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에는 원인재(源仁齋)가 있다. 인천 이씨의 근원지라는 뜻이지만 오늘날 인천(仁川)이라는 지명이 비롯된 곳이기도 하다. 인천의 이름은 여러 차례 바뀌었다. 본래는 미추홀이었다. 백제 시조 온조의 어머니 소서노와 형인 비류가 처음 정착해 명명한 이름이다. 이후 고구려 장수왕이 남하해 매소홀현이라 했고 신라가 통일한 후에는 소성현이 됐다. 고려 숙종은 어머니 인예태후의 출신지로 경사의 근원지라 해서 경원군으로 개칭했다. 인종은 어머니 순덕왕후의 어진 성격을 높이 받들어 인주(仁州)로 바뀌었다.

인천은 왕비와 임금의 고향이란 뜻의 어향(御鄕)으로 불렸다. 고려 제11대 문종(1046~1083)에서 제17대 인종(1122~1146)까지 7대에 이르는 동안 인주 이씨 집안에서 10명의 왕비와 외손으로 8명의 왕(덕종, 정종, 문종, 순종, 선종, 헌종, 숙종, 인종)을 배출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서 인주 이씨는 80년간 외척으로서 최대의 문벌귀족이 됐다. 풍수가들은 인주 이씨가 크게 세력을 떨치게 된 것은 시조인 이허겸 묘의 발복 때문이라고 말한다.

묘가 있는 자리는 본래 간치도(看雉島)라고 불렸던 작은 섬이었다. 밀물 때는 섬이었다가 썰물 때는 육지로 연결되는 곳이었다. 풍수에서는 산맥이 물을 건너간다 해 도수맥(渡水脈)이라고 한다. 맥이 바다를 건넌다는 것은 그만큼 기세가 강하다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곳에 대혈을 맺는 법으로 인주 이씨의 80년 세도와 무관하지 않다고 하겠다.

이곳의 주산은 문학산(217m)이다. 여기서 내려온 맥 하나가 연수동 인천여고 교정을 지나 대학공원 봉우리를 만들었다. 그리고 솔밭공원을 거쳐 평지로 내려와 바다로 이어졌다. 지금은 간척으로 주변이 모두 육지화 됐지만 자세히 살피면 맥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앞에는 승기천이 있는데 옛날에는 바닷물이 들고나는 갯고랑이었다. 갯골의 대부분은 육지 하천의 연장선에 있기 때문에 바다에서도 물길로 본다. 그러므로 이허겸의 묘는 문학산의 맥과 승기천의 물이 만나는 전형적인 배산임수 지형에 위치하고 있다.

옛날부터 이곳은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 또는 영구입수형(靈龜入水形) 명당으로 불려왔다. 연화부수형은 땅의 모습이 마치 물 위에 떠있는 연꽃과 같다해 붙여진 이름이다. 연은 진흙 속에서 자라면서도 청결하고 고귀한 꽃을 피운다. 영구입수형은 신령스러운 거북이가 바다로 들어가는 모습이라 붙여진 이름이다. 이때 혈은 거북 등에 있는데 이허겸 묘가 그 곳에 위치한다. 거북은 무병장수를 상징하는 상서로운 동물로 여겨왔다. 묘의 비석에 귀부를 받치는 이유다.

인천 이씨는 본래 김해 허씨(金海許氏)였다.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로 가야국 김수로왕의 왕비가 된 허황후의 후손들이 모계의 성을 따라 허씨가 됐다. 신라 경덕왕 때 아찬 벼슬을 지낸 허기(許奇)가 사신으로 당나라에 갔다. 그때 안록산의 난이 일어나 당 현종이 피난하자 이를 호위했다. 난이 평정되자 당 현종은 허기에게 황제의 성인 이씨 성과 소성백을 하사했다. 이후 8대까지 이씨와 허씨 복성을 사용했다. 예컨대 이허겸(李許謙)하면 이와 허는 성이고 겸은 이름이다. 이허겸 이후부터 이씨 단성을 사용했으므로 인천 이씨들은 그를 1세조로 하고 있다.

이허겸은 상서를 지냈고, 2세 이한은 상서우복야로 이자연과 이자상 두 아들을 뒀다. 이자연은 문과에 급제해 평장사에 올랐고 딸 셋은 모두 문종의 왕비(인예태후, 인경현비, 인절현비)가 됐다. 인예태후의 아들들이 제12대 순종, 제13대 선종, 그리고 천태종을 창시한 대각국사 의천이다. 이자상은 벼슬이 정2품인 상서우복야로 그의 아들 이예는 정당문학이며 손자 이오는 평장사를 지냈다. 파한집으로 유명한 이인로는 고손이다.

이자겸은 이자연의 손자로 큰딸은 예종비, 둘째와 셋째 딸은 인종비로 들여보냈다. 이들 사이는 친자매이면서 동시에 시어머니와 며느리 관계가 됐다. 이자겸은 왕의 장인이라는 신분을 가지고 방자와 탐학으로 국정을 전횡했다. 왕을 위협하고 심지어 ‘십팔자참(十八子讖)’ 즉 이씨가 왕이 된다는 예언을 믿고 왕위를 탐내기도 했다. 그는 반란을 일으켜 왕을 독살하려다 실패해 숙청당하고 만다. 이후 가운이 기울게 되며 인주도 인천으로 강등됐다.

아무리 천하명당이라 할지라도 사람이 공덕을 쌓아야 그 발복이 오래간다. 선대가 쌓아온 공을 그 후손이 망치는 경우가 많다. 오늘날 국정농단 사태도 마찬가지여서 안타깝다.

형산 정경연 인하대학교 정책대학원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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