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도 운명일까. 공교롭게 부녀의 정치인생은 18년에서 멈췄다. 둘 다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권력을 내려놓았다. 그때는 '총탄'이었고 이번엔 '촛불'이었다. 한 분은 욕심과 무력(武力)이 과했고, 한 분은 무능(無能)과 독선이 지나쳤다.

쿠테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집권 18년 동안 국가 주도의 산업화를 강력하게 추진했다. 식민지 배상금으로 허허벌판 포항에 제철소를 짓고, 피폐한 국토에 고속도로를 닦아 경제의 핏줄을 뚫었다. 파독광부와 간호사, 베트남 파병과 경제원조 등에서 마련한 자금으로 경제개발을 계획성 있게 추진했다. 극렬한 반대가 있었지만 특유의 카리스마와 군인기질로 과감하게 밀어붙여 '한강의 기적'을 이뤄냈다. 그 과정에서 인혁당사건, 비상계엄, 유신헌법 등을 양산하며 민주화를 퇴보시키고 영구독재를 꾀했다. 결국 측근의 총탄에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박근혜는 1998년 대구 달성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당선되며 정치에 첫 발을 내디뎠다. 의원시절 한나라당이 위기 때마다 밤낮없이 선거현장을 누비며 당을 구해내 '선거의 여왕'으로 불렸다. 원칙과 약속을 지키는 신의 있는 정치인 이미지를 각인 시키며 마침내 대통령의 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대통령으로서의 박근혜는 기대만큼 역량을 보여주지 못했다. 집권기간 한미 전작권 연기와 한중FTA 체결, 통진당 해산, 위안부 협상 타결, 동남권 신공항 등을 대표적 업적으로 내세우고 있지만 평가는 박(薄)하다. 오히려 불통과 독단, 경제정책 실패와 남북관계 악화 등 안 좋은 면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 특히 세월호 침몰사고와 정부의 허술한 사고대응은 박 대통령의 위기관리능력 미숙을 극명하게 드러냈다. 여기에 최순실 게이트가 방점을 찍었고, 연이은 거짓말은 불타는 민심에 기름을 끼얹었다. 급기야 국회의 압도적 탄핵을 받고 헌재의 결과만을 기다리는 처지가 됐다. 정치입문 18년 8개월 만이다.

생각해보면 박 대통령이 대통령에 오른 건 아버지에 대한 향수(鄕愁)도 큰 역할을 했다. 국민들은 세계 최빈국을 중진국 반열에 올려놓았던 박정희의 강력한 카리스마를 딸도 이어받았을 것이라 기대했다. 변화와 위기의 시대에 그런 확고한 리더십으로 다시 한번 도약시켜 주기를 바랐다. 한국인 특유의 애잔한 정서도 마음을 움직였다. "엄마, 아버지 그렇게 보내고 한번 해보겠다고 저렇게 애를 쓰는데 도와줘야지...", "자식도 남편도 없고 형제간 왕래도 없이 나라만 생각한다는데 찍어줘야지..." 국민들은 어깨를 다독이고 손을 잡아주었다. 아버지를 기억하는 다수의 장년층은 '콘크리트 지지'를 보냈다.

그러나 기대는 '배신의 정치'로 돌아왔다. "아버지의 나쁜 점만 물려받았다"는 사촌형부 김종필 전 총리의 말을 그대로 입증했다. 국가의 공식 시스템을 두고 듣도 보도 못한 사설세력에 국정의 운영을 맡겼다. 기업 총수들을 청와대로 불러 급조한 재단에 수백억대 자금출연을 강요했다. 진언하는 참모들을 국기문란으로 쫒아내고 몇몇 측근들에 둘러싸여 국민의 소리를 외면했다. 대통령의 사고(思考)가 여전히 70년대에 머물고 있었던 것이다. 국정은 흔들리고 불만이 사회 곳곳에서 터져나왔다. 민주화된 대한민국에서 구시대적 리더십이 통할리 없었다. 4차 산업혁명이 글로벌 경제의 판도를 바꾸고 미국의 동맹마저 의심 받는 절체절명의 시기에 그런 봉건적 리더십이 들어먹힐리 만무했다. 국가적 역량(力量)을 끌어올려 세계 경쟁에서 앞서 나가는 건 더더욱 요원한 일이었다.

억울한 측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까지다. 근현대 한국사와 영욕을 함께한 부녀 대통령의 역사는 여기가 종착점이다. 이제 새로운 대한민국을 위한 선진적 리더십을 세워야 한다. 권위적이고 경직된 사고(思考)에서 벗어나 여유와 유머를 겸비한 유연한 지도자를 선출해야 한다. 적(敵)이라도 수시로 찾아가 설득하고 협상하는 타협의 리더십을 가려내야 한다. 기득권의 카르텔과 최악의 양극화를 깨부술 정의로운 리더를 대한민국호의 선장으로 밀어 올려야 한다. 그것은 오롯이 국민들의 몫이다. 그것은 오직 국민만이 할 수 있다. 4년 후에는 다시는 촛불을 들고 싶지 않은 이유다. 

민병수/디지털뉴스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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