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쏟아져 나오는 뉴스들은 사건이나 팩트, 그 자체도 그러하려니와 매체에 대한 태도와 이와 관련한 종사자 즉 기자들에 관한 윤리마저 요구하고 있다. 이즈음에 알랭 드 보통은 “모든 것을 뉴스가 믿음직스럽게 해낸다 하더라도, 우리가 뉴스에 대한 경계를 낮추지 말아야 하는 이유들은 변함없이 한 움큼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 한움큼의 양이 가늠도 안되지만 분명한 것은 왜 지금에 와서 재벌과 싸잡아 언론이 개혁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물음이다. 세계적으로 유행되는 가짜 뉴스(Fake news) 때문 일까. 가짜 뉴스가 가장 영향력을 발휘한 것은 미국 대선이다. 힐러리 클린턴과 도널드 트럼프 양 후보의 격전이 이어지면서 두 후보에게 유리하거나 불리한 뉴스들이 쏟아졌다. 그 결과 이러한 가짜 뉴스를 만들어 돌린 사람들은 선거결과에 자신들이 충분한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고 여기고 있다.

그래서 미국 CNN은 미국 대선 기간에 등장한 가짜 뉴스의 생산자는 트럼프 지지자, 광고 수익을 노리는 장사꾼, 러시아의 선전기구 등 세 그룹으로 추정된다고 말할 정도다. 그러니까 냉전시대를 만들어가는 러시아가 서방 국가의 정치 불안을 부추기려고 가짜 뉴스를 생산하고 있다는 의혹이 지속적으로 제기된다는 얘기인데 멀리 떨어져 있고 당장 코앞에 촛불로 정신없는 우리로서는 이 얘기를 어찌 평가해야 하는지 조차 난감 스럽다. 대개의 가짜 뉴스는 전형적인 뉴스의 형식을 지닌다. 그러니까 내용이야 어떻든 제목부터 일단 그럴싸하게 포장해 어떤 때는 그 내용마저 거짓 정보로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채우고 있다. 여기에 제도권 매체보다 더 강력한 조사나 통계, 심지어는 인용을 자연스럽게 달아두는 치밀함마저 보이고 있다.

그럼 우리는 이런 데서 자유스러운가. 결코 그렇지 않다. 부르기도 민망한 병신년(丙申年)의 끝 몇 달을 최순실과 촛불, 박근혜 대통령으로 도배하다시피 한 뉴스로 인해 비몽사몽 여기까지 왔고 앞으로 갈 길이 더 멀기만 하다. 매체마다 다는 제목이 선정적이고 개인의 비밀스러움에 포커스를 맞추다보니 본질은 왜곡되고 있다. 일단 많이 몰려야 하고 클릭수가 문제여서다. 뉴스는 참이나 거짓이나 급속도로 퍼진다는데 매력이 있고 함정이 있다는데 문제가 더 있다. 더구나 개인의 블로그나 불명확한 사이트 특히 소셜네트워크(SNS) 계정을 기반으로 가짜 뉴스가 유통되더라도 어떤 곳에서는 믿을만한 유명인, 혹은 기관이나 근거있을 통계를 인용하고·언급하기도 한다. 한 예를 보자. 파키스탄의 국방장관인 카와자 아시프는 지난 24일 자신의 트위터에 돌연 이스라엘에 ‘핵 보복’을 암시하는 글을 올린다. 현직 국방장관이 양국의 핵전쟁 가능성을 밝힌 중대 사안이었지만 뉴욕타임스(NYT)가 당일 “파키스탄 국방장관이 ‘AWDnews’라는 가짜 뉴스 사이트에 속아 애꿎은 이스라엘을 향해 핵 위협 발언을 했다”며 보도함으로 종결됐다.

진짜 문제는 기존의 제도권에 속한 매체들마저 그 신뢰도가 갈수록 떨어진다는 점이다. 우리의 예도 생각해 보자. 보수를 자처하는 신문들도 촛불의 위력에 앞 다퉈 그리고 줄을 선다. 그것이 팩트라는 것을 증명도 하기 전에 그어있는 선에 발부터 내민다. 그리고 다른 자매매체로는 특종을 이유로 기존의 신념과는 다른 입장차를 분명하고도 극렬하게 보이는 기민함을 보인다. 물론 여기에는 나름 추락하는 인지도가 한 몫 거든다. 그러다보니 모든 게 속보와 형식에만 몰릴 수 밖에. 그 끝은 아직 안 나왔지만 병을 키우는 세균이 따뜻하고 거기에 맞는 만만한 환경에서 빨리 퍼지는 것과 같다. 마치 김영란 법의 처음 긴장함에서 더 크고 센 최순실이 터지면서 법이 사그러지는 듯한 특성같이. 또한 국정농단의 주인공인 최순실 환경처럼 이런 저런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흠집내서 성공만 추구하는 갈등 본위 사회와 거짓말을 일삼고 일이 잘못되어도 아무런 책임을 지지않는 고질적인 문제와 같이. 가짜 뉴스가 국가나 사회는 제쳐두고 개인의 이득만 챙기려는 속성과 닮아있다. 분명한 뉴스 가치와 메시지를 드러내는 대안형의 미디어가 생겨나 평판도 좋다. 그럼에도 지금은 분명 뉴스 과잉의 시대다.

접어두고 걸러내야 하고 뉴스를 읽는 사람 개인이 뉴스를 분별해야 한다. 즉 능력을 기르는 수 밖에 없다. 가짜 뉴스도 스스로 극복해야 한다. 그 이전에 언론사와 포털사이트·소셜미디어 등의 각성이 절대 필요하다. 방송뉴스의 앵커 멘트처럼 독자를 가르치고 심지어 다그치는 모양으로서는 곤란하다. 계도성 언론은 이제 끝났다. 누가 누구에게 가르치고 계도한다는 말인가. 우리 국민인식도 수준과 함께 높아졌다. 그러다보니 전문적인 용어나 학술적인 것을 동원해 계도하기보다 새로운 미디어 생태계에 맞는 인식과 철학의 변화가 요구되고 있다. 뉴스의 신뢰성, 그리고 충성도다. 단순히 정치권 정도에서 입만 벌리면 떠들어대는 개혁이 아니라는 점도 마찬 가지다.

문기석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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