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열흘 정도만 지나면 2016년도 역사 속으로 들어간다. 해마다 이맘 때면 여러 단체에서 ‘불우이웃 돕기’를 외치며 성금을 모으곤 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여기에 동참하며 작게나마 선행을 했다는 뿌듯함을 느끼기도 한다. 사실 그동안은 평상시에는 외면하다가 특정 기간이 되면 보여주기 행사처럼 반짝하고 마는 불우이웃돕기가 그다지 마뜩하지 않을 때가 있었다. 그런데 올 연말은 국민의 관심사가 온통 대통령의 탄핵에 가 있고, 또 그럴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보니 불우이웃을 향한 마음도 상대적으로 약해져서, 정치의 뒷전으로 밀려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연말 분위기가 썰렁하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설령 반짝 행사처럼 행해졌지만, 그래도 아예 없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TV에서는 연일 국회 청문회를 생중계한다. 수많은 눈들이 TV 앞에 앉아 그 상황을 지켜보지만 우리가 봐야 하는 것은 대부분, 흥분과 고성을 일삼은 국회의원과 발뺌과 모르쇠로 일관하는 증인들의 모습뿐이다. 국민의 세금으로 먹고 사는 공직자란 사람들은 왜 그리도 하나같이 기억력이 나쁜지 모르겠다. ‘그런 너는 모든 일을 다 기억하느냐?’고 할지 모르겠다. 물론 나 역시 하루에도 몇 번씩 핸드폰을 찾고, 공과금을 냈는지 안 냈는지 기억을 못해 두 번씩 낸 적도 있다. 하지만 교수로서의 내 책임에는 그렇지는 않다. 졸업한 지 십 수 년이 지나서 찾아오는 학생이라도 대화 몇 마디 나누다 보면 그들의 학창시절이 파노라마처럼 떠오른다. 가끔은 너무 기억을 잘 해내서, 오히려 학생들을 당황하게 만들기도 한다. ‘혹시 제가 뭐 잘못한 것 없지요?’라고 물으며….

내가 학생들의 일을 기억하는 것은 머리가 좋아서가 아니다. 학생들에 대한 관심과 애정, 또는 내 일에 대한 책임과 자부심 때문이다. 그런데 청문회에 나오는 사람들은 모두 하나같이 잘 모르고, 기억이 나질 않는단다. 그러면서 그동안 어떻게 국가의 일을 했는지 모르겠다. 그것은 마치 교수가 지식이 사라져서 전공 내용도 다 잊어버리고 가르칠 내용도 잘 모르면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과 같다. 자신의 책임과 직접적으로 관계된 일도 기억 못할 정도로 기억력이 나쁘거나 나이가 들었다면 진즉에 그 자리를 내놓았어야 한다. 궁금한 마음에 TV를 틀었다가도 화가 나고 어처구니가 없어서 도로 꺼버리는 일을 반복한다.

화나고 어처구니없는 일이 청문회 뿐만은 아니리라. 국가 최고의 통치자라는 분은 ‘모르고 한 일’이라는 말을 반복하며, 대국민 담화에서 했던 말조차 지키지 않고 있다. 지금도 주말이면 어김없이 촛불 집회가 열리고 있다. 날씨는 점점 추워지지만 촛불의 열기는 사그라지지 않고 있고, 대다수의 국민도 마음으로 동참한다. 대통령은 국민에 의해 선출되는 자리이다. 그렇다면, 자신의 공과(功過)는 차치하고라도 한 번쯤은 국민의 목소리를 진지하게 들어야 하지 않을까. 기독교 신자가 아니라도 솔로몬 왕의 지혜에 대하여 한 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한 아이를 두고 두 여자가 서로 자기 자식이라 우겼다. 솔로몬은 병사에게 아이를 둘로 잘라 나누어 가지게 하라고 하였다. 그러자 한 여자가 울면서 자신은 아이의 생모가 아니라며 제발 아이를 자르지 말라달라고 했다. 이에 솔로몬 왕은 그 여자가 생모라고 판단하고 아이를 그 여자에게 주라고 했다. 모정이란 그런 것이다. 설령 자신의 아이가 다른 여자의 손에서 크는 한이 있더라도, 그 아이의 생명을 위해서 기꺼이 생모의 자리를 양보하고 포기하는 것. 그게 바로 모정이다.

박근혜 대통령께선 제18대 대통령 취임사에서 ‘희망의 시대’를 열겠다고 하며 ‘국민 모두가 함께 행복한 대한민국’을 만드는 데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2016년 12월의 대한민국. 국민의 대다수는 희망 대신 실망과 절망을, 행복 대신 좌절과 불행함을 느끼고 있다. 안 그래도 연말이라 일도 많고 분주한 시기인데 나라가 연일 뒤숭숭하다 보니 일도 손에 잡히지 않는다는 사람들도 많다. 겨울은 누구에게나 추운 계절이지만, 없는 사람들에겐 더욱 그렇다. 그런데 올해는 사람들의 관심도 제대로 받지 못하니 그 추위가 배가 되는 게 아닐까 걱정스럽다. 진정 국가와 국민을 생각한다면 민심이 무엇인지 한 번쯤 헤아려 주길 간절히, 간절히 바란다.

김상진 한양대학교 교수, 한국시조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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