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소설 ‘남한산성’을 다시 폈다. 열댓번쯤 읽었지만 또 새롭다. 1637년 겨울, 벼루와 붓으로 사상누각을 쌓은 오욕(汚辱)의 역사는 조선 백성에게 물었다. ‘죽어서 살 것인가, 살아서 죽을 것인가.’ 379년이 흐른 겨울. 핏빛바다(레드오션)는 종이신문에게 묻는다. ‘사즉생(死卽生)이냐, 생즉사(生卽死)냐.’

남경필 경기지사(이하 존칭 생략)는 최근 ‘남한산성’을 읽었다. 한 달 보름 전쯤 읽는 중이라고 했다. 독일 방문 전에 책장을 다 넘겼을 것이다. 그는 독일에서 ‘중대결심’을 예고했다. ‘최순실 정국’은 대망(大望)을 꿈꾸는 남경필에게 이렇게 물었을 것이다. ‘죽어서 살 것이냐, 살아서 죽을 것이냐.’

나에겐 선택권이 없다. 살아서 죽을 길에 서 있다. 인내(忍耐)는 생즉사 수단이다. 살 자리는 정해졌다. 종이신문은 레드오션에 빠진지 오래다. 찍어낼수록 핏빛은 더 붉어진다. 발행부수공시제도(ABC : Audit Bureau of Circulations)는 악제(惡制)다. 시장(市場)은 공짜뉴스가 접수했다. 종이신문은 인터넷에 기생한다. 포털은 ‘절대언론’이다. ABC는 반(反)시장적으로 작동하며 더 많은 피를 요구한다. 사세(社勢)와 허명(虛名)은 고혈(膏血)을 짜낸다. 지대(紙待)는 자가수혈(自家輸血)용 혈액창고다. 최소한 내가 아는 유가부수(有價部數)는 허상(虛像)이다.

피 빨리는 룰을 깬 대가는 쓰디쓰다. 마법에 걸린 시장은 허상과 실상을 구분하지 못한다. 시장 왜곡을 강요한 악제는 내게 이렇게 묻고 있다. “너희가 가죽을 벗겨내는 고통을 감내하고 있다고 하나 수십 년 반칙과 변칙으로 지탱해온 정글의 법칙에 홀로 맞서려 하느냐.” 제 피 빨아먹는 지대 부활은 치명적인 유혹이다. 자가수혈만 하면 1만 부 정도는 단숨이다. 나는 뒷방에 있다.

남경필은 선택했다. 죽어서 살 길에 들어섰다. 탈당(脫黨)은 사즉생 선언이다. 죽을 자리는 골랐다. 일생의 승부수는 자신에게 던진 외통수다. 새누리당은 해체 상태를 유지한다. 친박(親朴) 대 비박(非朴)의 대치는 그들만의 승패놀음이다. 보수신당 주도권 쟁탈전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들의 승부호흡은 정권·당권 탐욕 앞에서 반(反)민심적으로 작동한다. 친박은 비박에게 더 많은 피를 요구한다. 비박은 친박에게 무조건 항복하라고 압박한다. 그들에게 ‘9일 탄핵’ 성패는 승자독식을 결정짓는 정치적 이벤트다. 시쳇말로 ‘멘붕’상태인 보수(保守)는 갈 곳 없는 ‘집토끼’ 취급한다.

변절(變節)한 그들은 죽을 곳을 찾은 남경필에게 이렇게 묻고 있다. “너의 뜻이 개결하고, 말이 준절하다 하나 60년 보수정당에 홀로 맞서려 하느냐.” 4월 퇴진, 6월 대선 ‘조건부 탄핵’ 회군(回軍) 유혹은 강렬하다. 말로 쌓은 성(城)을 말로 허무는 일은 손바닥 뒤집기다. 南은 도청에 있다.

나는 ‘막다른 골목’에서 죽을 길을 찾고 있다. 노사(勞社)가 매혈부조(賣血扶助)하는 고무줄 숫자 놀음에 다시 뛰어들 수 없어서다. ‘베끼기’, ‘물타기’를 당해도 ‘오후 7시 뉴스’ 만큼은 멈출 수 없어서다. 호형호제(好兄好弟)를 잃어도 묻고 또 물어야 하는 숙명에서 비켜설 수 없어서다. 광고 중단, 절독(絶讀) 보복을 당해도 할 말은 해야 하는 운명을 피할 수 없어서다. 진보는 ‘꼴통’, 보수는 ‘좌빨’이라고 해도 써야할 것은 써야 해서다. 춥고 배고파도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을 수 없어서다. 지대 만큼은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끊어내야 할 내 나라 종이신문의 적폐(積弊)다. 포털에 공짜로 넘겨준 시장을 되찾을 길은 인터넷에 있다. 탄압과 보복이 두려워서 파헤치지 않은 대가는 지금으로도 충분하다. 당장의 이익에 취해 정도를 벗어난 타협은 스스로 재갈을 무는 짓이다. 나는 뒷방에 있다.

남경필은 ‘무조건 탄핵’에서 살 길을 찾고 있다. ‘경기도의 아들이 대한민국의 딸을 지켜내겠다’던 2년 전 멍에를 벗어내야 해서다. 궁벽하고 비루한 보수의 성을 허물려면 ‘절대친박 정계은퇴→보수신당 창당’으로 이어지는 질서있는 해체 수순이 일어나야 해서다. 반박반문(反朴反文)이 연합하는 ‘제4지대’를 만들려면 파괴적인 정개개편이 일어나야 해서다. 20년 정치인생을 던진 승부수를 실현할 길은 ‘탄핵→분당’ 밖에 없어서다. ‘2016년 12월 9일’은 남경필의 정치생명이 통째로 걸린 날이다. 도지사직을 던져서라도 탄핵안을 관철시키겠다는 결기를 보여줘야 할 때다. 중대결심을 할 때부터 살 길은 정해졌다. 페이스북에 몇 줄 적고, 촛불이나 드는 정도로는 어림없다. 정계은퇴할 각오 없이는 죽어서 살겠다고 택한 길이 살아서 죽는 길이 될 수도 있다. 南은 도청에 있다.

한동훈/편집국장


저작권자 © 중부일보 - 경기·인천의 든든한 친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