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동아시아 문명 질서의 도래

조선 후기 실학은 ‘개혁’과 ‘개방’을 요구하는 시대 요청에 부응한 학문이었다. 실학은 소중화 주의라는 낡은 시대의 자폐적인 정신 상황을 반성하고 국가의 총체적 개혁을 도모하는 것을 학문의 사명으로 삼았다. 17세기 중엽 명·청 교체에 따른 화이(華夷) 질서의 해체는 그 신호탄이었다.

병자호란 후, 조선은 강대국인 청나라에 대해 겉으로는 사대외교를 할 수 밖에 없었지만, 속으로는 야만국 오랑캐로 여기며 중화의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18세기에 들어와 이러한 생각들이 점차 변화해 “예(禮)의 질서를 이루면 어느 나라나 중화가 될 수 있다”고 한 성호 이익과 같이 중화주의에서 벗어난 생각들이 조금씩 나오기 시작했다. “중국은 중국이고, 조선은 조선일 뿐”이라는 성호의 생각은 중국 중심에서 벗어나 조선 문화의 독자적 가치에 대한 자각이기도 했다. 이어서 청은 결코 오랑캐가 아니며 오히려 훌륭한 문명사회를 이루고 있으므로 청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배워야 한다는 논의가 18세기 후반 진보적인 지식인 사이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화이론의 변화와 함께 17세기 이후 ‘서학’으로 명명되는 서양문물과 천주교는 조선의 선각적 지식인 사이에서 하나의 유행이었다. 예컨대 마테오 리치나 아담 샬 등 명말청초에 중국에 들어온 예수회 선교사들은 천주교 외에도 유럽의 과학을 한문으로 번역해 중국에 소개하면서 동아시아에 ‘서양문물’의 붐을 일으켰다.



실학의 탄생지, 경기도

경기도는 17세기 이후 시작된 동아시아의 새로운 문명 질서에 가장 큰 세례를 받은 지역이다. 특히 조선 후기 한국 유학의 새로운 학풍인 실학은 17세기 이후 시작된 동아시아의 새로운 문명 질서 속에서 탄생했고 그 중심지가 경기였다.

17세기 중반에 서서히 형성되기 시작한 실학적 학풍은 18세기 접어들면서 본격적으로 전개돼 학문적 혹은 지역에 따라 그 특징을 파악할 수 있을 정도로 발전했다. 경기 지역을 중심으로 태동한 근기 실학은 토지제도 및 국가 제도 개혁을 중심으로 조선사회를 변혁시키고자 하는 학풍으로, 성호 이익을 중심으로 한 남인(南人) 출신의 학자들을 중심으로 성립했다.

성호 이익을 종주로 해 성호학파를 이룬 남인계 실학자들은 조선 후기 농업 생산력 발전과 이에 따른 토지 소유 문제를 농민의 처지에서 해결하고자 했다. 때문에 토지 제도와 조세 제도, 신분 제도, 관리 선발과 임용, 중앙과 지방의 행정 체계 등에 대한 개혁론이 무엇보다 중요하게 다뤄졌다.

근기 실학자들은 서울과 가까운 경기도 농촌에서 생활한 덕분에 도시 양반들과 달리 농민들의 고통이 무엇인지, 어떻게 해야 농민들의 생활이 안정될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반면, 중국 연행을 통해 이용후생적 학문 경향을 보인 서울 출신의 실학자들인 홍대용과 박지원, 박제가 등은 성호학파를 중심으로 한 근기 지역 실학자들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 성호선생 사당
반계 유형원과 성호 이익

근기 실학의 종주인 성호 이익은 퇴계 이황을 존경하며 그의 계승자임을 자임했으나, 실학적 학풍은 혈연과 학문적 배경이 긴밀했던 반계 유형원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다. 반계 유형원은 외숙부 이원진의 집에서 태어나 고모부인 김세렴으로부터 학문을 배웠는데 이원진은 성호 이익의 백부였다. 따라서 반계와 성호는 내외 종간 사이였다.

성호 이익은 여주 이씨 가문의 외손계인 반계 유형원을 일생 동안 사모하고 존경해 “국조 이래로 시무를 알았던 분을 손꼽아 봐도 오직 이율곡과 유반계 두 분이 있을 뿐이다. 율곡의 주장은 태반이 시행할 만하고, 반계의 주장은 그 근원을 궁구하고 일체를 새롭게 해 왕정의 시초를 삼으려 했으니, 그 뜻은 진실로 컸다.”고 해 반계 유형원의 국가정책론을 높이 평가했다.

