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중·후기 - (4)‘호호부실(戶戶富實), 인인화락 (人人和樂)의 신도시’ 화성

▲ 팔달문(八達門) - 정조는 수원화성에 행차하면 직접 성곽을 한 바퀴 돌아보고 팔달문 문루에 올라 잠시 쉬어가며 백성들의 삶터를 살폈다.
조선 중·후기-4.수원 화성은 ‘호호부실(戶戶富實), 인인화락 (人人和樂)의 신도시’


1797년 음력 1월29일, 정조는 지난해 완공된 수원 화성을 둘러보기 위해 아직 겨울 찬바람이 가시지 않은 수원으로 행차했다. 화성의 북문인 장안문을 통과한 어가행렬은 화성행궁에 잠시 머물렀다가 바로 팔달산 위로 이어졌다. 정조는 신하들과 함께 허리가 긴 화양루(華陽樓) 북쪽을 시작으로 서장대를 거쳐 화서문을 지나며 새로 쌓은 성의 특성을 직접 신하들에게 설명하기도 했다. 그중 공격과 방어에 효과적인 구조물인 공심돈(空心敦)을 보며 신하들에게 말하길,

“공심돈은 우리 동국(東國)의 성제(城制)에서는 처음 있는 것이다. 여러 신하들은 마음껏 구경하라.” 정조의 설명에는 자부심이 넘쳐흘렀다.

걸음은 이어져 장안문(長安門)을 지나 풍광이 가장 아름다운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에 이르러 조그만 과녁을 설치하고 정조가 직접 활을 쏘았다. 구름처럼 백성들이 몰려들었다. 정조는 모여든 백성들 중 활을 잘 쏘는 자를 뽑아서 활 쏘기를 시험하게 한 다음 1등을 한 사람에게 바로 무과시험의 최종시험인 전시(殿試)에 시험 볼 자격을 주기까지했다. 수원 화성에 살고 있는 백성들에게 내리는 파격적인 행보였다. 풍악을 울리며 1등을 한 백성에게 노고를 치하하고 걸음을 옮겼다.

동장대(東將臺)에서 다시금 화성의 군사적 중요성을 신하들에게 설명을 하고 창룡문 밖으로 나가 인근에 살던 백성들의 삶터를 직접 눈으로 살폈다. 백성이 어떤 곳에서 사는지, 어떤 길을 걷는지 등 하나하나 세심하게 살피는 것이 정조의 기본 정치철학이었다. 그리고는 팔달문 문루에 올라 잠시 쉬었다가 다시 가장 높은 곳인 서장대에 올라 군사훈련을 주도했다.
▲ 무예24기 시범 - 수원화성의 동문인 창룡문에서 펼쳐진 무예24기 시범 중 장창의 모습이다. 무예24기를 익힌 장용영의 군사들은 정조의 친위 군사이자 화성을 방어했던 핵심 병력이었다.

밤이 되자, 정조의 명령에 따라 수천의 군사들과 수원 화성에 사는 모든 백성들이 일사불란하게 함께 횃불을 들어 올리고 등불이 밝혔다. 정조의 주변에는 한중일 삼국의 군사 무예를 집대성한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에 실린 무예 24기를 익힌 장용영(壯勇營) 군사들이 늘 함께 했다. 장용영(壯勇營)은 정조가 직접 계획하고 설치한 국왕 친위 군사조직으로 서울에는 내영(內營)을 그리고 수원 화성에는 외영(外營)을 별도로 설치해 기존의 군사조직을 압도하는 형세였다.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도 정조의 명으로 당대 최고의 실학자로 불리던 이덕무와 박제가 그리고 군사 무예의 달인 백동수가 편찬을 담당하고 장용영에서 출판의 모든 일을 진행했기에 실용적인 무예 서로 거듭날 수 있었다.

