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의 조건 다 갖춰

삼학사 오달제(1609∼1637) 선생 묘는 용인 모현면 오산리 산45-14에 있다. 그의 묘는 시신이 없어서인지 봉분이 매우 작다. 묘만 본다면 비록 추증이지만 영의정 묘라 하기에는 초라하다. 그럼에도 이곳을 자주 찾는 이유는 혈의 자연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어 풍수를 공부하기에 좋기 때문이다.

그의 묘에 갈 때마다 정부가 무능하면 개인의 삶이 얼마나 불행하게 되는지를 새삼 깨닫게 된다. 오달제는 해주 오씨 명문가 출신으로 별시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성균관 전적, 병조좌랑, 사헌부 지평, 홍문관 부교리 등 요직을 두루 거치며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1636년 병자호란은 인생을 바꾸어 버렸다. 남한산성으로 피난한 조정은 청나라와 화의를 해야 한다는 주화파와 화의를 반대하는 척화파로 나뉘어졌다. 젊은 오달제는 척화파로 청과의 화친을 극력 반대하였다.

그러나 인조는 청나라에 항복할 수 밖에 없었다. 청나라는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인질로 잡고, 척화파로 양국관계를 악화시킨 홍익환, 윤집, 오달제를 심양으로 끌고 갔다. 청 태종은 이들의 기개를 높이 사 자신의 신하가 될 것을 회유하였다. 오달제는 죽음보다 두려운 것은 불의라며 끝까지 항변하였다. 이에 청 태종은 회유하는 것은 오히려 그들을 욕되게 하는 것이라며 처형을 명하였다. 이에 적장 용골대가 직접 심양성 서문 밖에서 홍익환, 윤집, 오달제를 처형하였다. 오달제의 나이 29세 때였다.

후에 조선 조정은 홍익환에게는 충정공(忠正公), 윤집에게는 충정공(忠貞公), 오달제에게는 충렬공(忠烈公)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모두 영의정에 추증하였다. 세상에서는 이들의 절개와 충절을 기리며 삼학사(三學士)라 불렀다. 이들의 시신은 조선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묘에는 시신 대신 이들의 의관을 묻었다. 오달제의 경우 평소 그가 차고 다니던 요대와 주머니를 묻었다. 그는 심양으로 끌려가기 전 형에게 “내가 끌려가면 죽음을 당하여 시신조차 거두지 못할 것이니 이를 신표로 삼아 묻어 주시오” 하였다고 한다. 묘지 입구의 신도비명이 ‘대낭장비(帶囊藏碑)’인 이유다.

오달제의 묘 바로 아래에는 고령 신씨와 의령 남씨 두 명의 부인 묘가 있다. 오달제가 영의정으로 추증되었기 때문에 부인들도 모두 정경부인으로 묘지명이 되어있다. 첫 부인 고령 신씨는 오달제가 19세 때 시름시름 앓다가 후손 없이 세상을 떠났다. 이 바람에 오달제는 한동안 방황하며 형이 부윤으로 있던 함경도 고원지방에서 보냈다. 28세 때 집안의 권유로 남일성(남구만의 아버지)의 여동생 의령 남씨를 아내로 맞이했다. 이들 부부의 금슬은 남달리 좋았다고 한다. 그러나 불과 1년 만에 오달제가 죽게 됨으로써 후손을 남기지도 못하고 끝을 맺고 말았다.

남씨 부인은 남편의 유골을 모셔오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였다. 그러나 청은 그녀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 홍익환과 윤집의 집안에서는 일찍이 그들의 의관을 예장하여 묘를 만들어 주었다. 해주 오씨 문중에서도 이를 추진하려고 했으나 남씨부인이 혼을 불러 장사지내는 것은 옳지 않다며 반대하였다. 그녀는 남편이 남기고 간 요대와 주머니를 항상 차고 다녔다고 한다. 지금의 묘는 남씨부인이 죽고 난 뒤에야 비로소 조성한 것이다.

요대와 주머니를 묻은 오달제 묘가 발복할 일은 없다. 동기감응은 유골이 있어야 발생하고 직계로만 전해진다. 그에게는 직계 후손이 없다. 다만 영의정으로 추증되자 문중에서는 작은 형 오달진의 둘째 아들 도현을 양자로 삼고 그 후손들로 하여금 제사를 모셔오도록 하였다. 그래서일까 대부분 문화재로 지정된 묘들은 봉분이 크고 화려하게 꾸며지는 반면 이곳은 소박한 모습 그대로다. 그래서 더 애틋하고 정감이 간다.

이곳은 석성산(471.5m)에서 분당 불곡산(335m)으로 이어지는 산줄기에서 갈라져 나온 작은 맥에 자리 잡고 있다. 작지만 혈의 조건인 입수도두, 선익, 순전 등을 잘 갖추고 있다. 입수도두는 묘 바로 뒤에 있는 볼록한 부분이다. 용으로부터 전달된 지기를 모아 놓은 곳이다. 사람의 이마에 비유된다. 선익은 묘 양변의 두둑한 부분이다. 사람의 볼이나 광대뼈에 비유되며 기가 옆으로 새어나가지 못하도록 한다. 순전은 묘 앞의 약간 볼록한 부분이다. 기가 앞으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하는데 사람의 턱에 비유된다.

오달제는 심양으로 끌려가는 도중에 감시를 피해 아내에게 편지를 썼다. 사랑이 구구절절하다. 아직 이십대의 청춘을 피지 못하게 한 당시 정부의 무능에 화가 났다.

형산 정경연 인하대학교 정책대학원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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