충지이다. 수원은 서해 연안 지역과 호남지역에서 한양으로 들어오는 외적을 방어할 수 있는 요충지가 된다.

수원, 광주, 양주, 파주 등 거진의 외곽으로는 안성, 평택, 여주, 이천, 양평, 가평, 포천, 연천, 장단 등 군현들이 분포돼 있다. 각각의 거진들은 이들 군현을 통솔해 한양을 지키는 방어망이 구성되는 것이다. 이렇게 변경지역부터 경기도에 이르기까지 진관체제가 제대로 작동한다면 매우 촘촘한 방어망이 구성되는 것이다. 이와 유사한 방어체제는 이미 삼국시대부터 있었다. 전국의 요충지에 산성을 축조하고 유사시에는 산성에 들어가 지방관과 지역민들이 합심해 농성전을 펼치는 것이다. 고구려의 수·당전쟁 승리, 고려시대 거란이나 몽골과 전쟁도 이러한 방식과 커다란 차이가 없다.

그러나 조선의 진관체제는 각 진의 방어지역이 인구수에 비해 너무 광범위하고 세분화 돼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각 진을 지켜야 하는 군사들의 수가 너무 적으면 효과적인 방어전을 펼치기 어렵다. 대병력의 적이 침입해 포위되면 적은 군사로 감당하기 어려워 차례로 각개 격파될 가능성이 크다.

군사의 충원에서도 문제가 발생했다. 조선의 병역제도는 양인 농민을 기반으로 한 병농일치제였다. 그러나 농민들을 숙련된 군사로 조련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조선 전기는 명과의 관계가 안정되고 4군 6진의 개척, 쓰시마 정벌 등으로 대외적인 위협이 거의 없는 평화기가 지속됐다. 군역을 피하기 위해 대납, 포납 같이 돈이나 물건으로 군역을 대신하는 것이 일상화돼 군사는 장부 속에만 존재할 뿐이었다.

이러한 문제로 진관체제는 제승방략제제로 보완됐다. 유사시 일정한 지역으로 집결해 중앙에서 파견된 군사지휘관의 지휘를 받게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도 문제가 있었다. 중앙에서 지휘관이 내려오기를 기다려야 하고 각지에서 모인 군사들을 하나의 전투부대로 편성해 지휘하기 어렵기 때문이었다.

또한 한양을 방어하기 위해서는 한양으로 들어오는 요충지에 관방시설을 구축해야 했다. 한양도성은 최후의 방어시설이었다. 조선 전기에는 읍성과 국경 지역의 육군 및 수군의 방어거점인 진보(鎭堡) 축조사업이 계획적으로 진행됐다. 산성축조론이 꾸준히 제기되기도 했지만 읍성 축조가 유행하면서 종래 산성 위주의 방어체제는 점차 퇴락됐다. 내륙 지역의 많은 산성들은 대부분 폐성됐다. 16세기 조선왕조의 방어시설은 국경 지역의 행성 및 그와 연계된 진보들과 읍성, 남서 해안지대의 수군 진보와 연해읍성, 내륙 주요도시의 읍성들이 운영됐다. 제도적으로 국경에서부터 연변진보-연변읍성-내지읍성-도성 등에 이르는 순서로 방어체계가 형성됐다. 하지만 내륙지역에는 읍성이 축조되지 못한 지역이 많았다. 일부 지역은 읍성이 없어 산성이 역할을 대신했다.

