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국민들에게 2016년 가을은 어쩌면 가장 견디기 힘든 시기로 기억될 듯 싶다. 수치심의 정도로만 보면 1910년 경술국치에 비교조차 되지 않겠지만, 10대 무역강국이고 21세기 최첨단 디지털시대를 선도하고 있다고 나름 자부심을 갖고 있던 이 시대 국민들 입장에서 보면 그 충격은 더 클지도 모르겠다.

그 이유는 지난 반세기 고속 경제성장과 민주화를 거치면서 우리사회에서 이미 사라졌다고 생각해왔던 봉건적 잔재들의 민낯이 그대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여전히 적지 않은 국민들에게 대통령을 뽑는다는 것이 국왕을 선출하는 것처럼 여겨지고 있고, 대통령의 일거수일투족이 알게 모르게 마치 왕조시대 임금님 행실처럼 묘사되곤 했던 게 사실이다. 이번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이 터지고 보니 이런 것들이 국가통치자에 대한 예의나 존경의 의미가 아니라 국민들은 물론이고 대통령 마음속에 잠재되어 있던 봉건 의식이었던 것이다.

여기에 도저히 믿기지 않는 무슨 무당이니 굿이니 하는 전근대적 샤머니즘 요소들까지 가미되면서 그야말로 그 동안 우리가 낡은 봉건적 의식 위에 근대화와 민주화라는 허구의 탑을 쌓아 왔던 것이 아닌가 자학해보기도 한다. 오방낭이나 오색끈을 한민족의 전통이나 문화라는 그럴듯한 용어로 치부하기에는 작금의 실태가 너무나 충격적이다.

이런 우리 사회의 봉건적 민낯은 절대 권력자의 전횡이나 부패 그리고 엽기적 행태들에 그치지 않는다. 더 수치스러운 것은 50년 넘게 성장을 멈추었던 ‘양철북 공주님’의 행태가 아니라 그 밑에서 호가호위했던 추종세력들이라는 것이다. 이미 박근혜 대통령 집권이후 이른바 친박 아니 박빠(?)들이 보여준 사교집단 같은 맹목적인 충성심과 파행적 정치행태들은 많은 지탄과 조롱의 대상이 되어왔다. 그런데 최근 집권 여당 아니 보수진영 전체가 붕괴될 절박한 상황에서도 이들이 보여주고 있는 ‘잘 받아 적어서 살아남았던 적자생존’의 몸부림은 처절하다 못해 구역질이 날 정도다.

솔직히 박근혜 대통령과 최순실 일당의 불법을 넘어선 파행적 행태들에 대해 정작 분개해야 할 사람들은 야당이나 진보세력이 아니라 절차적 합리성을 중시여기는 보수 세력이어야 한다. 야당이나 진보진영을 굳이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더라도 보수정권에 대해 비판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때문에 진정한 보수이념을 추구하는 정치인 혹은 정파라면 낯 뜨거워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어야 정상일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이들의 모습은 태연하다 못해 마치 무슨 구국충신처럼 같다. 실제 ‘대통령을 보호해드려야 한다’는 봉건적 냄새가 풀풀나는 미명아래 만행에 가까운 대통령과 최순실의 작태들을 변호하는 것을 넘어 대다수 국민들의 성난 목소리까지 거침없이 폄훼하고 있다. 이들이 과연 진정한 보수 정치세력이었는가 심히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내 눈에는 이들은 단지 절대군주 같았던 아니 그들에게는 절대군주인 여왕님 아래 호가호위하며 누려왔던 기득권을 놓치지 싫은 아니 놓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수구잔당들로 보일 뿐이다.

그동안 우리 국민들은 한번도 ‘을’이 되어 본 적이 없는 아니 그럴 수 없었던 이런 저런 봉건적 세습을 통해 정치·경제적 권력을 누려왔던 세력들이 내걸었던 말로만의 보수이념이나 위장 간판에 속아왔던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그들의 권력 토대가 되어왔던 지역감정, 특정 세대의 맹목적 충성심 그리고 혈연, 학연 같은 준봉적 요소들을 마치 보수 혹은 자유주의 정치이념이라고 착각하고 살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때문에 작금의 파행적 국기문란 아니 국가파산 상태에서 더욱 처절한 반성을 해야 하는 집단은 그동안 보수 정파라고 했던 군상들이다. 자기들이 맹신하는 대통령에게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났고, 또 무엇이 잘못되었는가에 대한 심도있는 반성과 성찰이 필요하다. 하지만 거리로 나온 수많은 국민들의 외침을, 아니 거리에 나오지 않은 비판의 목소리들은 더 많고 클지도 모른다. 일부 불순세력들의 조직적 난동이라고 애써 호도하고, 대통령 주위에서 벌어진 파행적 권력남용에 대한 언론보도들을 좌파언론들의 반국가적 행위로 매도하는 봉건적 수구집단들을 보고 있으면 대한민국에 과연 진정한 보수 이념과 정파가 있는가 하는 근본적 의심을 갖게 만든다.

어쩌면 한반도에 보수/자유주의 이념이나 가치의 진정한 의미를 심각하게 성찰하고 체화한 탈봉건적 보수정파가 만들어지려면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릴지 모르겠다는 암울한 생각까지 든다. 물론 이것은 이번 사태로 앉아서 반사이익을 누리고 있는 야당이나 이른바 진보정치세력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될지도 모른다.

황근 선문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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