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서 문학 작품을 읽고서 부록으로 붙어있는 평론만큼의 감동을 느낀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같은 사람이 수십 년 후 우연히 같은 작품을 읽게 되었을 때는 사정이 달라지는 경우가 많다. 그만한 세월동안 겪어온 인간과 세상에 대한 기억이 뇌리에 켜켜이 침적되어 공감의 깊이를 바꾸어놓았기 때문일 것이다.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가 그런 것들 중 하나다.

조각배를 타고 고기를 잡아 홀로 사는 노인이 있었다. 84일 동안 한 마리도 물고기를 잡지 못한 그에게 사람들은 ‘살라오’라고 했다. 지독히도 운이 없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그는 평소와 다름없이 다시 바다로 나가 기약 없는 기다림을 이어가고, 드디어 배에 실을 수 없을 만큼 거대한 청새치를 잡는다. 그러나 상어들의 습격이 거듭 되고, 물고기를 지켜내려 사력을 다했지만 뼈만 남긴 채 쓸쓸히 귀환한다.

이리저리 살점이 다 뜯겨나간 물고기의 앙상한 뼈대를 상상하자니 우리네 연구개발이 떠오른다. 불수능이든 사법시험이든 아무리 어려운 시험이라도 시험을 치른다는 것은 누군가 이미 답을 알고 있는 문제를 푸는 것이다. 반면 연구는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 해도 세상에 아무도 몰랐던 무엇인가를 처음으로 알아내거나 만들어내는 작업이다. 그렇기에 연구는 언제 무엇을 얻을 수 있을지 기약하기 어려운 불확실성과의 싸움이다.

정치인들이나 공무원들에게 연구개발, 특히 과학기술 연구개발이란 어디까지나 경제 발전의 하위 개념 정도로 이해되는 경우가 많다.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민간 기업에서야 이상하지 않을 수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공공 부문이 한 술 더 뜰 때가 많다. 창의력은 계획이 아니라 불확실성의 산물이며, 시설이나 서류가 아니라 인재에 대한 투자와 기다림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귀로는 듣되 몸으로는 체득하지 못한 탓이다. 머슴이 하루아침에 주인이 되었다고 어찌 ‘주인다워’ 지는 것까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랴.

그럼에도 과학기술을 통해 기업을 돕고 먹거리를 창출하겠다는 정치인의 선의는 폄하되어서는 안된다. 정권 바뀔 때마다 달라지는 구호에 맞춰 어떻게든 컨텐츠를 채워내는 공무원의 노고도 대단하다. 연구자들은 숱한 연구계획서와 보고서를 만들며 실험실에서 밤을 새운다. 여기에 미래 먹거리를 만들어내 달라는 국민의 염원까지 더하니, 연구개발에 투입되는 예산 비중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연구개발 성과물의 질은 학문적으로든 경제적으로든 기대에 못 미치고 있다. 예산 비중은 상대적으로 높지만 내부를 들여다보면 실효성이 낮은 탓이다. 정치인들의 정책에는 혜안이 부족하고 공무원들의 집행에는 정권 시한을 넘는 지속성이 빠져있다. 연구자들은 연구를 하기 위해 연구비가 필요한 것인지 연구비를 따기 위해 연구가 필요한 것인지 갈피를 못 잡고 있다.

그들도 자신의 한계와 문제점을 알고 있다. 사석에서는 넋두리하듯 누구보다 냉소적으로 현실을 비판한다. 하지만 당장 실천문제에 들어가면 예외 없이 그들 나름대로의 사정을 호소한다. 정치인은 일반인의 주목을 받아야 하고, 공무원은 책임 시비에 대비해야 한다. 연구자는 정치 논리와 관료주의 사이 어딘가에서 각자 먹고 살기 바쁘다. 듣고 보면 이해가 된다. 그런데 관련 이익집단들의 입장을 모두 양해하고 나니 정작 결과에 대해 책임을 물을 곳이 없다. 늘 그래왔듯 연구개발이 희생된다. 우리의 연구개발에게는 자신을 위해 사투를 벌일 늙은 어부 한 사람조차 없는 까닭이다.

보이지 않는 가치를 볼 줄 알아야 연구개발의 옥석을 가릴 수 있다. 예산권 및 인사권에 대한 영향력이 연구개발에 대한 이해도와 비례해야 하는 이유다. 따라서 권한이 큰 집단일수록 연구개발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가 있어야 한다. 이것을 연구개발 정책 관련 집단들 전체와 납세자들이 당연한 전제로 받아들일 때 현실은 바뀔 수 있다. 결과는 천양지차일 수 있지만 결과를 좌우하는 원인은 뜻밖에 아주 작은 차이다. 스스로 동굴의 우상(idols of the cave)의 포로임을 모르는 사람이 권한을 가지고 있다면 이미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사실만 우리 모두 확실히 인식하면 된다. 그렇게만 한다면 우리에게 아직 희망은 있다.

인간은 부서질 수는 있지만 패배하도록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노인과 바다는 생뚱맞아 보이는 문장으로 자신을 맺는다. “노인은 사자 꿈을 꾸고 있었다(The old man was dreaming about the lions).”

정택동 서울대 교수/차세대융합기술연구원 부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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