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인가부터 차가 막힌다. 출근길도, 마트 가는 길도 막힌다. 그러고 보니 여기 저기 도로공사 하는 곳이 많아졌다. 그 덕에 늘 가던 장소에 평소보다 3배나 많은 시간이 걸려 도착했다. 문득 달력을 보니 어느 틈에 11월이다. 아, 연말! 세상을 모르던 시절엔, 왜 날도 추운 겨울철에, 약속이나 한 듯 여기저기서 도로공사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럴 만큼 도로상에 다급한 문제가 생긴 줄 알았다. 거기에 담긴 불편한 진실을 알고 났을 땐 씁쓸한 마음이었고, 해마다 되풀이되는 모습을 바라볼 때는 달라지지 않는 현실이 개탄스럽기도 하다.

이렇게, 저물어가는 한 해를 도로공사로부터 인식하게 되었다. 막히는 차 안에서 켠 라디오에서는 시청자들로부터 ‘내 인생의 보물’이란 사연을 받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것을 들으며 자연스레 ‘나의 보물’을 떠 올렸다. 선택에 망설이는 나이지만, 이것만은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선택할 수 있다.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 어머니께서 털실로 짜서 만들어주신 인형이다. 40년이 훌쩍 넘는 세월을 함께 한 나의 친구이자 분신이며, 동시에 어머니의 분신 같은 보물로 지금도 내 연구실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인형을 보는 사람들은 세 번 놀란다. 그것을 지금까지 지니고 있다는 데서 한 번 놀라고, 그 상태가 깨끗하여 놀라고, 지금 팬시점에서 사왔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훌륭한 인형의 모습에 또 놀다. 인형이 예쁜 것이야 어머니의 솜씨가 좋은 탓이고, 지금껏 새 것 같은 모습을 유지하는 것은, 처음부터도 잘 간직해 왔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풍족하지 않던 그 시절에 어머니께서 인형을 만들어 주셨다. 정성들인 과정을 봤기에, 어린 나이지만 어머니께서 그것을 또 다시 만드실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 인형을 오래도록 간직해야겠단 생각을 했다. 내가 어른이 되고 어머니만큼 나이를 먹게 되었을 때, 혹은 어머니가 내 곁을 떠나 더 이상 함께 할 없을 때, 그 인형이 나와 함께 있다면 외롭지 않겠단 생각을 했다. 늘 어머니와 함께 한다고 생각할 수 있어서 삶이 좀 더 풍요로우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그때부터 지금까지 죽 곁에 두며 아끼고 손질을 했다. 덕분에 지금도 새 인형처럼 깨끗한 모습을 간직할 수 있었다.

이런 얘기를 하면 사람들은 종종, 어떻게 어린 아이가 그런 생각을 했냐며 묻곤 한다. 그건 막내인 탓에 어릴 때부터도 연로하신 부모님에 대한 안타까움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가치’를 중요하게 여겼던 때문이리라. 방송의 사연들도 나와 다르지 않았다. 추억이 담긴 물건, 되찾은 건강, 소중한 가족 등등. 대부분 그런 것을 ‘인생의 보물’로 꼽았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물어도 대답은 비슷할 것이다.

우리가 살아온 과정은 각기 다르겠지만, 또 한 편으로 비슷한 성장과정을 가져왔다. 전래동화를 읽으며 권선징악을 배우고, 나라 위해 목숨을 바친 독립투사들의 위인전을 읽으며 의협심을 배우고, 조지 워싱턴의 벚나무 이야기를 읽으며 정직함을 배워왔다. 시기에 따라 필독도서 같은 책을 읽으며 때론 모험심을, 때론 낭만을 꿈꾸며 그렇게 차곡차곡 하루하루 살아가며 미래를 키웠고, 그렇게 성인이 되었다. 각자의 모습은 다르지만 대부분의 우리는, 우리를 뒤따르는 젊은 세대에게 바르게 살라고, 성실하게 살라고, 노력의 대가는 반드시 있다고 말한다.

2016년 11월 지금. 연일 보도되는 충격적인 이야기들로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지경이다. 세상의 많은 비리와 부정을 보면서, 그래도 나아질 거라며 고집스럽게 지키고 싶은 삶의 가치가 무너져 내리는 느낌이다. 대학 입시를 앞둔 많은 학생들은 며칠 남지 않은 수능시험을 위해 막바지 힘을 다 할 것이며, 그렇게 대학에 온 학생들은 수업과 아르바이트와 취업 준비로 매일 매일을 숨 가쁘게 보낸다. 학점과 취업 스트레스가 신체의 병이 되어 고통을 호소하기도 한다. 그런 학생들에게, 내가 살아왔던 삶의 방식을 자신 있게 주장할 수 있을지 혼란스럽다. 주장은커녕, 혹시라도 좌절하고 상처 받게 되지 않을까 염려될 정도다.

정신이 혼란스러워 생각이 모아지지 않는다. 그러니 글도 오락가락이다. 그나마 곱게 물든 단풍 덕분에 마음을 추스른다. 세상 역시 단풍 같은 사람들이 있어서 유지된다는 생각을 해 본다.

김상진 한양대학교 교수·한국시조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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