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산인 화산 아래 용이 여의주 희롱하는 형태

사도세자의 융릉

사도세자와 융릉과 정조의 건릉은 화성시 안녕동 산 1-1에 있다. 조선시대 왕릉은 도성에서 100리 안에 위치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왕이 하루 만에 참배하고 돌아갈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곳은 백 리가 넘는다. 네이버 지도에서 창덕궁에서 융건릉까지 자동차 도로 중 최단거리를 검색해보면 46.3km(115리)다. 직선거리는 40.8km가 나온다. 정조가 사도세자 묘를 이곳으로 이장하려고 하자 신하들은 거리가 멀다는 이유로 반대하고 나섰다. 그러자 정조는 “이제부터 화성은 80리로 하라”고 명했다. ‘수원 80리’라는 말이 생겨난 이유다.

본래 사도세자 묘는 양주 배봉산(현 서울시립대학교 뒷산) 아래에 있었다. 뒤주 속에 갇혀 죽은 뒤 제대로 된 자리에 묻히지 못했다. 정조는 세손시절 아버지 묘를 자주 참배하고 싶었으나 할아버지 영조에 의해 엄격하게 금지됐다. 심지어는 10세의 나이로 일찍 죽은 효장세자의 아들로 입적되기까지 했다. 아버지가 죽은 뒤 12년이 지난 23세가 돼서야 처음으로 참배할 수가 있었다. 무덤은 띠가 말라죽고 바람이 순하지 못하고 뱀이 똬리를 틀고 무리 지어 있는 등 지세가 좋지 않았다. 정조는 아버지 묘를 좋은 곳으로 이장을 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스스로 풍수지리를 익혔다.

정조가 25세(1776년) 때 영조가 83세로 승하하자 제22대 왕으로 즉위했다. 즉위식이 끝나자마자 그는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고 선언했다. 이 말은 아버지의 신원을 복원하겠다는 뜻이다.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은 서인과 노론들은 공포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다. 정조는 즉위 열흘 후 사도세자의 존호를 장헌(莊獻), 묘의 이름도 영우원(永祐園), 사당을 경모궁(景慕宮)으로 높이는 숭모사업을 단행했다. 그리고 이장의 뜻을 밝히고 지관들로 해금 길지를 찾도록 명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정조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문의 양성산, 장단 백학산, 광릉 부근, 용인, 가평 등 여러 곳을 보았으나 마땅한 자리가 없었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정조가 38세가 됐음에도 대를 이어줄 자손이 없었다. 왕비인 효의왕후 김 씨는 소생이 없었고, 선빈 성씨에게서 문효세자가 있었으나 일찍 죽었다. 길지로 이장을 해야 왕자를 생산하고 국운을 장구토록 한다는 것을 믿었다. 그는 널리 지사들을 불러 모아 수시로 길흉을 물었다. 그러다 지금의 자리가 소개됐다. 100년 전 남인의 영수였던 윤선도가 효종의 자리로 추천했던 곳이다. 남인을 우대했던 정조는 윤선도의 풍수 실력을 무학에 버금가는 신안의 실력을 갖췄다고 평가했다. 효종의 묘는 서인들이 이곳을 반대하는 바람에 구리의 동구릉에 묻혔다가 다시 여주로 옮겨졌다.

윤선도가 현종에게 올린 상소에는 다음과 같다. “신이 여러 곳을 살펴보았으나 전혀 마음에 드는 곳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오직 수원의 산만은 눈을 들자마자 깜짝 놀라며 상격임을 분명하게 알았습니다. 용의 크기와 풍수가 영릉과 비교해 조금 못 미쳤지만 진정 천리를 가도 이러한 곳은 찾기가 어렵습니다. 또 천년에 한 번 만날 수 있는 땅이어서 비록 도선과 무학이 다시 나온다고 하더라도 이 말을 바꾸지 못할 것입니다. 신의 소견만 그런 것이 아니라 윤강과 이원진 및 여러 지관들도 하나의 흠이 없다고 칭찬하며 모두가 나라를 위해 축하하였습니다.”

마침내 정조 13년(1789) 7월 11일 박명원의 상소로 사도세자 묘는 양주 배봉산에서 수원 화산으로 옮기기로 결정됐다. 정조는 이곳이 용이 여의주를 가지고 노는 반룡농주형(盤龍弄珠形)이라고 극찬했다. 용이나 혈의 지질이 좋고 물이 더없이 아름다우니 천 년에 한번 만날까 말까 한자리라고도 했다. 이장 때는 직접 참석해 용을 따라 올라가 보기도 하고 묘 속의 흙을 살펴보기도 했다. 금색의 진토가 나오는 것을 보고 하늘이 준 것이라며 기뻐했다. 묘를 이장하고 1년 후에는 대를 이을 왕자(순조)가 태어났으니 명당이 확실하다고 믿었다.


정조는 재위 24년 만인 1800년 6월 49세의 나이로 죽었다. 처음은 그의 유언대로 융릉의 동쪽 언덕에 묻혔으나 그의 비인 효의 왕후가 죽으면서 1821년 융릉 서쪽 언덕으로 옮겨 합장됐다. 이후 조선의 왕권은 급속히 약화됐다. 더욱이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가 22세로 죽고 손자 헌종이 왕위에 올랐으나 23세의 짧은 생을 마감하면서 후손이 끊기고 말았다. 왜 그랬을까? 사도세자의 융릉과 정조의 건릉에는 밝혀지지 않은 음모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형산 정경연 인하대학교 정책대학원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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