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년은 정유년이다. 정유년하면 임진난에 이어 또다시 정유년에 일으킨 2차 왜란(倭亂)을 생각나게 하는 해다. 임진왜란은 1592년(선조25년) 4월에 일어났고 정유재란은 1597년(선조30년)1월의 일이다. 1차 때에는 20만명의 군대가 고니시(小西行長)와 가토(加藤淸正)등을 침략의 선봉에 세워 쳐들어 왔고 2차 때에는 15만의 군대로 쳐들어 왔다. 그리고 이 모든 전쟁이 끝난 것은 풍신수길의 죽음(1598년 8월)과 함께 일본군의 철수가 시작되면서부터 마지막 노량해전(1598년 11월)에서 충무공 이순신에 의해 최후의 일격을 당할 때까지 장장 7년여 동안 지속되었다.

그러나 이 7년동안 전투만 한 것은 아니었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당쟁속에서 왜군의 침략을 당한 조선 정부는 왜군의 부산 상륙 18일만에 서울을 유린당하고 왕은 의주로 피난하는 곤경에 처했다. 상륙 두 달밖에 안 된 그해 6월에는 왜군이 평양과 함경도까지 진격하고 왕자를 포로로 하였다. 그러나 육지와는 달리 바다에서는 충무공 이순신이 1592년 5월부터 옥포해전에서 대승하기 시작하여 왜군의 후방을 교란시켜 나갔다.

1593년 1월 이여송이 거느린 5만명의 명나라 지원군이 조선에 도착하자 전쟁은 일본과 조·명(朝·明)연합군간의 전쟁으로 확대되었다. 그러는 사이 평양전투와 벽제관전투에 이어 임란의 3대 승리로 꼽히는 1592년8월 이순신의 한산대첩과 1592년10월 김시민의 진주대첩 그리고 1593년 2월 권율의 행주대첩과 같은 전적을 올리게 되었다. 예기가 꺾인 왜군이 휴전을 제기하자 명나라도 이를 받아드렸다. 이때부터 2차침략이 있을 때 까지 4년간은 전투가 없는 상태에서 일본은 명과의 화의에 매달려 있었다. 그리고 이 화의가 실패로 끝나자 왜는 2차침략을 감행 하였다. 이것이 1597년의 정유재란이다.

여기서 우리는 명·일간에 있었던 화의의 내용이 무엇인가를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바로 조선에 대한 명·일간의 분할음모가 진행되었다는 점이다.

일본은 조선 모르게 7개항에 이르는 강화조건을 명나라 앞에 제시하였다(송복).

1) 대명 황제의 현숙한 여(女)를 일본의 후비로 삼는다.

2) 감합무역(勘合貿易:조공무역)을 복구하며 관선과 상선의 왕래가 있도록 한다.

3) 명과 일본의 대신들이 화의를 위해 서로 서약서를 교환한다.

4) 조선 8도를 나누고 그중 4도와 수도는 국왕에게 돌려준다

5) 조선 왕자와 대신이 인질로 와야 한다.

6) 생포한 조선의 두 왕자를 돌려보낸다.

7) 조선은 배반하지 않는다는 서약문을 쓴다.

일본은 조선 8도중에 4도를 일본에 할애하라고 요구하는 것이었다(4항). 말하자면 명을 칠테니 길을 빌려달라는 소위 정명가도(征明假道)는 허울일 뿐 사실은 한반도에 대한 분할점령이 속셈이었던 셈이다. 명 역시 죽기 살기로 싸우기 보다는 적당히 싸우면서 실리를 챙기고 싶은 생각이 고개를 내밀었다.

명 조정에서는 임란이후 줄곧 패전만 하는 조선의 상황을 보고 불가피하게 분할역치(分割易置) 할 수밖에 없다는 논의를 한 것이다. “조선이 이미 왜적을 막지 못하여 중국에 걱정을 끼쳤으니 마땅히 그 나라를 분할하여 두셋으로 나누고, 왜적을 막아내는 실적을 보아 나라를 맡게 함으로써 중국의 울타리가 되게 하자”는 것으로 조선을 분할하여 통치하고 임금을 바꾸자(易置)는 것이었다(류영하). 그러나 이런 논의의 황당함을 주장하는 조선 중신들의 설득으로 분할역치론이 겨우 잠잠해질 무렵에는 직할통치론이 또다시 고개를 들었다. 중국 하북성과 요동지역의 총독인 손광으로부터 제기된 것이다. 과거 원나라가 했듯이 정동행성(征東行省)을 설치해서 명에서 파견한 순무사가 왕과 신료들을 행성에 소속시켜 관리하고 조세징수권을 갖자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것도 중국정부의 정책으로까지 진전되지는 않았다.

송복교수는 “실로 임진왜란은 조선 분할전쟁이었다”고 하면서 그것은 실패한 전쟁이었다고 단언하고 있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필자는 최근세 일본의 정한론(征韓論)이 언제든지 재론될 것이라는 의구심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지진과 태풍과 쓰나미가 일본 열도를 덮치는 한 비교적 안전지대라고 할 수 있는 한반도에 대한 탐욕을 일본은 버리지 않을 것으로 믿고 있기 때문이다.

김중위 전 환경부장관

저작권자 © 중부일보 - 경기·인천의 든든한 친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