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중·후기 -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3) 후금(청)의 성장 속에서 명을 선택한 조선이 치러야 했던 전쟁

▲ 남한산성 남문-인조가 수구문으로 도성을 빠져 나와 이곳을 통해 남한산성으로 들어왔다.
17세기 전반 동아시아는 커다란 변혁에 휩싸였다. 1234년 금(金)이 멸망한 이후 오랫동안 북쪽 변방에서 떠돌던 여진족이 다시 흥기하면서 명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질서는 균열됐다. 급기야 그 여파는 중국 대륙에 머물지 않고 한반도까지 미쳤다.

동아시아에서 명의 패권이 흔들리면서 조선은 후금(청)과 조우했고 생존을 위해 새로운 국가전략이 필요했다. 병자호란은 바로 이런 와중에 발발한 전쟁으로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47일간 항전하다가 결국 성을 나와 청 태종에게 항복했다. 왕조 역사에서 처음 겪는 큰 굴욕이었다.



여진족, 후금, 만주족, 청

병자호란은 조선과 청의 전쟁이었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조선을 비롯해 명·청·몽골이라는 동아시아 국가들의 각축 속에서 발생한 전쟁이었다.

백두산 북서 방면에서 발흥한 건주 여진은 1589년부터 급속한 성장을 보이면서 중국 동북지방의 여진 부족을 차례로 통합했다. 누루하치는 1616년에 후금을 세우고 왕위에 올랐으며 1618년에는 무순·청하 등 명나라 변경 요새를 점령했다. 위기감을 느낀 명은 원정군 10만으로 후금을 공격했으나 결과는 참패였다. 사르호 전투(심하 전투)로 불리는 이 싸움에서 큰 타격을 입은 명은 내리막을 걸었고 나중에 중원을 청에게 내주는 전환점이 되고 말았다.

1626년 누루하치가 죽자 그 뒤를 이어 홍타이지가 즉위했다. 1635년 홍타이지는 명과 연합해 후금에 대항하던 몽골을 완전히 복속시켰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민족 명을 ‘만주’로 바꾸고 이듬해인 1636년 4월에 국호를 ‘청’으로 고치면서 황제에 올랐다. 변방의 나라에서 ‘황제국’이 탄생한 것이다.

태종 홍타이지는 사르후 전투 이후 줄곧 조선 정벌을 주장한 주전론자였다. 두 번의 호란 모두 홍타이지가 일으킨 전쟁이었다. 홍타이지가 즉위한 이듬해에 정묘호란을 일으키고 청으로 국호를 바꾸자마자 조선을 재침한 것은 궁극적으로 만주와 중국대륙을 차지해 동아시아 패권국이 되기 위한 구도였다.



정묘호란과 형제 나라

호시탐탐 조선을 엿보던 후금에게 침략의 빌미가 생겼다. 바로 조선이 명 장수 모문룡을 지원한 일이었다. 모문룡은 후금이 1621년 요양을 함락시키자 군사를 이끌고 평안도 의주로 탈출해 왔다가 가도로 들어갔다. 조선 조정은 모문룡 군에게 식량과 각종 물자를 지급했고 결국 이것이 침략의 빌미를 제공했다.

후금은 중국 본토를 침략할 때 모문룡 군이 조선과 합세해 배후를 칠 수도 있다고 판단해 1627년에 군사 3만으로 조선을 침략했다. 이것이 정묘호란으로 1627년 1월 13일 의주성 공격을 시작으로 3월 3일 강화를 맺기까지 1개월 반 정도 치른 전쟁이었다. 후금이 내세운 침략 원인은 명을 도와 후금을 침공한 일, 모문룡을 감싸준 일, 누루하치가 사망했는데도 한 사람도 오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조선은 후금군의 공격에 속수무책이었다. 25일에 황주 방어선이 무너지자 인조는 도성을 떠나 강화도로 피신했다. 후금군은 유리한 조건으로 전쟁을 종결짓고자 화의를 먼저 제의했다. 조선은 처음에 화의를 거절했으나 전세가 악화되자 화의하기로 결정해 강화가 성립됐다. 강화 조건의 첫 번째가 “명과 관계를 단절하지 않되 그 연호는 사용하지 않으며, 조선과 후금은 형제 나라의 맹약을 맺는다.”는 것이었다.



다시 병자호란이 일어나다

홍타이지는 1636년에 황제 자리에 오르자 조선에 신하의 예를 요구했다. 그러자 조선에서는 후금과 국교를 단절해야 한다는 강경론이 힘을 얻어 결국 국교 단절을 선언해버리고 말았다.

