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건국과 경기제의 확대 (36)경기감영 경기관찰사

경기관찰사는 경기도의 정치와 행정을 총괄하는 수장으로써 경기감사(監司) 또는 기백(畿伯)이라고도 하며, 조선초에는 관찰출척사, 도관찰사 등으로 불리우다가 세조대 이후부터 정착된 관직명이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1393년 초대 경기관찰사 장자충(張子忠)을 시작으로 1908년 김사묵(金思默)을 마지막으로 650여 명이 역임했다.

경기도는 수도 주위를 관할하는 지역이고 외교·국방상 중요한 곳이었기 때문에 이곳을 책임지는 경기관찰사란 직책은 막중한 자리였다. 관찰사는 ‘일도지주(一道之主)’로서 국왕과 백성을 연결하는 자리이며 도민의 삶과 직접 관련된 지방관이었다.



백성의 삶과 직결된 지방관 - 관찰사

경기관찰사는 고려 공양왕 2년(1390년)에 경기좌·우도에 각각 파견됐고 조선 태종 13년에는 경기좌·우도를 합쳐 관할했다. 경기관찰사는 경기도가 8도 중 가장 큰 도이며, 외교·국방상 중요한 지역이었으므로 역대 집권세력의 핵심 요직이었다. 조선 후기가 되면 수원부 · 광주부 · 개성부 · 강화부의 유수, 병마수군절도사까지 겸직하는 막강한 자리였다.

관찰사는 종2품 이상 임명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실제로는 그보다 품계가 더 높은 대신 반열에서 임명했고 뇌물죄로 적발된 관리의 자손, 행실이 옳지 못하거나 재가한 여자의 소생은 오르지 못했다. 상피(相避) 규정도 엄격해 해당 도의 병사·수사·수령 등 관리와 친척 관계에 있는 사람과 본인의 출신 도에는 원칙적으로 임명하지 않았다. 이러한 제약은 관찰사의 권력이 막대했으므로 지방 세력의 발호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경기관찰사의 출사로(出仕路)를 보면 문신 중진들이 많았으며 출신가계는 당대 대표적인 명문거족의 자제, 공신, 왕실과 인척관계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경기관찰사는 언론 삼사(三司)나 다른 도의 관찰사 등 청요직 출신자들이 맡았으며 경기관찰사를 지낸 뒤에는 판서, 정승까지 오르는 요로였다. 기백 중에는 외적의 침입과 반정에 공을 세운 공신과 정치가로서 이름난 관리들이 많았으니 한확(韓確), 김종직(金宗直), 최명길(崔鳴吉), 채제공(蔡濟恭), 최익현(崔益鉉) 등이 잘 알려진 인물들이다.

임용은 매년 정월에 의정부와 육조의 당상관, 대간의 관원들이 적임자를 이조에 천거하고 이조에서는 엄선해 3인을 고르면 국왕이 최종 낙점했다. 임용을 받은 관찰사는 부임에 앞서 국왕의 은혜에 감사하고 하직의 인사를 올리는데 이 자리에서 국왕으로부터 교서(敎書)와 부월(斧鉞)을 받았다.



▲ 이의현. 1717년 11월에 경기관찰사에 임명됐다. 경기도관찰사 등을 지내고 형조·이조판서를 거쳐 영의정에 올랐다.
관찰사, 지방의 행정·군사·사법 총책임자

관찰사는 ①인적자원의 확보와 관리의 책무 ②권농정책에 따른 농정 ③진휼정책에 따른 도민에 대한 진휼의 책임 ④백성을 교화할 책임 ⑤수세행정으로서 조세·공부(貢賦) 등 국가 재정을 확보하는 임무를 가졌다.

또한 군사 책임자로서 각 도의 행정과 군사를 총괄하는 겸직 제도에 의해 병마절도사 및 수군절도사를 겸하거나 그들을 지휘·감독했다. 여기에 사법적 기능인 감찰권이 더해 도내의 사법권을 지닌 최고재판관이었다. 관찰사는 유형(流刑; 유배) 이하의 죄는 바로 집행할 수 있었다. 수령은 태형(笞刑) 이하만 바로 처단할 수 있었으므로 장형(杖刑) 이상은 반드시 관찰사에게 보고한 뒤 명을 받아 치죄해야 하며 관찰사는 3품 이하의 범죄자는 바로 처단할 수 있었다.

또한 관찰사는 관할 지역을 순력하면서 수령의 치적을 공정하게 고과(考課)하고 포폄(褒貶)하는 임무가 있었다. 끝으로 관찰사의 소임 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그 지방에 거주하는 왕족보호와 능묘관리, 도적방지 및 역로(驛路)를 관리하는 것이었다.

이처럼 관찰사는 국왕의 대행자로서 다양하고도 막중한 권한들을 위임받아 지방을 통괄했던 각 도의 행정장관이자 군사령관이었으며 최고 재판관이었다. 이러한 제도는 관찰사로 하여금 지방을 효율적으로 통치하도록 하는 제도적 장치이면서 동시에 조선왕조가 지향하고자 했던 중앙집권화 정책을 보다 효과적으로 수행하고자 한 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경기관찰사, 국왕 수시 알현·중국사신 접대·왕릉관리

경기도는 왕실과 중앙정부가 위치한 수도를 둘러싼 지역의 수장이라는 것 때문에 다른 도와는 다른 업무적 특징이 있다. 경기도에는 왕경이 위치했기 때문에 지방 토착세력의 발호가 적었고 왕실의 능묘와 고관대작들의 분묘가 많았다. 그리고 역대 왕릉과 강무장(講武場), 사냥처가 있어서 국왕의 행차와 각종 사명을 띤 중앙관인들의 출입이 잦았다. 이에 따라 경기관찰사는 타도의 관찰사보다 왕의 능행에 수행하는 경우가 빈번했고 왕실과 중앙정부에서 필요로 하는 물품이나 노동력을 조달하는데 공을 들여야 했다. 또한 중국 사신의 접대 및 비용 조달, 도성 수축, 왕릉 축조, 선공감 영성 비용 납부, 사복시 어용마 납부, 생곡초(生穀草)와 땔나무 납부, 빙고 수리 등의 요역을 수시로 부담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 기영장계등록. 심이지가 경기관찰사에 재직하고 있을 당시인 1787년 6월부터 1784년 6월까지 경기 감영에서 승정원에 보고한 경기도의 현황보고서다.

