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류인플루엔자(AI)와 구제역이 잇따라 발생해 방역에 비상이 걸렸다. 사상 처음으로 서로 다른 2개 유형의 구제역 바이러스가 발생하면서 구제역 공포는 커져만 가고 있다. 소와 돼지의 살처분과 매몰지 주변의 침출수 유출 공포를 몰고 온 2010년 구제역 공포가 대한민국을 휩쓸고 있다. 이번의 구제역이 예사롭지 않은 것은 확산 속도가 빠를뿐더러 사상 처음으로 ‘O형’과 ‘A형’이 동시에 발생했기 때문이다. 지난 8일 구제역 의심 신고가 들어온 경기 연천 소재 젖소 사육농장이 혈청형 ‘A형’ 구제역으로 확진됐다고 농림축산식품부가 확인했다. 지난 5일과 6일 구제역이 발생한 보은 젖소농장과 정읍 한우 농가의 혈청형은 ‘O형’이었다. 서로 다른 두 가지 유형의 구제역이 동시에 발생한 사례는 처음이다. 구제역 발생 지역이 경기 연천과 충북 보은, 전북 정읍으로 광범위한 데다 A형과 O형이 동시에 발생하는 방역 비상상황이 생긴 것이다. 특히 A형 구제역의 경우는 지난 2010년 포천ㆍ연천 소 농가에서 6건 발생한 사례가 유일하기 때문에 보유 중인 백신의 방어 효과가 확인되지 않은 상태라고 한다. 당국은 그동안 O형 바이러스 구제역 예방에만 초점을 뒀던 터라 소에게 접종하는 ‘O+A형’ 백신 물량을 충분히 확보하지 못한 상태이다. O+A형 백신 비축 물량이 190만 마리분에 그쳐 당국이 목표로 하는 283만 마리 일제 접종에는 훨씬 못 미친다. 더욱이 만일에라도 전염성이 강한 돼지에서 구제역이 발생한다면 그야말로 설상가상이 될 수 있다.

이번 구제역 발생은 당국과 축산농가가 7년 전 있었던 구제역 대재앙에서 전혀 교훈을 얻지 못했음을 거듭 확인해 주었다. 구제역 대재앙 당시에는 전국 75개 시·군 축산농가 6천여 곳에서 구제역이 발생했다. 당시 돼지 331만여 마리, 소 15만여 마리가 살처분 후 매몰됐다. 직접적인 예산만 2조7천억 원이 투입됐다. 축산물 소비 감소, 가격 상승 등 파급 효과를 고려하면 피해 규모는 훨씬 더 컸다. 살처분 가축 매몰지의 침출수 때문에 지하수가 오염되는 등 심각한 환경오염 문제까지 낳았다. 정부와 축산업계는 구제역 대재앙의 교훈을 절대로 잊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결국 공염불로 끝났음이 이번에 확인됐다. 이번 구제역 발생 역시 예방 백신 접종 제도가 제대로 먹혀들지 않았음을 여실히 보여줬다. 축산농가의 도덕적 해이는 사태를 키우는 단초를 제공했다.

하지만 더 중요한 문제는 구제역 발생 후 17년째 제자리걸음을 걷고 있는 축산농가의 현실이다. A4 용지 한 장 크기도 되지 않는 케이지 속에서 옴짝달싹 하지 못하는 닭과 철제 감금 틀에 갇혀 출산을 반복하는 돼지, 평생 비좁은 축사 안을 맴돌며 우유를 생산하는 젖소. 이 시스템에서 동물 전염병을 막을 수 없다고 현장에서는 입을 모은다. 철저한 예방과 아무리 강력한 초동대응 시스템을 갖춘다고 해도 현 상황에서는 바이러스가 침투하면 방어할 능력이 없다. 생산성을 좇는 가축의 밀실 사육 방식에 대한 대대적인 전환이 필요하다. 효용성에만 집착해 마치 거대한 공장처럼 운영되는 밀식 사육 방식으로는 한계가 있다. 열악한 조건에서 자란 소와 돼지, 닭들은 내성이 약해져 전염병이 유입되면 삽시간에 번진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적인 의견이다. 오로지 생산성만을 추구하는 밀식축산은 공산품을 만드는 제조업과 별반 차이가 없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미 해외에서는 축산업 판이 바뀐 지 오래다. 세계는 이미 생물다양성과 산림 보전 등 생태복지를 추구하고 있다. 닭의 케이지 사육이나 어미돼지의 스톨 사육은 유럽에선 이미 오래전부터 법으로 금지된 사육방식이다. 영국의 경우 1980년대 광우병과 구제역 파동을 겪으며 동물 복지농장이 대안으로 대두했다. 밀식 사육이 전염병 확산에 상당한 악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체득한 셈이다. 우리나라도 2012년 ‘동물 복지 인증제도’를 도입하기는 했지만 아직 걸음마 수준이다. 정부지원책이 없는 것이 가장 큰 원인으로 손꼽힌다.

구제역이 재발하지 않도록, 또 천문학적인 경제적 피해를 입지 않을 수 있는 시스템 도입이 필요하다. 17년 구제역 공포에서 벗어날 때가 됐다. 백화점식으로 각종 대책만 나열해 놓고 나중에 제대로 시행되지 않는 일이 되풀이돼서는 안 된다. 심각하게 현대화 추진을 고민해 볼 때다.

엄득호 정치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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