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안성 양성면 덕봉 마을은 해주 오씨 집성촌이다. 이곳에는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75호인 정무공 오정방 고택이 있다. 이 집은 조선 중종 10년(1515)에 처음 건립돼 병마절도사 오정방(1552∼1625), 좌찬성 오사겸(1573∼1627), 경상도관찰사 오숙(1592∼1634) 4형제, 영의정 오두인(1624∼1689) 등 명현들을 배출한 유서 깊은 집이다. 당초에는 이곳에서 100m 가량 떨어진 252번지에 있었는데 효종 1년(1650)에 현재 위치(246번지)로 이전했다.

해주 오씨가 덕봉마을에 정착하게 된 데는 사연이 있다. 오정방의 증조인 오현경과 조부인 오경운이 역모사건에 연루돼 각각 경상도 안음(함양군 안의면)과 산음(산청) 땅으로 귀양을 갔다. 그런데 중종 20년(1525) 전염병이 창궐해 12월17일 아버지 오현경이 사망하고 3일 후에는 아들 오경운이 사망했다. 비보를 전해들은 가족들은 당장 달려가고자 하였으나 통행이 차단된 상태였다. 이듬해 봄이 되자 오경운의 부인인 풍산 심씨는 남편과 시아버지의 시신을 수습하러 길을 떠났다.

천신만고 끝에 유골을 찾은 부인은 시아버지는 등에 지고 남편은 머리에 이고 경상도에서부터 돌아오는 길에 나섰다. 먼 길에 몸이 고단한데도 지극한 정성으로 유골을 돌보았다. 마침 동행길에 만났던 스님이 부인의 정성에 감복해 부인의 고향인 양촌에 두 명당자리를 잡아 주었다. 천덕산 아래 축좌(丑坐)에는 시아버지를 모시도록 했고, 한 고개 너머 고성산 아래 건좌(乾坐)에는 남편을 모시게 했다. 그리고 살 집터도 잡아주었다.

그 뒤로 발복이 시작되었다. 장남 오수천은 충무위 부원군으로 호조판서에 추증되고, 차남 오수억은 무과에 급제해 어모장군이 되고 병조판서를 추증 받았다. 손자 오정방은 무과에 장원급제해 경상좌도병마절도사를 역임하고 사후에는 병조판서에 추증돼 ‘정무’라는 시호를 받았다. 이 때문에 덕봉리 해주 오씨를 정무공파라고 부른다. 오정방의 아들 오사겸은 종친부 전부를 지냈고 세종대왕 6대 손녀와 혼인했다. 축실 소생인 오사눌은 무과에 급제했다.

오사겸의 아들 4형제 중 3명이 문과에 급제하여 해주 오씨 가문을 크게 빛냈다. 장남 오숙(吳䎘)은 관찰사로 좌찬성을 추증받고, 오빈(吳䎙)도 진주목사로 지충추부사로 숙헌이라는 시호를 받았고, 4남 오핵(吳翮)은 사헌부 지평으로 홍문관 응교를 추증 받았다. 3남 오상(吳翔)은 어려서부터 신동이라 불리었으며 사복시 주부에 천거되어 이조판서를 추증 받았다. 오상의 아들 오두인은 문과에 장원급제해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그의 아들 오태주는 현종의 셋째 딸인 명인공주와 혼인하여 해창위에 봉해졌다. 

지난 400년간 덕봉마을에서 문과급제 20명, 무과급제 117명, 시호를 받은 사람 9명, 공신이 1명, 음직으로 벼슬에 나간 사람 148명을 배출했다. 또한 성리학자로 오희상과 오진영을 배출했다. 해방 이후에도 이 마을 출신으로 오성환과 오재영 국회의원 2명을 배출했는데 오재영은 5대와 6대 대통령선거에 입후보하기도 했다. 이 밖에도 수많은 인물이 배출돼 각 분야에서 활약하고 있다.


이처럼 한 마을에서 많은 인물이 배출된 것은 덕봉리 산세와 무관하지 않다. 덕봉마을의 주산은 고봉산(298m)이다. 한남정맥 쌍령산(502m)에서 갈라져 나온 산줄기로 검은산과 신설봉, 천덕산을 거쳐 기봉하였다. 마을에서 보면 산정상의 모양이 평평하다. 이러한 산을 풍수에서는 한자의 일자처럼 생겼다하여 일자문성(一字文星)이라고 한다. 문성이라고 하는 이유는 이러한 산세에서 글 잘하는 사람이 많이 나오기 때문이다. 일자문성을 정승사라고도 한다. 정승을 비롯한 고관대작을 많이 배출한다는 의미다.

덕봉마을은 지기가 모인 혈에 자리 잡은 집들이 많다. 이중 일반인들에게 개방된 곳은 오정방 고택과 덕봉서원이다. 이들 두 곳의 현무봉은 바리봉(190m)이다. 덕봉서원 바로 뒤에 있는 산이다. 마치 장군의 투구 모양이다. 이를 무성사라고 한다. 반면에 앞에 보이는 안산은 붓끝처럼 뾰족하게 생긴 문필봉이다. 덕봉마을에서 문과와 무과 급제자가 많이 나온 이유라 할 수 있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안산이 석산 개발로 반쯤 깎여서 보기 흉하다.

오정방 고택에서 앞을 보면 일자문성과 귀인봉이 나란히 서있다. 하나만 있어도 좋은데 두 개가 나란히 있으니 금상첨화다. 덕봉마을의 산세와 배출된 인물을 비교해보면 ‘산관인물(山管人物)’, 즉 산은 인물을 관장한다는 풍수 논리가 타당하다고 느낀다. 큰 인물을 배출하려면 난개발을 막고 산을 잘 보존해야 하는 이유다.

형산 정경연 인하대학교 정책대학원 초빙교수

저작권자 © 중부일보 - 경기·인천의 든든한 친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