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후기5.두물머리에서 문화의 격을 경험하다

▲  정선, '독백탄(獨栢灘)', '경교명승첩'(1741)
여행이 예술이 되는 순간

옛말에 ‘만권의 책을 읽고 만 리를 여행한다(讀萬卷書 行萬里路)’는 말이 있다. 독서만이 공부가 아니라, 여행을 통해 세상을 이해하고 내면을 풍부하게 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사실 여행은 그 자체로 훌륭한 공부이기도 하지만, 사람의 영혼을 살아 숨 쉬게 하는 가장 행복한 활동이다. 여행에는 사람으로 해금 행복감을 느끼게 하는 걷기, 말하기, 놀기, 먹기 등이 모두 들어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옛사람들은 일찍부터 여행의 진정한 의미를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조선 후기 문인들 사이에서는 산수 유람이 하나의 사회현상이 될 정도로 크게 유행했다. 요즘의 캠핑 붐과 맞먹는 정도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듯하다. 이 시기 여행문화가 남긴 최대의 수혜는 미술 분야에서 나타났다. 겸재 정선(鄭敾, 1676~1759)에 의해 창안된 진경산수화가 바로 여행문화의 결과로 탄생된 것이기 때문이다.

정선이 우리 산천을 처음으로 그리게 된 계기는 친구 이병연(李秉淵, 1671~1751) 덕분이다. 이병연은 1710년 금강산 초입에 있는 금화 현감으로 부임하면서, 이듬해인 1711년에 스승 김창흡과 친구 정선을 초대하게 된다. 정선은 생애 첫 금강산 여행을 통해 처음으로 우리 산천의 아름다운 모습을 화폭에 담았다. 이후 일생 동안 진경산수화에 매진해 우리 문화를 빛나게 했다.

정선의 생애를 살펴보면, 60대 중반에 그림의 품격이 절정에 이른다. 바로 이 시기에 제작된 대표적인 작품이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이다. ‘경교명승첩’은 말 그대로 서울 근교의 명승을 유람하며 그린 화첩이다. 이 화첩은 두물머리에서 시작해 행주산성에 이르는 한강변의 풍경을 담은 33폭의 그림들로 이뤄져 있다. 세상의 변화와 함께 한강 주변의 경관은 크게 변했지만, 정선의 그림을 통해 두물머리의 옛 모습을 감상할 수 있어 다행이다.

정선에 의해 탄생된 진경산수화는 조선 후기 문화사에서 그 영향이 매우 광범위하게 나타났다. 진경산수화를 계승한 화가들 가운데 가장 개성이 두드러지는 화가는 정수영(鄭遂榮, 1743~1831)이다. 그는 1796년부터 1797년까지 한강과 임진강을 배로 유람하며 ‘한·임강명승도권(漢·臨江名勝圖卷)’을 제작했다. 정선과 정수영이 그린 한강 그림에서 공통적으로 눈에 띄는 사실은 두물머리 일대를 중요하게 다뤘다는 점이다. 그것은 두물머리가 조선후기 학문과 예술의 중심지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름다운 두물머리, 그림으로 만나다

두물머리는 예로부터 풍광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실학사상의 중심지이기도 한 이 지역은 문인들로부터 각별한 사랑을 받아왔으며, 화가들에 의해 그림으로도 그려졌다. 정선의 ‘경교명승첩’은 물론, 정수영의 ‘한·임강명승도권’에서도 두물머리의 승경이 아름답게 그려졌다. 또한 조선 말기에 활동했던 문신이자 서화가인 이건필(李建弼 , 1830~?)은 배를 타고 이동하면서 본 두물머리 일대의 아름다움을 ‘두강승유도(斗江勝遊圖)’로 남겼다.

이처럼 많은 문인예술가들로부터 사랑받았던 두물머리는 화첩이나 두루마리 등 다양한 화면으로 표현됐다. 그중에서도 정선의‘경교명승첩’에 실려 있는 ‘독백탄(獨栢灘)’은 두물머리 그림 가운데 대표작으로 손꼽힐 만하다. 이 그림은 지금의 팔당호 유역인 족자도 앞의 정경을 그린 것인데, 채색과 먹이 함께 사용돼 무척이나 아름답다. 그림의 가운데에 있는 섬이 족자도이고 멀리 오른쪽에 있는 산이 수종사가 있는 운길산이다. 산 아래쪽으로 내려와 왼쪽 끝에 있는 마을이 정약용의 고향인 마현이다. 하지만 그림 속 아름다운 정경과 달리, 이 일대는 ‘여울’이 험하기로 유명했다. 정선의 ‘독백탄’에는 바로 여울을 건너는 사공의 모습이 표현돼 있다.

여울은 하천이 운반한 물질이 강바닥에 퇴적돼 수심이 얕아진 곳을 말한다. 그 위에서는 강물이 부서지면서 흐르기도 한다. 전통시대에는 배가 여울을 어떻게 통과하는가에 따라 수운의 성패가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여울이 큰 문제였다.

정선의 스승 김창흡(金昌翕, 1653~1722)은 1688년에 뱃길을 이용해 팔당을 거쳐 단양을 여행하고 ‘단구일기(丹丘日記)’를 남겼는데, 족자도 부근의 여울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다. ‘단구일기’ 3월4일자 기록에 의하면, “족백단에 이르니 여울이 심히 사나워 배 저어 나가기에 불리하다. 옆의 배가 와서 부딪쳐 서로 외치며 밀어낸다.”라고 할 정도로 이 지역의 여울이 험했음을 알 수 있다.

