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차 산업혁명이 매스컴에 회자되기 시작하면서 바야흐로 과학기술과 전혀 무관한 사람들도 인공지능(AI)이니 빅데이터니 사물인터넷(IoT)니 하는 낱말에 익숙해지고 있다. 과거 1, 2, 3차 산업혁명은 후세 사가(史家)들이 ‘혁명’이라 칭하지만, 기실 하루아침에 온 것은 아니었다. 수천 년의 인류 역사를 기준으로 보면 상대적으로 아주 짧지만 실제로는 한 세대 이상에 걸쳐 일어났다. 단순히 기술만이 아니라 거의 모든 분야에서 패러다임을 바꾸어 놓았기 때문에 혁명이라 불렀을 뿐이다. 4차 산업혁명도 마찬가지다. 이미 전조는 오래전부터 있었고 이제 그 변화의 기울기가 점점 급격해져가고 있는 중이다.

우리는 길거리에서 어떤 사람의 얼굴을 보거나 말하는 모습, 체격, 걸음걸이를 보면 그 사람이 내가 알고 있던 사람들 중에 누구인지 판별해내곤 한다. 그리고선 반갑게 인사를 건넨다. 그러나 부분적인 특징만으로는 잘못 짚는 경우가 발생한다. 체격이나 걸음걸이가 너무 닮아서 다른 사람과 착각하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4차 산업혁명은 개별 기술이나 분야로 인식하기보다는 총체적 본질을 파악함으로써 이해해야 한다. 인공지능이나 빅데이터가 주목받는 개별 분야일수는 있으나, 그것만으로 4차 산업혁명을 파악하면 오류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

4차 산업혁명의 본질을 가장 잘 표현하는 낱말로 ‘초연결사회’를 들 수 있다. 지금까지 연결이라 하면 어떤 주체와 다른 주체 사이의 소통이라고 이해되어왔지만, 따지고 보면 그런 의미의 연결은 각각의 주체를 우선하는 개념이지 그들 사이의 관계에 초점을 두지는 않는다. 예컨대, 3차 산업혁명을 통해 컴퓨터가 발전하고 그들을 연결하는 인터넷이 출현했지만 여전히 인터넷은 통신 수단일 뿐 정보의 처리와 실행의 주체는 개별 컴퓨터이다. 그렇기에 더 성능이 뛰어난 컴퓨터와 더 빠른 통신 속도가 경쟁 대상이었다. 그러나 연결이 훨씬 더 많아지고 복잡해지면서 급기야 연결은 주체들 간의 단순한 정보 교환 이상의 의미를 지니기 시작하고 있다. 연결을 넘어 ‘관계’로 진화하고 있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이러한 진화의 방향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인간의 뇌 안을 들여다보면 이미 비슷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인간의 뇌 안에는 천억 개 이상의 뉴런이라는 신경세포가 있고 그들은 10조 개 이상의 시냅스라는 접속 부위를 통해 서로 무수한 특정 관계를 맺고 있다. MIT의 승현준 교수는 그의 저서 ‘커넥톰(Connectome)’에서 인간의 인지활동은 뇌 내부의 뉴런들 각각이 역할을 분담하여 수행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뉴런들 사이의 ‘연결’ 자체가 하나의 패턴이 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오늘날 인공지능이라 부르는 것도 인간의 신경 네트워크를 본떠 수십 년 전부터 연구되어온 인공신경망 알고리즘이 발전한 형태이다.

초연결사회의 원형은 동양 철학에서도 발견된다. 고(故) 신영복 선생은 공자(孔子)가 바라본 인간에 대해 강의하면서 존재론적 사고에서 관계론적 사고로의 이행이 필요하다고 설파하였다. 붓다는 인간이란 항상 변하고 있는 요소들의 묶음(法) 자체로서 오로지 현상적인 존재일 뿐이라고 말했다. 그의 제법무아(諸法無我) 철학은 인간이 나(atman)라는 불변의 실체가 있다고 착각하며 산다는 점을 통렬히 지적하면서 자연의 기본 원리는 관계 그 자체이며 쉼 없이 변화하는 자연의 특질이라고 주장한다. 요컨대, 사람 몸뚱이의 생물학적인 미시 구조 뿐만 아니라 인간 사회라는 거시 구조에서도 네트워크 자체가 주체이자 객체라는 유사성이 발견된다.

새벽이 오는 것을 미룰 수 없듯 4차 산업혁명은 필연이다. 대책 없이 외면하거나 요란하게 떠들기만 할 것이 아니라 차근차근 내실 있게 대처해야 할 도전이다. 그러자면, 전문가는 전문가대로 일반인은 일반인대로 분야별 직역별 경계를 넘어 과거에 없던 것들을 상상하는데 익숙해져야 한다. 과학기술이라는 외피가 혁신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역설적이게도 정치, 경제, 문화, 법률 등 비과학기술 분야의 혁신이 필수적인 이유다. 깊이 없는 이해로는 어림없다.

삶의 고단함에 아우성치는 장삼이사(張三李四)에게 던지는 대증 요법을 탓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근원적인 해결책이 빠진 미봉책은 죄악이다. 얼마 되지 않는 전문가 집단만이라도 시류에 부화뇌동하지 말고 깊이를 더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을 우리 사회의 지속 가능한 미래를 준비하는데 집중할 수 있도록 지켜주어야 한다. 우리의 노후와 다음 세대의 명운이 걸린 일이다.

정택동 서울대 교수, 융기원 부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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