반계 유형원이 제시한 국가정책이 하나도 시행되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한 성호 이익은 그 뜻을 이어받아 ‘곽우록(藿憂錄)’이라는 국가정책 제안서를 썼다. 반계 유형원은 “나쁜 제도가 나쁘게 된 것은 그 원인이 몇 천 년 전부터 쌓인 것으로서 그 원인을 구명해 제거하지 않고는 바로잡을 수가 없다.”고 해 제도 개혁이 우선돼야 함을 강조한 바 있다. 성호 이익은 곽우록에서 “법이 오래되면 폐단이 생기고 폐단이 있으면 고쳐야 함은 당연하다.”라고 해 반계 유형원의 제도 개혁론을 계승했다.

반계 유형원을 경세치용학의 선구자로 바라보는 성호 이익의 인식은 제자인 순암 안정복에게로 이어졌다. 순암 안정복은 “내가 어려서부터 유반계 선생이 대덕 군자라는 말을 들었지만, 그때는 아는 것이 없어 상세한 내용을 들을 수가 없었으므로 장성한 뒤에 생각하고는 늘 깊이 부끄럽고 한스럽게 여겼다.”고 고백하며 존경심을 표했다.

순암 안정복은 64세가 되던 1774년에 가서야 반계의 증손인 유발을 서울의 도저동에서 만나 ‘반계수록’을 비롯한 여러 저술들을 빌려서 읽게 됐고 이후, “반계 학문의 정밀함과 도량의 원대함은 후세의 말 잘하는 선비들이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었다.”고 평했다. 안정복은 이듬해인 1775년에 유발과의 인연으로 ‘반계연보발(磻溪年譜跋)’을 썼고 유발의 행장도 지었다.



▲ 곤여만국전도
반계-성호-다산으로 이어지는 근기실학의 계보

일찍이 위당 정인보가 조선 후기 실학의 계보를 “반계가 일조(一祖)요, 성호가 이조요, 다산이 삼조이다”라고 정리한 이래로 반계-성호-다산은 조선 후기 실학 계보의 주축으로 인정돼 왔다. 경기도에는 조선 후기 실학의 계보를 잇는 이들 위인들의 묘가 모두 자리해 있다. 경기도 용인시에 반계 유형원의 묘가 있고, 안산시에 성호 이익의 묘가, 광주시에 순암 안정복, 남양주에 다산 정약용의 묘가 있다.

반계 유형원은 실학의 개창한 인물이고 성호 이익은 실학을 체계화했으며, 다산 정약용은 실학을 집대성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이들 세 사람은 정치적으로 모두 남인 출신이었으며, 근기 즉 현재 경기도와 연고가 있는 인물이다. 때문에 조선 후기 실학을 근기 지역에 삶의 터전이 있었던 남인 학자들을 중심으로 성립된 것으로 이해돼, 근기 남인 학인을 중심으로 성립한 근기 실학이 조선 후기 실학을 대표하기도 했다.

근기 실학의 종주인 성호 이익은 퇴계학을 계승한 성리학자이지만, 미수 허목과 반계 유형원으로부터도 영향을 받아 새로운 학문체계를 이루었다. 미수 허목이 퇴계 이황과 한강 정구의 학문을 이어 근기 지역 학술의 발판을 개척했다면, 미수 허목의 영향을 받아 실학이라는 학문의 토대를 마련했던 학자는 반계 유형원이었다. 다시 말해 허목과 연결돼 있던 반계 유형원의 실학사상이 성호 이익을 통해 이어졌고 그것이 다시 성호 제자들을 통해 경기도 일대에 퍼져 근기학파를 형성한 것이다.

성호 이익은 퇴계학을 계승하면서도 현실 문제에 관심을 갖고 중국으로부터 들어오는 서학을 가미하고 반계 유형원의 경세론을 적극 수용해 근기실학을 대표하는 성호학을 완성시켰다. 성호 이익이 반계 유형원과 연결고리를 맺게 된 것은 정치적으로 남인계였다는 공통점 외에도 혈연 및 학문적으로도 유대가 깊은 사이였다.

성호 이익에 이어 다산 정약용 또한 자신의 저술에서 반계 유형원의 글을 많이 인용했다. 다산 정약용은 “세상을 다스릴 진지한 뜻을 유일하게 반계 선생에게서 발견했다”고 고백했다. 다산은 성호가 남긴 글을 모두 탐독했고 성호 선생이 남긴 글을 발간할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고 여겼다. 성호학의 계승자로 자임한 것이다.

성호 이익의 실학사상을 계승한 다산 정약용은 자신의 저서 곳곳에서 반계 유형원과 성호 이익에 대한 언급을 했고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여가가 있을 때 반드시 읽어야 할 책으로 ‘반계수록’과 ‘성호사설’을 거명했다. 성호 이익이 반계 유형원의 경세적 학문 경향을 수용하면서 근기 남인의 학문 경향은 실학적 양상으로 전개됐고 이는 다산 정약용까지 연결돼 이른바 근기 실학을 탄생시킨 것이다.

정성희 실학박물관 책임학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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