청은 조선이 강경하게 반발하자 다시 침략했다. 병자호란이었다. 1636년 12월 9일에 청군 13만여 명은 압록강을 건너 조선을 쳐들어왔다. 청군은 파죽지세로 14일에 홍제원에 도착했고 그 일부가 강화도로 가는 길을 선제 차단하면서 서울로 진격했다. 정묘호란 때와 달리 서울이 위협당하는 상황에서 인조는 12월 14일 밤에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다음날 새벽에 인조는 강화도로 가기 위해 나섰다. 하지만 깊게 쌓인 눈 때문에 운신조차 할 수 없자 포기하고 돌아왔다. 이때부터 인조는 1637년 1월 30일 출성할 때까지 남한산성에서 농성했다. 당시 남한산성의 군사 수는 대략 1만 3천 명 정도로 청군의 10분의 1에도 못 미치는 규모였다. 식량사정도 좋지 못해 한 달 이상 버티기도 힘든 상태였다.



▲ 남한산성 행궁 외행전-병장호란때에 인조가 이곳에서 음식을 차려 군사들을 위로했다.
남한산성 망월봉에서 홍이포를 쏘아대다


조선군은 남한산성을 사이에 두고 청군과 안팎에서 크고 작은 전투를 벌였다. 18일에는 출성해 순찰 중이던 적을 급습해 6명을 죽였다. 19일에는 포수들이 나가 적 10여 명을, 21일에는 어영군이 적 10여 명을, 22일에는 어영군과 훈련도감군이 40여 명을 죽이는 전과를 올렸다. 하지만 28일에 북문에서 청군의 기만전술에 속아 3백여 명의 정예병을 잃고 난 후 사기가 급속히 저하됐다.

이런 가운데 12월 29일에 청 태종이 도성에 당도해 남한산성 주변에 병력을 배치했다. 그리고 인조의 출성 항복을 유도하기 위해 산성을 압박했다. 1637년 1월 19일 이후로 청군은 망월봉 등에 홍이포를 설치해 행궁을 향해 끊임없이 쏘아댔다. 청군이 대규모 공성 시도를 하지 않고 인조의 출성을 기다린 이유는 “왕(인조)이 진심으로 기뻐하며 복종하는지를 보려 하기” 때문이었다. 관용을 베풀어 황제국의 면모를 보여주기 위한 청의 의도였다.

청의 압박이 거세지는 가운데 남한산성에서는 전쟁이냐 강화냐를 놓고 격렬한 논쟁이 일었다. 청군과 화의를 주장한 대표적인 사람은 최명길이며 끝까지 싸워야 한다고 주장한 대표적인 사람은 김상헌이었다.

최명길은 이미 정묘호란 때에 후금군과 화의를 이끌어냈으며 이때에도 강력하게 화의를 주장해 강화 협상을 전담하다시피 했다. 김상헌은 식음을 전폐하면서 강화 협상을 반대했고 급기야 최명길이 지은 항복 국서를 찢어버렸다. 그러자 최명길은 “대감은 찢으시지만 나는 이것을 도로 주워야겠습니다.”고 하면서 종이를 다시 주워 모아 풀로 붙였다.

이런 상황에서 1월 19일 강화도가 함락되자 인조는 강화 쪽으로 기울었다. 여기에는 군심 이반도 한몫했다. 장교와 군사 수 백 명이 인조가 머무는 처소까지 와서 더 이상 산성을 지킬 수 없다면서 시위를 벌였기 때문이다. 대신들이 나서 회유했지만 소용없었고 1월 26일까지 계속됐다. 더 이상 버티기가 어렵다고 판단한 인조는 출성을 결정했다.


▲ 삼전도비. 사진=한국학중앙연구원

병자호란이 남긴 상흔

1637년 1월 30일, 인조는 소현세자와 함께 남한산성 서문으로 나왔다. 그리고 삼전도(지금의 송파)로 가서 청 태종의 발아래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치욕적인 항복의 예를 행하고 신하가 되겠다는 맹세를 한 후 환도했다.

조선인들은 오랑캐로 여긴 청의 무력에 굴복하면서 큰 상처를 받았다. 임진왜란 역시 이적시하던 일본에 침략을 당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때는 초반 열세를 제외하고 의병·수군 등의 활약으로 일본군을 조선 땅에서 내몰았다는 긍지가 있었다. 그런데 병자호란은 달랐다. 인조의 항복은 국왕과 조정의 모든 신료 그리고 민들이 청 임금의 신하가 됐음을 의미했다.

전쟁이 남긴 상흔은 참혹했다. 병자호란은 청이 중원을 차지하는 과정에서 일으킨 전쟁이어서 단기간에 조선을 굴복시키고자 했다. 그래서 전쟁 양상은 과격하고 흉포했다. 국토는 무참히 유린당하고 민은 처참한 피해를 당했다. 조선의 위정자들이 변화하는 국제 정세의 흐름을 도외시하고 명나라만 고수한 결과였다.


정해은 한국학중앙연구원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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