조선시대 야간 군사훈련인 ‘야조(夜操)’를 지켜보던 정조는 불야성을 이루는 성곽을 바라보며 화성행궁으로 돌아와 신하들에게 앞으로 수원 화성을 어떻게 경영할 것인지를 명확하게 밝혔다.

“수원 화성이 완성되었으므로 지금 제일 급한 것은 ‘집집마다 부유하게 하고 사람마다 화락하게 하는 것[戶戶富實 人人和樂]’의 여덟 글자이다.”

이 말의 의미는 수원 화성이 단순한 군사적 용도인 성곽의 개념을 넘어 그 안과 밖에 살고 있는 ‘사람’이 부유하고 행복하게 살게 되는 것이 가장 먼저 풀어야 할 숙제라고 생각한 것이다. 제아무리 튼튼하고 강한 성곽을 쌓아도 그것을 지키는 군사들과 그 안에 살고 있는 백성들의 삶이 풍요롭지 않다면 그 모든 것이 무용지물이라는 사실을 정조는 너무나도 잘 알았다. 또한 국왕이 가진 권력의 힘으로 억지로 유지시키는 것이 아니라, 군사들과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화성을 사랑하고 지키려는 마음이 생길 때 비로소 수원에 화성을 쌓은 정조의 마음을 모두가 함께 공유할 수 있겠다는 마음에서였다. 수원 화산(花山)으로 옮긴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능을 보호하고 그 주변에 사는 백성들을 지키고 잘 살 수 있도록 보살피는 것. 그것이 정조가 수원에 화성을 건설한 진정한 이유였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수원 화성(華城)은 영문으로 ‘World Heritage Suwon Hwaseong Fortress’다. 그 이름처럼 수원 화성은 공격과 방어에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는 화성이라는 ‘성곽’을 중심으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그러나 수원 화성의 진정한 의미는 단순히 돌로 둘러싼 둘레 약 5.7Km의 성곽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좀 더 큰 그림인 조선의 신도시적 성격을 띠고 있다.
▲ 화성야조(華城夜操) 중 연거도 - 수원 화성에 행차할 때마다 정조는 갑주를 착용하고 서장대에 올라 직접 군사들을 훈련시켰다. 낮부터 밤까지 이어지는 훈련은 불야성이었고, 군사들은 물론이 화성에 사는 백성들까지 모두 함께 참여했다.

수원 화성의 건설을 명령한 조선의 22대 군주인 정조는 생부인 사도세자의 묘소를 양주 배봉산에서 수원 화산(花山)으로 옮기고 신읍치를 현재의 수원 화성이 건설된 곳으로 옮겼다. 이를 행정적으로 능숙하게 풀어가기 위해 이조, 병조, 공조의 판서와 강원도관찰사 등을 역임한 당시 명판관으로 불렸던 서유방을 경기관찰사로, 삼도수군통제사와 좌포도대장, 총융사 등을 역임한 걸출한 무인인 조심태를 수원부사로 임명해 신도시 구상을 실현시키고자 했다.

특히 경기도 광주 땅이었던 일용면과 송동면 지역을 수원으로 이속시켜 수원이 관할하는 평평한 평야지역을 확대시켰다. 이를 통해 ‘화성’이라는 성곽을 중심으로 주변지역을 안정적으로 발달시켜 조선의 도성을 대체할 만한 새로운 제2의 신도시로 수원 화성을 자리매김하고자 했던 것이다. 일단은 백성들이 배부르게 먹고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만 자립 자족의 신도시인 화성의 의미와 가치가 널리 공유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수원 화성의 상인들에게는 인삼과 모자를 자유롭게 거래할 수 있는 혜택을 줬고 농업인들은 화성 주변에 국영농장인 둔전을 설치해 군사들과 함께 농사를 지어 곡식을 나눠 먹을 수 있도록 도움을 줬다.

