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한해도 며칠 남지 않았다. 지난 여름은 유례를 찾기 힘든 혹서(酷暑)로 염장군(炎將軍)의 위세가 대단했으며, 2016년은 글자 그대로 국내외로 다사다난한 해였다. 한반도에 짙게 드리운 암운(暗雲)은 좀처럼 요동을 보이질 않는다. 하지만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음이 대자연의 변함없는 진리이다. 굳이 불교의 평등과 더불어 큰 가르침인 무상(無常)을 빌리지 않더라도, 모든 것은 흐르며 지나간다. 바뀌고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어제와 오늘이 다르다. 동지(冬至)를 기점으로 낮의 길이가 조금씩 길어지니 밝아오는 새날과 함께 어둠과 부정적인 모든 것들은 물러간다.

모성애와 출세를 상징하는 잔나비에서, 싱그러운 새 날과 축귀(逐鬼)의 대명사인 닭의 해로 바뀐다. 안타까운 일은 조류독감으로 국내에서만 엄청난 양의 닭이 도살 처분된 오늘날 우리의 현실이다. 그러나 마음 속 깊이 각인된 닭에 대해 오랜 세월에 걸쳐 전통문화에 간직된 좋은 의미나 상징마저 매장한 것은 결코 아니다. 베드로의 배반을 깨닫게 하는 새벽 닭 우는 소리가 성서에서 전한다. 여하튼 새 날을 알리는 울음소리와 더불어 닭은 동서양 가릴 것 없이 좋은 의미를 지닌다. 식량원으로 유용함 외에 주변에 함께하는 친근함 나아가 아름다운 외모 등 조형예술의 소재로 일찍부터 등장한다. 한자문화권에선 닭 벼슬은 사람이 관(冠)을 쓴 모습과 비슷하여 과거급제를 통한 관계진출로 입신양명(立身揚名), 닭은 병아리와 알과 함께 다산(多産), 부정을 막는 액막이로서 민화나 민예품에 두루 등장된다.

우리니라에선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비록 감상화는 아니나 우리 고대회화의 실상을 알려주는 무용총 등 고구려벽화에서 힘차고 당당한 닭을 살필 수 있다. 무덤 내 남쪽 방향 의 수호신인 주작(朱雀)도 닭의 변형이다. 4세기에서 6세기 고구려 고분벽화는 그 진원지인 중국을 제키고 중심지가 고구려임을 알려준다. 이들 벽화는 문화의 품격과 예술의 국제적인 위상을 가시적으로 선명하게 드러낸다. 도자기 종주국인 중국에서도 아름다음을 극찬한 청자 중에 오리 모양 연적이 전한다. 조선에선 19세기 왕조말기 백자로 빚은 닭 모양 연적이 다수 전하는데 손 안에 들어오는 앙증맞은 공예품이다. 이 외에 그림에서도 닭은 어렵지 않게 살필 수 있다. 매년 초 대문에 붙이는 세화(歲畵)등 서민의 소박한 꿈과 소망이 어린 민화(民畵)를 비롯한 각종 장식그림, 이름난 화가들이 남긴 감상화로 제작된 생동감 넘치는 닭 그림도 다수 전한다.

먼저 문인화가로 우리 그림의 독자성을 알린 진경산수를 이룩한 ‘조선의 그림 성인(畵聖)’으로 지칭되는 정선(1676-1759)이 그린 암수 한 쌍에 병아리를 거느린 것, 윤두서(1668-1715)와 함께 풍속화의 서두를 장식한 조영석(1686-1761)의 닭과 병아리 스케치 등을 들게 된다. 화원으로는 화조나 영모화에 앞서 풍속화의 한 모퉁이에도 개와 더불어 닭이 등장한다. ‘조선의 그림 신선(畵仙)’으로 불리는 김홍도(1745-1805 이후) 및 조선왕조 끝을 화려하게 장식한 장승업(1843-1897)의 괴석(怪石)을 곁들여 신비로움까지 주는 대작 등 시대를 대표하는 직업작가들이 이 소재를 즐겨 그려 전하는 명화가 적지 않다. 특히 초상화에 이름을 날린 화원으로 고양이와 닭 그림에 뛰어나 ‘변 고양이’나 ‘변 계’란 별명을 얻은 변상벽(1730-?)의 존재는 주목된다. 그의 닭 그림을 극찬한 정약용(1762-1836)의 시는 이 소재에 있어 작가의 명성을 대변한다 하겠다.

닭은 새벽을 발 빠르게 먼저 알린다. 암흑에서 광명을 혼돈에서 조화를 죽음에서 소생을 알리는 계명성(鷄鳴聲)은 온갖 어둠의 삿됨을 물리치고 광명을 가져온다. 한자문화권에서는 기원전 한(漢) 나라부터 닭의 다섯 가지 덕(德)이 운위되었다 붉은 닭 벼슬은 문(文)을, 발의 길고 날카로운 발톱은 무(武)로 문부 겸비에, 적 앞에서 거침없이 반격하는 날쌘 용(勇), 먹이를 앞에 두곤 동료를 부르는 어진 마음인 인(仁), 어김없이 때 맞춰 크게 울어대는 신(信)이 그것이다. 우리 자신을 비롯해 사회 나아가 국가가 여의(如意)하길, 국태민안(國泰民安)을 간절히 소망한다.

이원복 부산박물관장·전 경기도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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