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외환위기(IMF) 때 경제부 기자였다. 금융 파트를 맡아 지금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 경기은행을 포함해 제1·2금융권이 주요 출입처였다. 그래서 경기은행 퇴출 과정과 대마불사(大馬不死) 신화가 깨지는 것을 생생하게 지켜보고 기록했다. 당시 취재수첩에는 지역에 연고를 둔 태화건설, 삼용종합건설, 영남건설을 포함한 중견 건설업체와 중소제조업체가 연쇄부도를 당해 문을 닫았다고 기록돼 있다. 지역에 연고를 둔 은행이 망했으니 중소업체의 사정은 오죽했겠는가. 은행 창구에서 울부짖던 시민들이 눈에 선하다. 비정한 돈의 속성도 지켜봤다. 현금 대신 받은 어음은 하루아침에 종잇조각이 되고,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은 노숙자가 됐다. 목숨을 끊는 사람도 급증했다. 가족이 해체되고 사회 시스템이 붕괴됐다. 취재 현장에서 지켜본 상황은 처절하고 처참했다.

오래된 취재수첩을 꺼내고, 가슴 아픈 기억을 재생시킨 것은 요즘 상황이 심상치 않고, 외환위기 당시와 너무 닮아 걱정이 앞서기 때문이다. 김영삼 대통령 때였다. ‘소통령’으로 통하던 차남 현철씨가 국정농단으로 구속되면서 김 대통령은 식물대통령이 되고 대통령 지지도는 6%로 급락했다.

비선이던 최순실 일당이 국정농단으로 구속되고 박근혜 대통령이 두 차례의 사과에도 지지도가 5%에 머물고 식물대통령이 된 것과 똑같다. 다른 것은 현철씨는 김영삼 대통령 몰래한 짓이었지만, 최순실 일당은 박근혜 대통령을 등에 업고, 공모한 차이가 있을 뿐이다. ‘김현철 게이트’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만큼의 차이다.

당시도 대선을 앞둔 국회는 유·불리를 따지다 구조개혁 입법을 주저했다. 조선·해운 구조조정이 시급한데 정치권은 ‘표’ 계산만 하고 있는 요즘 상황과 같다. 지금 그 데자뷰가 어른거린다.

우리 경제 여건은 외환위기 때보다 안 좋다.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더 큰 불확실성에 맞닥뜨리게 됐다. 트럼프는 후보시절 보호무역주의 강화와 미국 우선의 경제정책을 강조하면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재협상 등을 공약했다. 우리 경제를 떠받치고 있는 수출 타격 등 대외위험에 처할 가능성이 커졌다.

내수는 더 비관적이다. 정부가 지난 8일 발표한 최근 동향을 보면 9월 소매판매, 설비투자, 건설투자가 모두 전달 대비 감소세로 돌아선 데다 취업자 증가폭도 30만 명으로 떨어졌다. 수출은 10월에도 마이너스 행진을 계속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가계·기업 경제심리 회복이 늦춰질 것이라고 우려하는 전문가가 많다. 더구나 최순실 일당에 돈을 갖다 바친 대기업들이 검찰 수사를 받게 되면서 기업들의 투자심리는 얼어붙었다. 당장 내년도 계획 짜기는 올스톱 되고, 총수 소환에 대비하느라 눈치만 보고 있다는 게 지인들의 전언이다.

이처럼 경제 상황이 급박한데도 이 난제를 헤쳐 나갈 경제 사령탑이 분명하지 않다. 없다고 하는 게 맞다. 현 유일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장관은 그만두라는 통보를 받았다. 트럼프 당선 후 유일호 경제부총리가 경제현안 점검회의를 열고 불안에 빠진 경제 주체들을 안심시키는 활동에 나섰지만 경질이 확정된 유 부총리가 지도력과 추진력을 발휘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후임으로 내정된 임종룡 금융위원장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여파로 앞에 나설 수 없는 어정쩡한 상황이다.

경제가 무너지는데 지켜 볼 수만은 없다. 혹자는 경제위기론을 두고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물 타기 하기 위한 꼼수라고 불편한 시선을 보낼지 모르겠지만 현실은 현실이다. 실질적인 대책이 필요하다. 경제 컨트롤타워 역할을 할 경제부총리 임명 절차부터 먼저 밟아가자. 여야가 합의해 능력 있는 후보자를 조속히 고르고 청문절차를 진행하자.

정부와 정치권에 투 트랩을 제안한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는 철저히 따지고 수사해 벌을 받게 하는 게 당연하다. 헌법과 법률을 유린했다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책임지고 처벌 받아야 한다. 이와는 별개로 경제 컨트롤타워는 빨리 구축하도록 해야 한다. 지금 상황에서는 분초를 다툴 만큼 급하다. 이미 지명된 임종룡도 좋고, 새 후보자도 괜찮다.

박근혜 정부를 탄핵하고 대통령 하야를 촉구하는 수십만개의 촛불 속에서 또 다른 촛불을 생각했다. ‘경제 촛불’이다. 폭풍우와 태풍이 촛불 앞으로 몰려오고 있다. 지켜내야 한다. 우리는 외환위기 때 돈을 가진 사람은 돈 장사로 큰돈을 벌었지만, 돈 없는 서민들은 더 궁핍해진 것을 목도했다. ‘경제식민지’를 뼈저리게 경험했다. 촛불이 꺼지면 외환위기처럼 돈 없고 빽 없는 서민들만 죽어 나간다. 또 다른 경제살리기 촛불을 켜자. 주말 촛불 속에서 느낀 소회와 바람이다.

김광범 기획이사

저작권자 © 중부일보 - 경기·인천의 든든한 친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