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만 몇 십만 원이 없어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들을 보면 정말 ‘조금만 더 참지’하는 안타까움으로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인간의 본성이 대체 무엇인지 의심을 갖게 하는 범죄자들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안타까운 사연들을 지닌 소시민들이다. 심지어 겨우 삼 개월 된 아이를 학대하여 사망에 이르게 한 철없는 부모도 그 나름대로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이 있었다.

하지만 최씨 일가가 보인 후안무치한 행각을 보면 지금까지 만나왔던 범죄자들의 자기중심적 변명이 오히려 그럴싸하게까지 느껴진다. 최씨와 그 주변인들이 보이는 뻔뻔함은 지금까지 필자가 만나본 그 어떤 범죄자들보다 문제의식이 더 심하게 결핍되어 있는 것 같다.

국민들은 수없이 많은 종류의 세금을 낸다. 여기에 공과금과 벌금까지를 더 하면 정부가 거둬가는 돈이 만만치 않다. 허리가 꺾어지도록 종일 일해서 벌어들인 소득 중 꽤 많은 액수가 나도 모르는 사이 세금으로 새나가고 있는 것이다.

토막살인범 오원춘이 야근을 마치고 귀가하는 여성을 납치하여 자신의 집으로 끌고 가 성폭행을 하려는 순간 피해자는 112에 구조를 요청하였다. 절체절명의 순간에 국민은 국가기관에 절대적 신뢰를 가지고 도움을 청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의 세금으로 녹을 먹는 경찰들은 그녀의 목숨을 구하지 못하였다. 세월호 사건 역시 맥을 같이 한다. 매달 국가에 꼬박꼬박 세금을 내고 있었던 304명의 부모들은, 마지막 순간 해경이든 해군이든 내 자식을 팽개쳐 놓지 않을 것이라 믿었을 것이다. 왜냐면 단 한 번도 납세의 의무를 저버린 적이 없었으므로 나의 안전이든 내 자식의 안전이든 어떻게 해서든 국가가 나서서 지켜줄 줄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기대는 처참히 무너져 내렸다.

물론 경찰이 모든 범죄를 다 예방할 수 없듯이 천재지변에 가까운 일을 정부인들 되돌리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그런 연유로 수많은 국민들은 현실에 순응하면서 인내심을 가지고 꾹꾹 참아온 것이다. 국민들을 진정으로 구하려 애썼을 것이라는 그들의 의도 자체를 의심하지는 않았으므로...

국민들의 이런 너그러움과 관대함이 이제는 한계에 다다른 듯하다. 제아무리 전지전능한 인간이라 하더라고 사람이라면 어쩔 수 없는 일들이 있다. 하지만 최씨와 그 주변인들이 벌인 국정논단은 그야말로 명백한 의지를 가진 의식적인 선택이었다. 최고의 엘리트들과 내노라하는 갑부들이 짜고 벌인 부패한 결탁은 그야말로 기껏 하루벌이 중 세금을 제하고 팍팍하게 살아야 하는 보통사람들의 심기를 심각하게 건드렸다.

김영란법의 통과로 이제는 선생님께 오천원짜리 냉커피도 한 잔 전할 수 없게 되었다. 보통사람들에게는 이렇게도 엄격한 도덕성을 요구하면서 국민이 낸 세금은 마치 용돈 주무르듯 할 수 있는 것인가? 티비를 켤 때마다 국가 예산 중 수백억이 혹은 수십억이 어디론가 증발했다는 소식은 대다수의 국민들을 그야말로 멘붕상태에 빠뜨린다. 그것이 모두 내 월급통장에서 원천징수 된 돈이라고 생각하면 울화가 치민다.

필자는 최근 치매가 걸리신 부모님과 아이들 뒷바라지로 일주일에 몇 번씩 오시던 도우미 아주머니도 끊었다. 남편 역시 사회생활에 꼭 필요한 용돈 씀씀이도 대폭 줄였다. 우리가 이렇게 해야만 세금을 내고 나머지 수입으로 연로하신 부모님을 시설로 보내지 않고 직접 돌봐드릴 수 있기 때문이다. 참고로 필자 부부는 그야말로 중산층이다. 하지만 우리보다 훨씬 팍팍하게 사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이렇게 허리띠를 졸라매고 낸 피 같은 세금을 귀한 줄 모르고 흥청망청 쓴 최씨 일당을 보면서 느끼는 우리의 심정은 단순한 분노감이 아니다. 그것보다는 훨씬 더 복잡한 그 무엇, 씁쓸하기도 하면서 나의 존재가치가 무의미해지는, 매일 열심히 임했던 일상에도 무기력해지는 설명하기 힘든 심정. 세월호 때 온국민이 외상후스트레스장애에 빠져 일손을 놓았었다면 작금에는 모두 집단무기력증에 빠져 그야말로 어이없는 얼굴들을 하고 멍청하게 앉아있다.

누가 어떻게 책임을 질 것인가? 사태의 심각성을 절감해야 할 것이다. 납세거부운동이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은 순전히 우리네 선량한 국민들이 그래도 국가라는 것에 순한 기대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야가 따로 없고 보수와 진보가 따로 없다. 위기의 낭떠러지로 굴러 떨어진 보통사람들의 마음을 회복시키기 위해서는 진정으로 헌신적인 모습을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진상을 낱낱이 밝히고 뒤틀렸던 것을 제자리로 돌려놓아라. 그러지 않고서는 이 무기력증이 무서운 분노가 되어 온 나라를 다시 한 번 더 큰 위기로 몰아넣을 것이다.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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