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글을 읽고 도를 배우는 것은 천하의 인명을 살리기 위함이다"

다산을 어떻게 볼 것인가.

우리 시대가 위대한 선각자라 여기는 다산 정약용(丁若鏞·1762~1836)은 생애 수많은 고통과 부침을 겪었다. 함께 동고동락했던 친우의 배신을 당했고, 학문적 동지이자 세상을 바꾸겠다는 뜻을 함께 세웠던 친구와 형제의 죽음을 지켜봐야 했다. 같은 당파(黨派)의 사람들에게도 버림받고 반대파에게 모함을 받아 18년 유배라는 고통의 세월을 보냈다. 어린아이들이 전염병으로 죽어 갔지만 의학적·사회적 도움을 받지도 못한 채 아버지로서 가슴만 쓸어냈다. 서로 떨어져 생계를 위해 분투하는 아내를 1천 리 밖에서 밤새워 걱정만 했다. 의좋게 지내던 5형제는 하나의 사건으로 두 명은 유배가고 한 명은 죽었으며, 한 명은 유랑자가 돼 이산(離散)하고 말았다. 나라와 백성을 위해 ‘공·렴(公廉)’의 자세로 노력해 훌륭한 공적을 쌓은 공직자였지만 질시와 모함을 받아 자신의 존재를 한순간에 부정당해야 했다.

그러나 다산 정약용은 죽기 3일 전까지 학문을 놓지 않았던 그는 ‘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신서’ 등 500여 권이 넘는 저술을 남겼다. 동양 최대의 개인 저술인 것이다. 이는 인생 부침과 삶의 고통을 겪으면서도 어떻게 고비마다 현명하고 올바르게 대처한 결과이자 희망 주의의 산물이다.


75세 삶을 살아가면서 고통과 역경을 이기고 풍류도 즐길 줄 알았다. 자신의 고통을 다른 사람이 겪지 않기를 바라며 아들을 잃은 이웃의 고난을 외면하지 않고 함께 공감했다. 유배지에서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 나왔듯 정약용은 세상의 모든 문제를 자신의 문제로 여기라 했다. 다산의 인생 여정에서 변곡점을 이룬 사건들과 계기들을 하나씩 짚어보면 그 인간애가 가진 매력을 새롭게 찾을 수 있다.

학술적 성과를 평가하는 방식이 아니라 새로운 사고를 견인했거나 삶을 변화시키는 계기들을 짚어보면 시대의 아픔을 품을 수밖에 없었던 인간 정약용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슬픔과 고통을 희망주의로.

정약용의 어머니는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의 손녀였다. 정약용 스스로 ‘나는 외탁을 했다’라며 자신의 외모가 공재 윤두서와 닮았음을 밝혔다. 자부심이 묻어있기도 하다.

다산은 10세 이전의 시문을 모아 자신의 문집을 엮어서 ‘삼미자집(三眉子集)’을 만들었다. 어린 나이에 많은 글을 지은 재능도 주목되지만 문집 이름을 가볍게 지나칠 수는 없다. 이 문집의 이름을 풀어보면 ‘눈썹이 세 개인 사람의 문집’이라는 뜻이다. 정약용은 두 살 때 천연두를 앓아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이 때 오른쪽 눈썹 위에 흉터가 남아 마치 눈썹이 세 개가 있는 것 같았고, 이로써 자신의 호를 삼미자(三眉子)라고 했다.

어린 정약용은 자신의 몸에 난 흉터와 상흔을 숨기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신체에 있는 특징을 살려서 자신의 문집 이름으로 삼았다. 그 문집 지금 전하지 않지만 자신의 생각과 고민이 많이 기록돼 있었을 것이다. 이 문집이 지어진 시기는 그가 10세 무렵으로, 사랑하던 어머니를 잃었을 때이다. 어린 정약용은 슬픔 속에서도 오히려 여러 책을 읽고 많은 글을 지었다. ‘사암선생년보(俟菴先生年報)’에는 그때 지은 글을 쌓으니 키만큼이나 됐다고 밝히고 있다. 다산은 어린 시절부터 궁벽한 곳에 살거나 불우한 처지에 놓이더라도 비관보다는 희망을 찾았던 것이다. 어리지만 가장 큰 절망과 아픔 앞에서 자신의 뜻을 굳게 지키고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계기로 삼았다. 정약용만의 현실 돌파 방법이 희망주의가 아니었을까.

‘사람들은 모두 너희들을 비판하거나 업신여길 수도 있다. 그러나 슬퍼하지 마라. 아비가 죽었느냐? 아비가 죽거든 그때 울어라. 자꾸 웃어라. 주변에서 웃을 수 있는 것을 찾으라. 없으면 남의 것을 빌려서라도 웃어라’

아버지의 유배생활로 두 아들이 마현에서 침울하게 지내고 있었을 때, 두 아들의 마음을 열어준 아버지의 위로 편지이다. 두 아들은 죄인의 아들이라 욕하는 사람들과 유배라는 고통 속에서 지내고 있을 아버지를 생각하면, 우스운 이야기나 광경을 대하고도 웃을 수 없었다. 그때 아버지로서 다산은 두 아들에게 웃으라는 응원으로 두 아들의 가슴을 열어준 것이다. 위기와 절망 속에서 아버지와 아들들은 희망과 긍정으로 진정 소통했다.

