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천 '귀뚜라미 보일러' 수정법 족쇄 35년

▲ 부천 원미구 귀뚜라미보일러.
수도권정비계획법은 국내 경제구조가 제조업기반을 중심으로 돌아가던 1983년에 시행됐다.

세상은 이제 서비스산업 기반의 3차산업시대를 넘어어 지식산업기반의 4차산업시대에 접어들었지만, 대한민국은 아직까지 낡은 규제의 늪에 빠져있다.

전문가들은 4차산업 발전을 위해서는 지식산업 거점기업을 중심으로 기술 상용화가 가능하도록 산업집적화가 이뤄져야 한다고 조언한다.

그러나 수도권이 처한 작금의 현실은 다중규제에 묶여 발전은커녕 현상 유지도 어려운 상황이다.

경기도와 지방정부들은 수도권 규제에 얽매인 도내 기업들의 공장 증설 허용을 매년 요구하고 있지만 매번 ‘시기(時機)성’과 타지역의 ‘시기(猜忌)’를 이유로 반려되고 있다.
 


수도권정비계획법(수정법)의 아이러니는 수도권과 비수도권이라는 지역적 특색을 고려하지 않은 이분법적 논리에 있다. 여기에 더해 수정법은 중소기업 외 모든 기업들을 대기업이라는 범주에 포함시켜 규제를 적용함으로써 국내 기업들의 균형잡힌 성장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정부는 2010년 ‘중견기업 성장촉진 및 경쟁력 강화에 관한 특별법’ 제정을 통해 대기업과 성장관리가 필요한 기업들을 분류하고 육성하기 위한 정책을 도입했지만, 수도권은 수정법의 족쇄에 묶여 제자리 걸음만 반복하고 있다.



▶ 대기업은 공장신설 불가…산집법의 황당한 셈법= 한국 보일러 업체의 대명사격인 ㈜귀뚜라미는 1977년 부천 원미구 도당동 일원 5천846㎡ 규모 작은 부지에 둥지를 틀고 첫 발걸음을 내디뎠다.

창사 이후 몇십년간의 노력을 바탕으로 해외 판로까지 개척한 귀뚜라미는 2007년 사업확장 및 생산라인을 증설하기 위해 제조공장을 충남으로 이전했다.

이과정에서 기존 부천공장은 제조 시설을 모두 철수하고 물류창고로 기능이 전환됐다.

문제의 발단은 여기서부터다. 공장 이전 후인 2010년 11월경 부천시청은 귀뚜라미 측에 해당 공장 부지의 용도에 대해 재문의했고, 귀뚜라미측은 “창고로만 쓸 예정”이라고 전달했다. 이에 따라 부천시청은 해당부지를 멸실에 의한 직권취소 처분을 하고 창고 용도 부지로 변경했다. 용도변경 당시까지만 해도 부천시와 귀뚜라미, 양측 모두 서로의 발목을 붙잡는 족쇄가 될지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그로부터 4년이지난 2014년. 귀뚜라미는 종전 공장부지에 지식산업센터(아파트형 공장)를 설립하기 위해 부천시청에 허가서를 냈다. 직접 투자금액 350억 원, 일자리 창출 200여 명 규모의 사업이었다. 부지도 있고, 건물도 있었다. 단지 용도변경 허가만 받으면 됐지만, 공장설립 허가서는 반려됐다.

‘산업집적활성화 및 공장설립에 관한 법 시행령(산집법)’에 따라 대기업으로 분류되는 귀뚜라미는 공장 신설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산진법상 과밀억제권역에서 대기업의 공장부지내 지식산업센터 신설은 아무 문제가 없다

하지만 산진법의 또다른 조항에 따라 대기업은 ‘제조시설’ 신설이 불가능하다는 제한이 있어 막상 지식산업센터 건물을 지어도 제조시설 입지는 불가능한 황당한 상황에 도달한 것이다.

수도권 규제의 패러독스는 기업 규모의 분류에서 발생한다. 귀뚜라미는 ‘중견기업 성장촉진 및 경쟁력 강화에 관한 특별법’(중견기업법)상 ‘중견기업’으로 분류된다. 하지만 산진법에서는 중견기업이라는 용어 없이 단순히 중소기업과 대기업, 이분법적으로 분류하고 있다. 국가경쟁력 제고를 위해 중견기업을 육성하겠다는 국가정책과 때 지난 수정법 사이에서 모순이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 중견기업과 대기업간 괴리… 규제로 47개 기업 ‘OUT’= 귀뚜라미 관계자는 한순간의 실수였다고 고백했다. 귀뚜라미 관계자는 “당시 산집법상 귀뚜라미가 대기업으로 분류되는지도 몰랐고, 산집법의 존재 유무도 잘 몰랐다”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우리는 당사가 대기업으로 분류 됐을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며 “이를 알고 있었다면 더 빨리 지식산업센터를 만들려고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생각지도 못한 대기업으로 분류되며 역차별을 받는다는 주장이다.

귀뚜라미의 매출액은 2014년 기준 3천73억원으로 중견기업법상 중견기업이다. 그러나 수정법과 산집법에서는 대기업의 정의를 ‘중소기업이 아닌 기업’으로만 보고있다. 귀뚜라미도 수도권 규제상에는 대기업으로 분류되는 것이다.

산집법에서 과밀억제권역은 중소기업에 한해서만 기존공장 및 도시형공장의 신·증설이 가능하도록 허용하고 있다. 국가의 중소기업 육성보호차원에서 예외적으로 규제 완화정책을 시행하고 있다. 이에 비해 대기업은 지식산업센터 조성은 가능하지만 센터내 공장은 중소기업 도시형 공장에 한해 허용하고 있다. 센터를 조성하고 나서 정작 대기업들이 필요한 제조공장은 지을수 없다는 것이다.

경기도 관계자는 “이와 비슷한 역차별이 부천에서는 귀뚜라미 한곳이지만, 수도권 전체에서는 수십개 기업이 피해를 받고 있을 것이다”라며 “수도권 규제에 대한 전반적인 수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부천만해도 이같은 역차별과 규제로 인해 수정법 시행 이후 47개의 기업이 없어지거나 다른 지역으로 이전했다. 7만5천㎡의 부지를 자랑했던 종합기계부품단지 ㈜삼정은 규제를 이기지 못하고 폐업했다. 국내 캅셀 생산 최고의 주가를 달리고 있는 서흥캅셀㈜도 계속된 겹규제에 지난 2013년 충남 아산으로 이전했다.

4차산업 집약에 특화 돼 있다는 대도시권에서조차 기업들이 더이상 버티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부천시 관계자는 “분명 우리나라는 4차산업 혁명을 향해 달리고 있고, 부천시는 동부권역에 비해서는 시설 집약도도 높아 유리하다”라며 “그러나 수도권 규제로 인한 기업유출은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다. 규제완화를 통한 산업 발전을 이뤄야 할 때”라고 말했다.

백창현·황영민기자/bch@joongb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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