정선이 그린 ‘독백탄’에서 보듯이, 여울을 통과하기 위해 뱃사공들이 일부는 내려서 밧줄을 매고 족자도 맞은편 바위에 올라가 배를 끌어올리고 일부는 배에 남아 삿대질로 배를 조정해야 했던 모양이다. 더 심한 경우는 선박을 밧줄로 묶은 뒤 선부들이 여울로 내려가 인력으로 배를 끌어올리기도 했다고 한다.

여울의 사정은 이후에도 개선되지 않아 백성들의 삶을 여전히 고단하게 했던 듯하다. 1823년에 한진호(韓鎭戶, 1792~?)라는 문인이 쓴 여행기인 ‘도담행정기(島潭行程記)’에도 이 지역 여울의 어려움이 묘사돼 있다. 이처럼 여울은 조선시대 배의 운항에 큰 장애 요소였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지금은 팔당댐 건설로 수위가 높아져 그야말로 옛이야기가 됐다.


제목으로 남은 그림, 정약용의 두물머리

‘인자요산(仁者樂山) 지자요수(知者樂水)[‘논어(論語)’ ‘옹야(翁也)’]’라는 말이 있다. 이 말에 근거하면 물을 사랑했던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은 의심할 여지없이 ‘지자(知者)’이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언제나 한강을 사랑했다. 지인들이 찾아와 노닐 일이 생기면 어김없이 배를 띄우고 천진암이나 수종사 주변을 왕래하기도 했다.

이처럼 두물머리는 정약용의 삶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점에서 특히 주목된다. 예로부터 두물머리는 ‘두미’ ‘우천’ ‘소내’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렸는데, 정약용은 집 앞을 흐르는 강물을 특별히 초계(苕溪)라 불렀다.

정약용은 강진 유배 초기에 고향이 그리워 고향 초계의 풍경을 그린 산수화를 벽에 붙여놓고 향수를 달랬다고 한다. ‘희작초계도(戱作苕溪圖)’라는 시의 마지막 구절에는 그 절절한 마음이 잘 표현돼 있다.

(......)소나무 노송나무 덮고 있는 것 우리 정자이고(松檜蔭門吾亭也) / 뜰에 가득 배꽃 핀 곳 저건 우리 집이지(梨花滿庭吾廬乎) / 우리 집이 저기 있어도 갈 수가 없어(吾廬在彼不得往) / 나로 해금 저를 보고 서성대게 만드네 그려(使我對此空??)

정약용, ‘장난삼아 초계도에 쓰다(戱作苕溪圖)’, ‘여유당전서’

언젠가 이 ‘초계도’가 발견된다면, 고향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이 담긴 심화(心畵)의 경지를 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정약용은 유배 이후 한강의 옛 이름인 ‘열수(洌水)’를 자신의 호로 사용할 정도로 한강을 사랑했다. 한강의 근원인 북한강 지역을 답사하고 싶어 했고 춘천 여행을 통해 마침내 꿈을 이뤘다. 이 여행 후 일기 형식으로 된 기행문인 ‘산행일기(汕行日記)’를 남겼다.

‘산행일기’에 의하면 정약용은 고향 부근의 아름다운 풍광을 그림으로 남겨두기를 원했다. 해서 산수화에 능한 방우도(方禹度)라는 선비화가를 배에 동승시키게 된다. 춘천을 향한 여정에 화가를 동승시킨 까닭에 대해 정약용은 이렇게 말했다. “물이 다 하고 구름이 일어나는 곳이라든가, 버들 그늘이 깊고 꽃이 활짝 핀 마을에 이를 때마다 배를 멈추고 그 좋은 경치를 가려 제목을 붙이고 그리게 하고 싶었으니, 그것은 이를테면 ‘사라담에서 수종사를 바라보다(似羅潭望水鐘寺)’라든가 ‘고랑도에서 용문산을 관망하다(皐狼渡望龍門山)’ 등으로서 모두 그려둘 만한 절경이었다.”

아쉽게도 방우도는 한질(寒疾)에 걸려 붓을 들어 보지도 못한 채 배를 떠나고 말았다. 고향 주변의 아름다운 경치를 그림으로 남기려 했던 정약용의 바람은 그렇게 이뤄지지 못했다. 하지만 그가 남긴 그림의 제목만으로도 우리는 수종사가 있는 운길산과 유서 깊은 용문산을 특별한 눈길로 바라보게 된다.


두물머리, 팍팍한 일상에 주는 소소한 위로

두물머리는 북한강과 남한강이 합쳐지는 장소로, 계절에 따라 혹은 날씨에 따라 변화하는 풍경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해서 여러 시인 묵객들이 이곳의 풍광을 시서화로 남겼으며, 지금도 많은 예술가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우리 가족은 피로가 쌓이고 재충전이 필요할 때면 두물머리를 찾는다. 고즈넉한 정경에 취해 두물머리 일대를 걷노라면, 산수화 속을 거니는 듯한 착각이 든다. 가족과 함께 이야기하며 걷다가 박물관에 들러 옛사람의 자취를 둘러보고, 출출해지면 맛있는 음식도 먹는다.날씨가 좋은 날엔 그림을 그리기도 한다. 두물머리에서 자연과 문화의 격을 경험하고 나면, 돌아갈 때는 새로 충전한 배터리처럼 다시 살아갈 힘을 얻는다. 두물머리는 팍팍한 일상에 주는 위로 그 자체이다.
김정숙 미술사학 박사, 한국외국어대학교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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