1789년에 수원에 신읍치 조성 공사를 마치고 백성들이 서서히 안정을 취해갈 때 팔달산 동쪽 기슭에 화성행궁을 건설해 신도시의 중심축으로 삼았다. 화성행궁의 편액들이 말하듯, 정조는 수원을 제2의 고향이자(신풍루-新豊樓) 상왕으로 물러난 후 노년을 보내며(노래당-老來堂, 미로한정-未老閒亭) 아들인 순조를 위한 새로운 정국 구상을 할 수 있는 공간으로 인식했다. 정조는 세종을 흠모했다. 그래서 성군이라 불린 세종을 성장시킨 태종처럼 상왕이 되어 수원 화성에 머물면서 아들 순조를 세종에 버금가는 국왕으로 뒷바라지하고픈 마음이 가득했다. 그래서 여타의 행궁보다 몇 배나 큰 규모인 576칸의 행궁을 건설한 것이다.

이후 수원화성을 쌓기 전인 1793년 1월 12일에 수원도호부를 ‘화성유수부(華城留守府)’로 승격시켰다. 이를 통해 서울을 중심으로 동쪽으로는 강화, 서쪽으로는 광주, 남쪽으로는 수원, 북쪽으로 개성 등 네 곳에 유수부가 만들어져 강력한 도성 방위망을 형성하게 된 것이다. 당시 명재상이자, 정조의 충신으로 잘 알려진 채제공이 초대 유수로 임명됐다. 당시 채제공은 좌의정을 역임했을 정도로 당시 행정의 달인으로 손꼽히는 사람이었다. 유수부 승격과 함께 드디어 1794년 1월부터 1796년 9월까지 화성행궁을 품는 형태로 전체 5.7km에 달하는 거대한 성곽을 2년 반만에 쌓아 올린 것이다. 그 과정에서 지금도 수원 화성을 관통하는 핵심 도로로 활용하고 있는 장안문과 팔달문을 잇는 남북 대로와 화성행궁과 창룡문이 이어지는 큰 길인 ‘십자로’를 넓게 조성해 물류가 원활하게 소통될 수 있도록 했다.

그 십자로에는 도성처럼 시각을 알리는 큰 종을 설치하고 도성의 종로 통을 방불케 하는 상업지구로 성장시키려 했다. 십자로를 중심으로 서울의 시전처럼 중심상권을 좌우로 길게 배치하고 그 뒤로는 민가를 만들어 백성들이 다양한 상업 활동에 종사할 수 있도록 길목을 뚫었다. 그래서 수원 화성이 완공된 후에는 성안과 성밖으로 주민들을 구분해 2개의 구역으로 관리했다. 그 2개의 구역인‘부(部)’에는 다시 ‘동성자내(東城字內)’ ‘서성자내(西城字內)’ ‘남성자내(南城字內)’ ‘북성자내(北城字內)’로 균등하게 나눠 계획된 신도시 발전의 기본 구상을 적용시켰다.

따라서 정조의 명으로 건설된 수원 화성은 단순히 성곽 자체에만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화성을 둘러싸고 있는 상당히 넓은 주변 지역이 모두 정조의 개혁 정치를 수행하고자 했던 신도시의 일환으로 조성된 공간이라고 볼 수 있다. 대표적으로 화성의 서쪽 밖에는 ‘서둔’이라는 둔전과 북쪽에도 만석거를 중심으로 둔전이 경작됐기에 화성 주변의 다양한 시설물과 삶터는 화성을 더욱 가치 있게 만드는 것이었다.

정조가 수원 화성에 투영하고자 했던 마음은 ‘지킴의 미학’이었다. 뒤주 속에서 갇혀 억울하게 돌아가신 아버지의 능을 지키려 했던 아들의 마음, 어린 아들 순조가 성군이 될 수 있도록 뒷바라지해주고픈 아비의 마음, 거기에 조선에 살고 있는 온 백성이 풍요롭고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해주고픈 군주의 마음이 복합된 곳이다. 정조와 수원 화성의 핵심 연결고리는 ‘사람을 향한 애틋한 마음’이었다.

최형국 중앙대 강사, 역사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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