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518년간 '명당 왕릉'은 4곳 뿐

▲ 사도세자 융릉
왕릉은 과연 명당인가?

왕릉은 당연히 명당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당대 최고의 지관들이 자리를 잡았으니 그렇게 생각할 만도 하다. 그러나 명당자리에 묘를 썼는데 왜 조선왕조가 망했냐는 의문도 제기된다. 혹자는 풍수지리가 원래부터 허황된 것으로 맞지 않는다고 단정한다. 그러나 역사를 조금만 뒤집어 보면 왕릉이 명당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든다. 역사는 왕권과 신권의 싸움이라 할 수 있다. 왕들은 왕권을 강화시키는 것이 목적이다. 반면에 신하들은 왕을 견제하고 신권을 강화시키려고 한다. 신하들 입장에서는 강력한 왕이 나오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런 신하들이라면 왕릉을 명당에 쓸 리 만무하다.

조선왕조의 왕릉은 모두 44개다. 1392년에 건국하여 1910년 일제강점으로 망할 때까지 518년 동안 왕은 27명이었다. 왕릉은 왕과 왕비, 그리고 사도세자처럼 추존된 왕과 왕비의 무덤을 말한다. 연산군이나 광해군처럼 폐위 당한 임금의 경우는 묘라고 하지만 문화재청에서는 모두 왕릉에 포함하고 있다. 왕릉 중 제1대 태조의 정비인 신의황후 한씨의 제릉과 제2대 정종의 후릉은 북한 개성에 있고 나머지 42개는 남한에 있다. 이중 풍수지리적으로 길지라고 할 수 있는 왕릉은 4개 밖에 되지 않는다. 태조의 건원릉(구리시 동구릉 내), 태종의 헌릉(서울 내곡동), 세종의 영릉(여주시), 세조의 광릉(남양주시)이다. 나머지들은 보통이거나 보통수준을 넘지 못한다.

그렇다고 산세가 나쁜 것은 아니다. 왕릉이 있는 곳은 풍수의 기본적인 조건을 잘 갖춘 곳이 많다. 즉 배산임수 지형에다 청룡과 백호가 겹겹으로 감싸고 있다. 그러나 자세히 살피면 용맥이 약하거나 연결 안 된 곳이 많다. 용맥이란 땅의 생기를 전달하는 산줄기를 말한다. 전기에 비유하자면 전기 줄과 같다. 아무리 좋은 가전제품이 있다하더라도 전기가 연결되지 않으면 무용지물이 된다. 마찬가지로 용맥이 연결되지 않으면 비록 왕릉이더라도 좋다고 볼 수가 없다. 용맥의 변화가 활발하면 기세가 있는 것으로 대혈을 맺게 된다. 그런데 중기 이후 왕릉들 대부분은 용맥이 힘이 없거나 연결되지 않았다.

풍수를 모르고 한 일은 아닐 것이다. 풍수를 잘 알면서 이를 의도적으로 나쁘게 한 것으로 밖에 볼 수 없다. 그 대표적인 곳이 화성에 있는 사도세자의 융릉과 정조의 건릉이다. 특히 융릉은 왕권과 신권이 첨예하게 대립한 시기에 조성된 것이어서 교묘함이 더 잘 나타나고 있다. 건릉은 정조가 원했던 장소가 아니다. 정조는 죽어서도 아버지 곁에 묻히기를 원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융릉 동쪽 두 번째 언덕에 안장되었다. 그런데 풍수상 길지가 아니라는 논쟁이 일더니 융릉 서쪽으로 이장하여 효의왕후와 합장하였다.

역대 왕 중에서 정조만큼 풍수에 관심 많은 왕도 드물 것이다. 정조실록을 보면 지관 못지않은 풍수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왕이 지관을 시키면 되지 왜 직접 공부를 해야만 했을까? 신하들의 농단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으로 짐작한다. 정조가 죽은 뒤 11살의 순조가 즉위하였다. 그러자 정조를 오랫동안 적대시하였던 벽파의 영조비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시작하였다. 정조를 도왔던 남인세력들을 모두 축출하고 국정을 농단하였다. 이후 외척인 안동김씨의 세도정치가 시작된다. 그들 입장에서 왕은 허수아비에 불과하였다. 왕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서 그들이 취했던 행위 중에 하나가 왕릉을 조작했을 것이라는 의구심이 든다. 그러나 심증은 가지만 물증이 없는 상태다. 그들이 기록을 남겼을 리 없기 때문이다.

왕릉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능의 출입은 금지된 것이 많다. 그러나 학술 목적으로 미리 문화재청 고객지원센터에 신청하여 허가를 받으면 들어갈 수 있다. 이 경우 반드시 묘역 뒤로 가서 용맥을 살펴보기 바란다. 융릉과 건릉의 경우 현무봉에서 묘역까지는 용맥이 잘 내려온다. 그러나 능은 용맥을 벗어난 곳에 있음을 알 수 있다. 혹 남양주시 금곡동에 위치한 고종과 순종의 홍·유릉을 답사할 경우가 있으면 용맥을 꼭 확인해보기 바란다. 융릉과 건릉은 교묘하다면 홍릉과 유릉은 아예 노골적이다. 홍릉은 정맥을 벗어난 곳에 있다. 유릉은 삼대를 못가서 절손된다고 하는 과룡처에 위치한다.

왕의 권력이 강했던 조선 초기 왕릉들은 대개가 좋은 곳에 조성되었다. 그러나 후기로 오면서 왕릉들은 좋지 않다. 신하들의 농단으로 조선왕조의 멸망과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작금의 국정농단 사태가 그때와 비슷한 것 같다. 까닥 잘못하면 대한민국이 망하지 않을까 걱정이 든다.

형산 정경연 인하대학교 정책대학원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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