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전기의 경기문화 (35) 사대부 문화의 중심지 안산과 별산대 놀이의 산실 양주

정조의 행차

안산(安山)과 양주(揚州)는 거리가 상당이 떨어졌을 뿐만 아니라, 공통점이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경기도 서쪽에 위치한 안산은 독특한 사대부 문화를 간직한 반면, 경기도 중북부의 양주는 조선 초 화려했던 불교문화와 서민의 애환을 담은 별산대놀이를 품고 있다. 하지만 두 도시의 문화나 역사에서 묘한 연관성을 엿볼 수 있다.

그 공통점이 바로 정조(正祖)다. 정조는 불우하게 돌아가신 아버지 사도세자를 복원하고 계획도시인 수원 화성을 축조했는데, 안산과 양주의 문화와 역사 속에서 정조의 발견은 실로 흥미로운 일이다.

1796년 수원화성을 완성하고 나서 1797년(정조 21년)에 정조는 안산을 방문, 안산별궁(지금의 안산객사)에 머물면서 “소반 같은 땅 모양 일만 봉우리 연꽃 같다(地勢盤如萬朶蓮)”는 어제시(御製詩)를 내리고 선비들을 모아 시회(詩會)를 열었다.

이러한 시회의 배경에서 안산은 조선시대에 서울에서 밀려난 양반들이 살면서, 그들의 시나 그림에서 서운하고 아쉬운 감정을 드러내는 작품이 만들어진 도시였다. 특히 ‘안산 15학사’는 그들의 정치적 부침과 낙담을 녹여낸 독특한 시문화를 이룩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양주와 정조는 어떠한 연관성이 있을까? 바로 그 연결점은 사도세자(思悼世子)다. 사도세자는 죽은 후 처음 양주에 수은묘(垂恩墓)로 모셔졌다. 정조가 즉위하고 바로 영우원(永祐園)으로 승격했고 사당은 경모궁(景慕宮)이라 했다. 다시 1789년(정조 13년)에 수원 현륭원(顯隆園-현재 융릉)으로 옮기기까지 영우원을 자주 찾았던 기록을 실록에서 쉽게 볼 수 있다. 이후 1792년(정조 16년)에 광릉(光陵-세조와 정희왕후의 능)을 갔다가, 양주 관아에서 머물면서 신하와 함께 활을 쏘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목사였던 이민채(李敏采)가 세운 어사대(御射臺) 비석이 지금도 남아 있다.

따라서 양주는 1792년에, 안산은 1797년에 정조가 친히 방문해 활쏘기와 시회를 개최했으니 정조의 행차를 통해 두 도시의 연관성을 볼 수 있다. 안산은 서해 관문도시로, 양주는 한양 북쪽 중심도시로 육성하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


▲ 안산 객사

고려 왕실 외척 가문의 도시 안산

안산은 백제, 고구려, 신라의 영토로 번갈아가면서 편입되다가, 고려시대에 들어와 안산군(安山郡)으로 개칭됐다. 이후 현으로 강등돼 수주(水州-지금의 수원)에 속하게 됐다.

고려시대 안산의 역사에서 안산 김씨 김은부(金殷傅)를 빼놓을 수 없다. 1011년(현종 2년)에 거란 2차 침입 때 피난가는 현종(顯宗)을 극진히 대접한 인연으로 김은부의 딸 3명이 모두 왕비가 됐다. 큰 딸인 원성왕후(元成王后)는 덕종(德宗)과 정종(靖宗)을, 둘째 딸인 원혜왕후(元惠王后)는 문종(文宗)을 출산했다. 따라서 왕실의 외척 가문이 된 안산 김씨가 안산 최고의 세력이 됐다.

1271년(원종 12년)에는 몽고군이 안산을 침입했는데, 주민들이 의병을 만들어 승리했다. 이 공로 때문인지, 왕실의 외척이 이유 때문인지는 몰라도 1308년(충렬왕 34년)에 지군사(知郡事)가 파견되는 군으로 승격했다. 이후 1390년(공양왕 2년)에 경기도를 좌·우도로 구분함에 따라 경기좌도에 편입됐고 조선시대에도 그대로 유지됐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안산 서쪽으로 서해바다가 맞닿아 있어 궁중에 생선 등 해산물을 진상하는 안산어소(安山漁所)가 설치됐고 서남쪽에 초지량만호(草芝梁萬戶)가 있고 배가 9척으로 기록돼 있어 당시 안산이 서해안의 주요 거점으로 여겨졌음을 알 수 있다.