경기감영, 궁궐 인근에 위치

경기감영은 경기관찰사가 머무르며 집무를 관장하는 장소이자 도의 정치와 행정을 집행하는 중심지였다. 경기감영은 태종 3년(1403년) 처음 수원에 뒀다가, 광주로 옮겨진 뒤 이후 서울 서대문 밖에 위치하게 됐다. 광해군 10년(1618년) 영평과 포천을 합쳐 대도호부로 승격시키면서 감영을 이곳에 개설했으나, 다시 서대문 밖으로 돌아왔다. 1896년 지방제도 개정으로 수원으로 옮겨질 때까지 서대문 밖에 있었으며 1910년 경기도가 경성부로 편입되면서 광화문 앞에 경기도청이 자리 잡았다. 그리고 1967년 수원으로 옮겨진 뒤 오늘날까지 이어오고 있다.

감기감영도 다른 도의 감영과는 다른 특수성을 갖는다. 강원도, 경상도 등의 감영은 도별 중심지에 위치했으나 조선 후기 경기감영은 한성부내에 있었다. 경기감영의 위치는 관찰사의 일상에 크게 영향을 미치는데 도성에 위치한 감영에서 경기관찰사는 국왕이 부르는 즉시 입궐해 국왕을 소견했고 반대로 국왕이 다른 곳으로 행행할 때 경기감영에 들르는 경우도 있어, 경기관찰사는 국왕과의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야 했다. 실례로 영조가 1756(영조 32년)에 경기감영에 거둥해 선화당에 들어 외읍(外邑) 백성들을 만났으며 굶주린 백성들을 진휼하기도 했고 군례를 행하기도 하는 등 경기감영에 국왕이 직접 거둥한 경우는 정조 대에도 수차례 확인된다. 이러한 상황은 경기감영이 왕기(王畿)였음을 의미를 확인시켜주는 대목으로, 경기도가 지방행정조직의 역할뿐 아니라 국왕과 수도를 보좌하는 역할을 했음을 보여주는 예라 하겠다. 이처럼 경기도관찰사는 국왕을 수시로 친견하는 어렵고도 막강한 자리였다.

한편 서대문 밖 경기감영에는 한성부가 1908년 9월까지 이곳에 머물렀으며 이후로 경기감옥분감, 고양군청, 서대문경찰서, 일본적십자사 조선본부 진료소가 잇달아 들어섰다. 지금은 그 터에 서울적십자병원이 있다.

감영의 관원은 관찰사의 지방행정을 보좌하기 위해 수령관으로 경력(經歷, 종4품) 또는 도사(都事, 종5품), 보좌관으로 심약(審藥), 검률(檢律, 종9품) 등을 뒀다. 도사는 관찰사의 사무적인 일을 직접 보좌하고 아감사(亞監司)라 해 관찰사 유고시 직무를 대행했으며 관찰사가 순력할 때에는 소관 지역을 나눠 순찰했다. 감영에는 행정실무를 담당하는 영리와 잡역과 심부름을 담당하는 영노비가 있었다. 경기감영은 경기도내의 각종 공사 집행의 중심지로서 진상봉상(進上封上), 감시, 도내 각종 공부(公簿)의 보관서, 문서를 수발하는 역할을 했다.



새천년의 유산·경기감영 복원

현재 경기도내에는 예전의 경기감영의 모습을 알 수 있는 유적은 남아있지 않다. 하지만 리움미술관 소장의 ‘경기감영도(京畿監營圖)’ 기록화와 구한말 촬영된 사진, 수선전도(首善全圖) 등 지도에 나타난 위치로 그 모습의 대강을 살필 수 있으며 광화문 앞에 있던 경기도청은 허물어지고 없으나 모형으로 남아 경기도의회 로비에 전시돼 있다. 사실적으로 묘사된 ‘경기감영도’는 서대문 밖에 있었던 감영을 그린 기록화로 감영은 물론 그 주변 지역까지도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는데, 요즈음과 마찬가지로 관공서 주변에는 항상 많은 사람들이 운집했고 그들의 편의를 위해 약국과 쌀가게, 신발가게 등 여러 상점들이 상가를 형성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2018년은 경기천년이 되는 해이다. 그런데 경기도에는 경기도를 대표할 수 있는 문화유산이 없다. 원주에는 강원감영이, 대구에는 경상감영이 남아있어 역사 현장으로서 또는 체험학습의 장으로 활용하고 있는 것으로 볼 때, 경기감영은 그 위치조차 파악이 되지 않고 있다. 곧 경기도청이 광교신도시로 이전할 계획이라 하니 현재의 도청부지인 팔달산 아래에 경기감영을 복원 한다면 새천년의 새로운 문화유산으로서 그 의미는 더욱 공고해 질 것이고 도민에게는 경기도의 특수성과 우수성을 알릴 수 있는 교육의 장으로 활용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경기천년을 맞이해 일회성 행사에 그치지 말고 새로운 천년의 시작이 되는 시금석으로 경기감영의 복원을 제안한다.

장덕호 실학박물관장













저작권자 © 중부일보 - 경기·인천의 든든한 친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