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봉의 인생과 닮은… 마무리가 아쉬운 땅

대통령 비선 실세의 국정 농단으로 나라가 혼란스럽다. 요즘 돌아가는 현실이 고려 말기와 비슷한 것 같다. 민심은 천심을 실천하고자 했던 삼봉 정도전(1342-1398)을 찾았다. 그의 묘는 없다. 제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에게 살해돼 시신조차 버려졌기 때문이다. 다만 그를 모신 사당이 경기도 평택시 진위면 은산리 189에 있다. 경북 봉화가 관향인 정도전의사당이 이곳에 있는 이유는 그의 장손인 정래(鄭來)가 용인 현령으로 있다가 이곳에 정착했기 때문이다.

역사는 반복한다. 보잘 것 없는 신분으로 공민왕의 신임을 받은 신돈이 국정을 쥐락펴락했다. 작금의 최순실과 비슷하다. 그러나 신돈은 일정한 직책도 부여받고 백성을 위해 개혁을 하려고 했던 인물이다. 탐욕스럽고 파렴치한 최순실과는 비교가 안 된다. 그럼에도 권한을 넘어서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정상적인 절차를 거치지 않는 권력은 통제장치가 없다. 책임을 지지도 않는다. 실세를 비호하는 간신배도 등장한다. 그들에게 정의는 안중에 없다. 오직 사리사욕만 있을 뿐이다. 결과적으로 국고는 탕진되고 백성은 도탄에 빠지기 마련이다.

난세가 거듭되면 이를 개혁하려는 인물 또한 등장한다. 바로 삼봉 정도전이다. 봉화정씨 5세손인 그는 대대로 봉화현의 호장을 지낸 가문에서 태어났다. 봉화정씨가 향리를 벗어나중앙무대로 진출한 것은 정도전의 아버지 정운경 때부터다. 정운경은 어려서는 영주와 안동 향교에서 수학했다. 개경에 올라와 사마시에 합격하고 이어서 문과에 급제했다. 순전히 자신의 능력에 의해 형부상서에까지 올랐다. 그러나 당시는 혈통과 가문을 중시하는 시대라 권력 중심에서는 백안시됐다. 정도전의 개혁사상은 이러한 성장 배경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보수냐 진보냐를 따졌을 때 삼봉 정도전은 진보주의자다. 반면에 포은 정몽주는 보수다. 어느 시대나 진보와 보수는 공존한다. 이 둘이 서로 견제하고 균형을 이룰 때 역사는 발전한다. 정도전과 정몽주는 백성을 위한 정치적 신념은 같았다. 다만 방법에서만 차이가 있었다. 삼봉은 고려라는 낡은 틀을 깨고 새로운 정치구조를 만들고자 했다. 포은은 고려의 틀을 유지하며 개혁을 하고자 했다. 이 둘은 서로를 설득하기 위해서 밤새 토론했다. 이것이 민주주의다. 그런데 이방원이 정몽주를 척살함으로써 그 질서를 깨버렸다. 이로 말미암아 조선은 성씨만 바뀌었을 뿐 고려와 다름없는 나라가 돼버렸다.

정도전은 포기하지 않았다. 조선의 통치 권력을 신권 중심으로 바꾸고자 했다. 왕은 상징적으로 존재하고 재상이 국정을 책임지고 운영하는 권력 시스템을 만들고자 한 것이다. 그 당시에 17세기 영국에서 처음 등장한 입헌군주제를 추진한 것이다. 정도전은 “만약 어리석은 왕이 나오면 나라와 백성을 혼란에 빠뜨릴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600년 전 했던 말이 오늘날에도 그대로 유효한 것을 보면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왕권국가를 지향했던 이방원이 정도전을 살해하고 말았다.

정도전은 조선시대 내내 신원이 복원되지 못 했다. 이 때문에 후손들도 많은 불이익을 당했다. 고종 때가 돼서야 신원이 회복되었다.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도성과 궁궐을 설계한 정도전의 공을 인정한 것이다. 고종은 사당 짓는 것을 허가하고 ‘유종공종(儒宗功宗)’이라는 현판을 내렸다. 유학과 공이 으뜸이라는 뜻이다. 사당을 문헌사(文憲祠)라고 한 것은 삼봉의 시호인 문헌을 따라 한 것이다. 그 아래에 있는 희절사(僖節祀)는 정도전의 장자 정진을 봉안한 사당이다. 그는 간신히 살아남았지만 모든 직첩이 회수되고 유배나 다름없는 모진 세월을 보냈다.

이곳의 태조산은 한남정맥의 문수봉(404.8m)이다. 중조산은 쌍용산(213m)·천덕산(335.5m)·덕암산(164m)이다. 소조산은 태봉산이다. 여기서 내려온 산맥이 마을 앞 하천을 만나 멈췄다. 산맥의 흐름이 순하면서도 힘이 있다. 힘 있는 산맥은 기개 넘치는 인물을 배출한다. 그러나 주변 산들이 제대로 감싸주지 못하고 달아나듯 있다. 사람이 모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물은 감싸고 흐르지만 완벽하지는 않다. 앞의 들판도 평탄하지만 원만하지는 않다. 풍수적 조건을 다 갖추고 있으면서도 완벽하지는 못하다. 선조로 인하여 숨죽이고 살 수밖에 없었던 후손들이었다. 만약 사람이 모이면 감시와 탄압이 심해질 것이다. 이를 지리적으로 피하여 살 수 있는 땅이 필요했다. 후손들의 지혜가 느껴지는 곳이다.

정경연 인하대학교 정책대학원 초빙교수

저작권자 © 중부일보 - 경기·인천의 든든한 친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