안산은 이후 1895년(고종 32년)에 실시된 지방제도 개정 사항에 따라 전국이 8도제로 변경되면서 인천부에 속했다가 1896년에 경기도의 4등군이 됐다. 이후 1976년 ‘반월신공업도시 건설계획’이 수립됐고 1986년에 안산시로 승격됐다.


▲ 양주 관아지

회암사가 있던 양주

고구려와 신라를 거쳐 755년(경덕왕 14년)에 한양군(漢陽郡)이 됐다가, 고려 태조가 한양군을 양주(揚州)로 바꾸면서 처음 양주란 이름이 역사속에서 나타났다. 당시 양주는 지금과 달리 현재의 양주시 뿐 아니라 남양주시, 의정부시, 동두천시, 구리시, 서울 광진구, 노원구, 도봉구, 중랑구를 포함하는 넓은 지역이었고 현재의 양주는 현주(見州)로 불렸다. 이후 지양주사(知楊州事)로 강등됐다가 다시 남경유수관(南京留守官)으로 승격되고 1308년(충렬왕 34년)에 한양부(漢陽府)가 됐다.

1394년(태조 3년)에는 다시 지양주사(知楊州事)로 강등됐다가, 관아를 현주에 설치하고 한양부에 살던 사람들을 옮기고 나서 양주부(楊州府)가 됐다. 1413년(태종 13년)에는 한양 방어의 전략적 위치와 건원릉(健元陵-이성계의 능)과 있어 도호부로 승격됐다. 도호부 승격의 배경에는 회암사(檜巖寺)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고려시대부터 지공(指空)스님이 대규모 사찰로 중창하고 이후 1378(우왕 4년)에 나옹(懶翁)스님이 중건했으며 무학(無學)대사가 말년에 주석해 태조 이성계의 행차도 있었다. 왕조실록에서 태조는 회암사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고 이후 태종(太宗)도 회암사에 머무른 태상왕인 이성계를 문안하기도 했으며 역대 왕들이 회암사를 위한 기록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아마도 이런 이유가 더해져 1466년(세조 12년)에 조선시대 지방 행정단위 중 가장 큰 양주목(揚州牧)으로 승격했다. 그러나 1504년(연산군 10년)에 강무장(講武場-국왕의 무예연마를 위한 공식 수렵장) 설치를 위해 일시적으로 없어졌다가, 1506년(중종 1년)에 유양동 불곡산(佛谷山) 부근에 관아가 자리 잡았다. 이후 1895년(고종 32년)에 실시된 지방제도 개정 사항에 따라 전국이 8도제로 변경되면서 양주목은 경기 소속의 3등군인 양주군이 됐고, 2003년에 다시 양주시가 됐다.



안산 김씨의 세거지 안산읍성

몽골의 침입과 왜구나 여진족 등 이민족의 침입이 빈번해지자 고려시대부터 해안 지방을 중심으로 연안읍성이 만들어졌다. 안산읍성도 서해와 맞닿은 지리적 상황을 생각해보면 처음에는 연안읍성 성격으로 축조됐을 것이다. 그러나 연안읍성이었던 안산읍성은 안산 김씨가 사용한 저택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까닭은 상당 기간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았고 김은부의 딸들이 현종의 비가 되면서 실질적으로 안산 김씨 세력이 안산 일대의 지배 세력이 되면서 안산읍성을 차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발굴조사 결과에서도 저택에 있음직한 시설물도 확인됐다. 또한 안산은 다른 이름이 있는데, 바로 연성(蓮城)이다. 이 연성이란 이름은 연성군(蓮城君) 김정경(金定卿)과 관련이 있다. 김정경은 고려 후기부터 조선에 이르기까지 벼슬을 했고 왕자의 난에서 이방원(후에 조선의 태종)을 지지하면서 연성군에 봉해졌다. ‘안산군읍지(安山郡邑誌)’에서 안산읍성 터를 김정경이 거주한 곳으로 추정했다.

하지만 1308년부터 지방관이 파견됐을 터인데, 지방 세력이 차지하고 있는 안산읍성 내에서의 행정업무는 상당히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이에 처음에는 안산시 목내동에 위치한 목내동산성이 행정중심의 역할을 했었다. 그러나 ‘안산김씨족보’에는 1441년(세종 23년)에 관아가 소릉(昭陵-문종의 왕후 현덕왕후의 무덤)의 화소(火巢-산불을 막기 위해 능이나 묘의 울타리 밖에 있는 풀과 나무를 불살라 버린 곳)로 편입되면서 관부를 선조의 유허(遺墟)로 옮겨왔다는 내용이 있다. 따라서 이 때 다시 안산읍성으로 행정중심을 옮긴 것으로 보인다. 임진왜란 때 한 차례 소실됐다가 1669년(현종 10년)에 옛 관아 터의 동쪽에 중건됐다. 중건될 당시의 정황은 ‘안산현관사중건기(安山縣官舍重建記)’에 자세히 수록됐다.

