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 때 영의정을 지낸 경재 하연(河演, 1376~1453) 묘는 시흥시 신천동 산 12에 있다. 소래산(299m)의 남쪽 기슭에 있으며 명혈로 소문나 있다. 소래산은 해발은 높지 않지만 정상에 오르면 전망이 넓게 트여 마치 높은 산에 오른 느낌을 받는다. ‘소래(蘇萊)’라는 지명은 당나라 소정방에서 유래됐다. 소정방이 백제를 공격할 때 중국 산둥성의 래주를 출발해 덕적도를 거쳐 이 산에서 머물렀다고 한다. 그 뒤부터 소정방의 ‘소’자와 래주의 ‘래’를 합쳐서 소래산으로 불렀다고 전한다.

하연의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고려 우왕 2년(1376년) 경남 산청군 단성면 남사리 니구산(尼丘山) 아래 여사촌 마을에서 출생했다. 원래 니구산은 중국의 산둥성 곡부에 있는 산으로 공자가 태어난 곳으로 유명하다. 조선 사대부들은 공자를 숭상해 자신들의 마을 뒷산을 니구산으로 이름 붙이기를 좋아했다. 이 마을은 진주 하씨 외에도 성주 이씨, 밀양 박씨 등이 오랫동안 세거하면서 숱한 선비들과 과거 급제자를 배출한 명촌이다.

하연은 21세 때인 태조 5년(1396년) 문과에 급제했다. 조선시대 때 과거 급제자의 평균 연령이 36.7세였던 점을 감안하면 영재였다고 볼 수 있다. 성품 또한 강직하고 청렴해 왕의 신임이 두터웠다. 춘추관 수찬관과 집의 등을 거쳐 세종 때는 예조참판, 대사헌, 경상도·평안도 등 4도 관찰사를 지냈다. 또 학문의 최고 영예라 할 수 있는 대제학을 역임했다. 이후 우의정과 좌의정을 거쳐 세종 31년(1449년) 영의정에 올라 무려 10년 동안 역임했다. 그가 78세로 숨을 거두자 임금은 특별히 지관에게 명해 길지를 잡아 장례를 지내게 했다. 그의 묘가 소래산에 있게 된 계기다.

명당에는 전설이 있기 마련이다. 대개는 명당을 잡게 된 배경과 관련된 것이 많다. 그러나 하연은 묘를 쓰고 난 후 전설이라서 색다르다. 전설에 의하면 인천도호부사로 부임해오는 신임 사또는 부임 첫날 모두 변사를 당한다는 것이다. 이유인즉 혼령이 나타나 모두 공포에 질려 기절하기 때문이다. 인천으로는 그 누구도 가지 않으려고 했다. 하는 수 없이 조정에서는 방을 내걸어 지원자를 모집했다.

이때 기골이 장대한 청년이 지원해 사또로 부임했다. 밤이 되자 소문대로 한 백발의 혼령이 나타났다. 그 위엄이 대단한지라 청년 사또도 기절할 뼌 했다. 그러나 정신을 차리고 백발의 혼령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러자 혼령이 껄껄 웃으며 내 부탁 좀 들어달라는 것이었다. 혼령은 “소래산 아래에 내 무덤이 있는데 그 아래 우시장이 들어서 지저분하고 냄새가 고약해서 편히 쉴 수가 없으니 그대가 옮겨 주었으면 좋겠다. 내가 이 부탁을 하려고 나타나면 모두 기겁해 죽어버리니 답답했다”고 말하며 홀연히 사라졌다.

다음날 청년 사또가 소래산 아래에 가보니 하연 정승 묘가 있고 그 아래 우시장이 있었다. 혼령이 말한 대로 지저분하고 냄새가 진동했다. 즉시 우시장을 다른 곳으로 옮기고 깨끗하게 청소를 했다. 그 뒤로 부임하는 사또는 먼저 하연 정승 묘에 참배하고 주변을 청소하는 것이 관례가 됐다고 한다. 또한 임기를 마치고 떠날 때는 모두 영전해서 간다는 것이다. 오늘날 주변이 난개발 되는 것을 보니 전설이 지금도 유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래산은 백두대간 속리산에서 뻗어 나온 산맥이 시흥시와 인천시 경계부의 성주산(217m)을 만들고 여기서 남쪽으로 2.3km 가지를 뻗어 우뚝 솟은 산이다. 산은 보는 위치에 따라 모양이 달라 보인다. 하연 묘 입구 쪽에서 소래산을 바라보면 기세가 있다. 이곳을 무인단좌형(武人端坐形)으로 보는 사람이 많다. 소래산이 투구를 쓴 장군의 모습이다. 그 뒤에 서있는 관모산은 장군을 보좌하는 문관이다. 좌우로 겹겹으로 감싸며 호종하고 있는 청룡과 백호는 장졸이다. 앞에 서 있는 봉우리들은 무관들이 기립한 모습이다.

앞에 펼쳐진 들판은 넓고 평탄하며 원만하다. 풍수에서는 들판을 명당이라고 한다. 본래 명당은 천자의 앞마당으로 만조백관들이 모여드는 곳이다. 이를 지리가들이 차명해 혈 앞을 명당이라고 부른다. 궁궐의 명당은 고관들이 모이는 중요한 장소다. 마찬가지로 혈 앞의 들판도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 수 있는 중요한 땅이다. 이곳이 난개발로 오염되면 흉함이 발생할 수 있다. 반면에 친환경적으로 깨끗하게 관리를 잘한다면 길함이 많을 것이다. 하연 묘에 얽힌 전설이 단순한 전설이 아님을 명심해야겠다.

형산 정경연 인하대학교 정책대학원 초빙교수








저작권자 © 중부일보 - 경기·인천의 든든한 친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