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인가, 시간적 여유를 갖게 되면서 틈틈이 고전을 다시 읽는 재미에 빠지곤 한다. 플로베르의 ‘마담 보바리’도 그 중 하나다. 사실 청년시절, 그 소설을 완독하기까지에는 상당한 인내심이 필요했다. 그 원인은 아마도, 소설의 내용이 당시의 윤리와 미풍양속에 저촉이 된다하여 법정까지 가면서 화제에 올랐던 부분에만 흥미를 가졌을 뿐, 사실주의 문학의 선두로서의 가치나 본질을 뒤로한 채 읽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최근 그 소설의 마지막 장을 읽을 즈음, 한 일간지로부터 프랑스 대선 후보로 나선 ‘에마뉘엘 마크롱’에 관한 흥미로운 기사 하나를 접했다. 그의 러브스토리에 관한 것이었는데, 마크롱은 올해 만 39세, 그의 부인 ‘브리짓 트르뉴’는 64세, 무려 25년이나 연상이다. 마크롱이 고교생이었던 15세 때 그녀를 문학 선생님으로 만났고, 당시 이미 가정이 있었던 선생님의 나이는 40세. 두 사람은 우여곡절 끝에 10년 전인 2007년 마침내 결혼에 이르렀다고 한다. 새삼, 프랑스는 사랑에 참으로 관대한 나라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조건으로 대선후보에 나설 수 있다니? 주변이 어지러우면 중심을 잡을 수 없을 거라는 우리의 생각과는 사뭇 다르다. 중요한 것은 사랑의 진실이다. 그러니 그 사랑을 놓치면 내 인생을 잃는 것! 때문에 언론이나 사람들은 남의 귀한 인생을 함부로 재단하지 않는다. 며칠 전, 국내의 한 영화시사회에서 있었던 유명감독과 여배우의 기자회견을 두고 ‘불륜 커밍아웃’이라는 다소 민망한 제목을 단 기사를 보았다. 그들의 관계를 두둔해서가 아니라 사랑의 정의는 그 개념이 너무도 넓어, 타자가 남의 사랑을 함부로 선과 악으로 정의를 내린다는 것은 참으로 위험한데도 우리는 아주 쉽게 돌을 던진다.

아무튼, 프랑스인들 중에는 그처럼 유난히 사랑에 관하여 특별한 사람들이 많다. 그중에 하나가 마크롱 같은 연상연하 커플이다. 미국의 불문학자 ‘매릴린 옐롬’은 “젊은 남자와 연상 여자의 열애가 프랑스 문학의 큰 주제 중 하나”라고 말하고, 그 이유가 “프랑스인들은 참으로 사랑을 사랑하기 때문”이라는데, 그 프랑스적 연상연하의 사랑의 기원은 어디에서 시작된 것일까? 멀리 12세기에 ‘투르바두르’라 불리며 중세의 세속 가요를 전했던 음유가인들이 아닌가 싶기도 한데, 그들이 창조한 시가(詩歌)에는 고귀한 여성, 특히 연상의 귀부인에 대한 동경과 연정을 담고 있는 것이 많기 때문이다.

서두에 언급한 소설 ‘마담 보바리’를 쓴 플로베르도 그 소설을 쓸 당시 11년 연상의 여류시인 ‘루이즈 콜레’와 연인이었고, 19세기 남성 위주의 프랑스 문단에서 큰 성공을 거뒀던 당찬 여류작가 ‘조르주 상드’의 ‘쇼팽’과의 모성애적 연애사건은 너무도 유명하다. 쇼팽의 대표적인 곡들은 거의가 6년 연상의 ‘상드’와 동거하던 시기에 작곡됐다. 어찌 보면 상드는 쇼팽의 연인이자 어머니 같은 존재이면서 영감의 원천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연상연하 커플의 지존(?)은 현대 프랑스 문학사에서 가장 문제적인 작가 중의 한 사람인 ‘마르그리트 뒤라스’가 아닌가 싶다. 관심 있는 이라면 1930년대 베트남을 배경으로 한 그녀의 자전적 소설인 ‘연인’을 책이나 영화로 만났을 것이다. 그녀의 문학세계에 빠진 28세 청년 ‘얀 앙드레아’는 회신 없는 흠모의 편지를 무수히 보내다가, 무려 5년만에 그녀로부터 “오세요”라는 짧은 회신을 받았다. 그때 뒤라스는 66세였다. 그 후 1996년 82세의 나이로 뒤라스가 세상을 떠나기까지 두 사람은 16년을 연인으로 살았고 ‘얀’은 그녀의 임종을 지켰다. 그녀를 떠나 보낸 후 ‘얀’은 다시 편지를 썼고 그것은 ‘나의 연인 뒤라스’라는 책으로 나왔다. 그리고 두 사람의 얘기는 ‘이런 사랑’이란 제목으로 영화화되었다. 가슴 먹먹해지는 사랑이다. 프랑스의 대선 일정이 4,5월로 우리와 비슷하게 돌아간다. 마크롱이 과연 25세 연상의 부인과 함께 엘리제궁에 입성할 수 있을까? 시간의 여유가 생기면서 별 실없는 곳까지 다 시선을 두게 된다.

박정하 중국 임기사범대학교 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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