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오스트레일리아의 어느 칼럼니스트가 22달러짜리 브런치를 즐기는 젊은이들에게 그 돈을 모아 집을 살 생각을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글을 써서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미래를 준비할 계획도 노력도 하지 않고 당장 눈앞의 소비만 좇는 젊은 세대의 행태를 꼬집은 것이었다. 당장 반박이 쏟아졌다. 집을 살 수 있을 가망이 있다면 계획도 노력도 할 것이겠지만, 고급 브런치를 먹는다는 것은 어차피 그럴 수 없는 현실을 사는 젊은이들의 단면이라는 것이다.

세대 간 인식 차이는 우리나라가 더 심했으면 심했지 덜하지 않다. 기록적인 저출산이나 실업 문제에 대해서는 내남없이 걱정하면서도 일부 기성세대는 젊은이들에게 영 마뜩치 않은 시선을 보낸다. 기성세대의 눈에 요새 젊은이들은 공무원이나 대기업 일자리만을 바라보며 중소기업에는 급여가 적다고 눈길도 주지 않는 세대다.

그러나 젊은이들의 시각은 좀 다르다. 전문성도 영어 실력도 형편없으면서 단지 직장에 일찍 들어왔다는 이유만으로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는 상사에게 기본적인 경멸과 불신이 깔린다. 기성세대는 걸핏하면 경제성장과 민주화를 이뤄냈던 지난 이야기를 고장난 라디오처럼 들먹이며 자신의 기득권을 양보할 생각은 없다. 국가에 대한 존중과 사회 정의 등 거시적인 가치에 대해서는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으면서 정작 아랫사람에게 무례하며 개인의 사생활을 무시하고 조직의 부품이 되기를 강요한다. 그들이 그럴 수 있는 건 그들이 우월한 위치에 있기 때문일 뿐이다. 그저 갑질이란 이야기다. 이들에게 도전의식이 없다느니 ‘노오력’이 부족하다느니 하는 지적질이 귀에 들어올 것인가.

세대 간 상호 부정적 시선 어느 한편에 덜컥 동의하기 전에, 어느 세대이건 자신이 성장해온 사회적 환경의 특징을 되씹어볼 필요가 있다. 예컨대, 기성세대와 달리 오늘날 젊은이들은 태어날 때부터 돈만 있으면 무한대로 누릴 수 있는 상품과 서비스 속에서 성장했다. 과거 그 어느 때보다 다양한 즐거움을 소비할 줄 아는 21세기 도시 인류에게 부족한 것은 출세나 명예, 이념적 성취가 아니라 자신만의 시간 보장이다. 그것을 위해 안정적인 수입이 필요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4차 산업혁명은 실업을 구조화, 일반화 시킬 공산이 크다. 불성실하거나 무능해서 일자리가 없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계급이나 뛰어난 능력을 타고나지 않는 이상 평범한 대다수 사람들은 일자리를 얻기 힘든 세상이 다가오고 있다. 낡은 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우리 자신을 깨닫지 못하고 섣부른 대책을 쏟아내기 전에 진정한 정서적 공유와 겸허한 숙고가 필요한 이유가 여기 있다.

청년 문제에 대한 국가의 역할이 무엇이어야 할지 관심이 있다면, 먼저 기성세대의 제한된 경험으로부터 얻은 가치관과 잣대로 청년 세대의 현재와 미래의 삶을 재단하려는 관성부터 재고해야 한다. 예컨대, 국가가 앞장서서 미래의 먹거리를 청년들에게 만들어주어야 한다는 발상이 그런 것이다. 의도야 감읍할 만하지만 고답적인 국가주의 혐의가 짙다. 이런 방식은 과거에는 성공적이었을지 몰라도 앞으로도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경제 주체들이 자생력을 잃고 부패의 고리에 얽혀들기 십상이다. 기업의 먹거리는 기업이 찾아야 하고, 청년의 일자리는 청년이 스스로 고민하고 노력해서 찾는 것이 맞다. 그래야만 실효성이 있고, 실제로 그들에게는 충분한 잠재력이 있다.

국가가 해야 할 일은 뒤에서 그들을 보이지 않게 지원해주는 역할에 집중하는 것이다. 국가가 맡아야 할 기본적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면 그것이 곧 최선의 지원이다. 국민을 외침(外侵)이나 재난으로부터 안전하게 보호하고, 우리 사회의 일원이라면 누구든 기본적인 생존권을 보장하며, 어느 누구도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도록 정의를 바로 세워야 한다. 민간이 하기 어려운 교육과 문화, 기초 과학에 대한 장기적인 지원을 담당해야 한다. 좌고우면하지 않고 묵묵히 해나가다 보면 신뢰가 서서히 자리 잡을 것이고 그에 비례하여 다양성과 도전 의식이 자생적으로 싹틀 것이다.

밀려오는 4차 산업혁명의 파고 속에서 패러다임 전환을 요구받는 지금, 우리에게 절실한 국가는 이런저런 사업을 한다며 떠들썩하게 나서는 국가가 아니다. 심고원려(深考遠慮) 위에 신뢰를 축적하는데 정책의 최우선 순위를 두는 국가다. 이런 나라를 뭐라 표현할까. 시쳇말로 ‘츤데레 국가‘라고 하면 젊은이들은 더 잘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정택동 서울대 교수/차세대융합기술연구원 부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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