18세기 지도인 ‘여지도서(輿地圖書)’나 ‘지승(地乘)’에서 수리산(修理山) 아래 능선에 남향해 가장 서쪽에 관아가, 그 동쪽으로 객사, 다시 남쪽에 동향한 향교가 위치하고 있다.

건물로는 정문인 평근루(平近樓)와 동헌, 옥사, 창고와 정자인 망해정(望海亭)이 있었으나 그 위치와 규모를 전혀 알 수 없었다.

이에 발굴조사를 실시해 읍성의 구조, 건물지, 배수를 위한 암거(暗渠) 등을 확인했다. 특히 읍성 내부 서편에서 대형 집수·출수 시설이 밝혀졌고 읍성 벽은 중심은 흙으로 단단하게 다지고 내·외부는 벽석을 쌓은 것이 확인됐다. 또한 기단 길이가 24.5m인 건물지는 객사로 추정돼 2010년에 객사가 복원됐다. 이 객사 앞쪽으로 문지로 만들어진 건물지가 확인돼 평근루로 추정됐고 읍성 내부 서쪽 사면에 공방지와 그에 따른 집수시설도 확인됐다.



현주(見州)에 자리 잡은 양주목

양주는 조선시대 가장 큰 지방행정 규모인 목(牧)이었다. 따라서 목에 걸맞게 행정중심도 객사, 관아, 동헌, 내아, 외아 등 다양한 건물로 이뤄졌다. 그 위치는 유양동 불곡산 주변으로 현주(見州)로 불리는 지역이었다.

‘지승’ 양주목편에는 행정중심 배치도도 그려져 있다. 지도의 중심에 관아가 있으며 북동쪽에 창고, 남동쪽에 향교(鄕校), 남서쪽에 객사(客舍)가 있다. 객사에서 서쪽으로 연무당(鍊武堂)과 사직단(社稷壇)이 있고 남쪽으로는 교통시설인 녹양역(綠楊驛)이 있다. 따라서 행정시설이 한 지역에 집중적으로 배치됐음을 알 수 있다.

양주 행정중심의 규모를 알 수 있는 기록은 ‘여지도서’ ‘양주군읍지(揚州郡邑誌)’ ‘경기지(京畿誌)’ ‘경기읍지(京畿邑誌)’ 등에서 살펴볼 수 있으며, 이 중 ‘경기읍지’의 ‘양주목읍지(楊州牧邑誌)’에서는 각방사례(各房事例) 건물에 대한 자세한 내용이 수록돼 있다.

이를 살펴보면 매학당(梅鶴堂)은 양주목의 아헌(衙軒)이라 해 동헌으로 추정된다. 동헌 26칸, 객사정전 10칸, 내아 26칸 등 모두 23개 건물, 244칸이 기록돼 있다. 아울러 ‘양주읍지(楊州邑誌)’에도 매학당과 외동헌과 내동헌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따라서 상당한 규모의 행정중심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양주군은 ‘원골문화마을조성계획’에 따라 1997년에 매학당을 복원했다.

양주 행정중심 건물지에 대해서도 발굴조사를 실시한 결과, 동헌 권역과 내아 권역에서 일부 건물을 확인했다. 특히 동헌은 현재 복원된 매학당 전면에 정면 9칸, 측면 3칸으로 밝혀졌다. 또한 동헌 구역의 북쪽에 위치한 중동헌(中東軒)도 확인됐다. 특히 불상대좌의 사용, ‘대자복사(大資福寺)’ 명문기와 등도 확인돼 이전에는 사찰이 존재했을 가능성도 제기됐다.



지금의 안산읍성과 양주관아

안산읍성은 현재도 발굴조사 중에 있으며 현재는 읍성을 중심으로 산책로가 조성됐다.

다행이 객사가 복원돼 있어 그 위치와 규모를 어느 정도 가늠해볼 수 있는데 발굴조사가 끝나면 읍성과 확인된 건물지의 정비가 이뤄질 것으로 예상된다. 양주관아는 지금 한참 복원공사 중에 있어 곧 과거 양주 행정중심의 건물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물산이 풍부했던 안산에서 발달했던 시문화와 큰 도시 규모를 자랑하며 별산대놀이가 발전했던 양주, 오랜 기간 동안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두 도시의 행정 중심을 한 번쯤은 거닐어 보는 것은 어떨까?

탁경백 국립문화재연구소 건축문화재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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