특히 경기도 일대에서는 산성이던 읍성이던 거의 활용되지 않았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당시 전국적으로 81개소의 산성 중 경기도는 산성 5개소가 기록돼 있다. ‘신증동국여승람’에는 전국 41개의 산성 중 경기도에는 1개소만 기록돼 있다. 수원읍성이 유일한 것이었다. 결국 조선 전기 한양과 경기도 일대는 한양 방어와 관련된 성곽이 도성 외에는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임진왜란 당시 경상도 해안지대가 돌파 당한 후, 왜군이 급속히 한양으로 진군했던 것은 경기도와 내륙지대에 한양으로 통하는 교통로를 방어할 수 있는 성곽이 없었던 것도 원인이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남한산성, 북한산성 등을 새로 축조하고 포천 반월산성, 여주 파사산성, 안성 죽주산성, 화성 독산성, 임진진성, 양주 대모산성 등 한양으로 진입하는 요충지에 산성을 정비한 것을 보면 조선 전기의 한양 외곽 방어체계가 상당히 미비했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한편, 군사의 운용과 관련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 통신체계이다. 조선 전기 대표적인 통신체계는 봉수제였다. 봉수제는 밤에는 불을 피우고 낮에는 연기를 피워 급한 소식을 알리던 통신제도이다. 봉수를 올리는 곳이 봉수대이다. 봉수는 국가의 기간통신망으로 설치됐기에 엄격히 관리됐다.

봉수를 이용한 연락 방법은 고대부터 있었다. 하지만 군사적 목적에서 설치된 봉수제가 정립된 것은 12세기경으로 추정된다. 조선은 고려의 봉수제를 이어 받았는데 세종대에 이르러 정비가 활발히 이루어졌다. 1419년 거화법, 근무부실에 대한 과죄규정 등이 정해지고 1422년에는 각도의 봉수처에 연대를 높이 쌓고 그 위에 병기를 비치하도록 했다. 이후 봉수제에 대해서는 꾸준한 논의와 정비가 이루어져 제도적인 완비를 보게 됐다.

봉수 운영은 어려움이 많았다. 봉수대를 담당하는 봉화군은 고지에 고립돼 근무하기 때문에 대단한 고역이었다. 생활여건이 나쁘고 시설도 충분하지 않았지만 임무교대 및 보급도 문제가 있었다. 봉화군의 이탈이 빈번해지면서 16세기에 경에는 급격히 기능이 약화됐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에는 전혀 기능하지 못했다. 그 대안으로 이후 파발제가 등장했다. 그러나 사람이 움직여서 전달하는 파발에 비해 봉수는 훨씬 빠른 통신이 가능했다. 이 점 때문에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봉수제는 점차 복구됐다. 봉수군의 경제적 처지를 향상시키는 정책을 펴기도 했다. 이후 봉수제는 파발 및 우역제도와 병행되면서 치폐가 거듭되다가 1894년부터 현대적 전화통신체제로 전환하게 됐다.

봉수는 연대의 설치지역에 따라 경봉수(京烽燧), 내지봉수(內地烽燧), 연변봉수(沿邊烽燧) 등으로 구분된다. 경봉수는 중앙봉수로 서울 목멱산에 있었고 목멱산봉수 또는 남산봉수라고도 했다. 연변봉수는 해안지대에 위치했으며 내지봉수는 내륙지역에 위치하는 것이다. 연변봉수에는 연대를 쌓고 연대 위에 화기 등 각종 병기와 생활필수품을 간수했다. 내지봉수는 연대는 쌓지 않고 연조(아궁이)만 설치한 것이 많다.

봉수대의 해발 높이는 주변 지역에 비해 높은 데 위치하고 있다. 연변봉수는 대체로 해발 300m 이하이지만 내지봉수는 해발 400m 이상이 많다. 주변 지역에 산지가 많을수록 봉수대의 해발 높이가 높아진다. 하지만 봉수대의 높이가 높을 경우 봉화군이 근무하기 어려운 환경으로 부실화될 우려가 더 크다.
▲ 천림산 봉수

지금까지 조사된 봉수대들을 종합하면 평면형태는 장반타원형 또는 장방형의 형태를 기본으로 하고 있다. 높이 2m 내외의 방호벽, 출입시설, 연조, 부속건물지 등으로 구성돼 있다. 경기도의 봉수는 성남 천림산봉수, 평택 괴태곳 봉수, 포천 독산봉수 등이 대표적이다.

서영일 한백문화재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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