▲ 다산의 비밀스런 기록들.

시간과 만남을 기록하다.

다산 정약용은 500여 권의 저술을 남겼다. 투식적이거나 미사여구를 동원해 미화한 글들이 아니다. 다산의 성격도 그렇거니와 다산의 글쓰기의 특징이기도 하다. 다산은 자신이 만난 사람과 시간들에 대해 많이 기록했다. 한순간 한 장면들을 소중히 기록해 삶의 흔적을 모아 역사로 만들었다.

다산에게 한 개인의 역사로서, 삶의 흔적을 남겨야 한다며 글쓰기의 목적을 부여한 사람이 있었다. 학문에 뜻을 두고 성호의 제자들과 깊은 교유를 하던 시기에 만난 복암(伏菴) 이기양(李基讓)이다.

“자녀 가운데 요절한 자는 마땅히 그들의 생년월일·이름·자·모습 등과 죽은 연월일까지 갖추어 써놓아 뒷사람들이 징험할 수 있게 하라. 그래서 그들의 삶의 흔적이 남도록 해야 한다.” (‘복암이기양묘지명(茯菴李基讓墓誌銘)’)

9명을 낳고 6명을 잃은 다산은 죽은 아이를 생각하면 슬픔을 이기지 못했다. 대개 너무도 어린 나이로 죽었다. 당연히 평가할 만한 업적이 없기도 했지만 여느 아버지처럼 죽은 자식에 대한 기억을 간직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기양과 만남과 충고 이후 달라졌다.

일찍 요절한 자신의 아이들에 대해 기록하기 시작했다. 생년월일, 이름, 모습, 물론 죽은 시간까지 기록했다. 부모가 화가 나서 다투면 조용히 옆에 와서 웃음 지으면서 두 부부의 화를 모두 풀어 주던 애교스러움, 간혹 부모가 때가 지나도록 밥을 먹지 않으면 예쁜 말로 식사를 권하는 어른스러움도 기록했다. 죽은 사람들을 위해 짓는 글이라도 칭송 일색이었던 일반적인 글쓰기와 다른 것이다.

다산은 개인의 죽음을 지나치거나 버려두지 않았다. 이렇게 기록하는 것을 매우 중시했다. 자신이 낳은 아이도 기록하고 자신이 겪은 일도 기록하고 자신이 만난 사람도 기록하고 자신이 지은 저작의 연유도 기록했다. 그 기록은 누군가에게 교재가 됐고 누군가에게 역사가 되며, 사회적 국가적 문제의식의 발단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알았다. 지금 우리에게 훌륭한 가르침을 주는 500여 권의 저술로 이뤄졌다.


아버지로 이웃의 아픔에 공감하다.

‘촌병혹치(村病或治)’·‘마과회통麻科會通’·‘의령(醫零)’·‘단방신편(單方新編)’등은 정약용이 지은 의서로 전한다. 이 책들은 의학사적 의미를 지닌다. 전래의 한의학이 포함하고 있었던 주술적인 측면을 강도 높게 비판한다거나, 서양의학을 소개한다거나, 당대까지 축적한 조선 의학적 성과와 중국을 포함한 서양의 의학까지 연구한 것은 높이 평가됐다.

다산은 자신이 의사로 알려지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마과회통麻科會通’과 같이 의학사에서 인정하는 의서를 편찬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 아버지로서 다산의 아픔이 있다.

‘지난번 네가 병마의 고통 겪을 때((접대 낭)汝苦痛楚), 나는 한창 즐겁고 편안하게 놀았었다(我方愉佚宕).’(‘億汝行’)”

이 시는 아들이 죽어가는 시기에 즐겁게 놀고 있었던 자신을 원망하며 아들에게 용서를 구하는 마음으로 쓴 것이다. 1789년(정조 13년) 다산은 넷째 아들을 천연두로 잃었다. 14개월 된 아들이었다. 이제 막 말문을 연 아들은 아버지 다산을 좋아했다. 진주목사였던 부친 정재원을 뵙기 위해 진주에 내려가려 문을 나서는데, 떠나는 다산의 옷자락을 어린 아들이 잡았다. 함께 데려가라고 졸랐다. 아들이 투정을 부린다고 생각한 다산은 잠깐 밖에 나갔다 오겠다며 선의의 거짓말을 하고 길을 나섰다. 그렇게 헤어질 때 활발했던 아이는 돌아와 보니 죽어가고 있었다. 그 아들이 병마에 신음하고 있을 때, 아무것도 모른 채 오랜만에 만난 친우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천연두로 죽어간 아이들을 고향 두척리에 묻으면서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당시의 아버지들처럼 자신을 한없이 원망했다.

온 나라가 천연두로 여러 자식을 잃고 슬픔에 빠졌을 때, 걱정하고 고민도 많았지만 사람들은 무지했고 돈이 없었으며 의술은 낙후했다. 속수무책으로 죽음을 맞는 부모·아이들이 많았다. 당시 의원(의사)들은 죽어가는 어린아이들을 구제하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구제하려 하지 않은 것이나 같았다. 천연두처럼 치료가 까다롭고 예방을 해야 하는 질병은 돈벌이가 안 됐다. 의사로서 돈을 더 벌기 위해 노력하는 것도 인지상정이거니와 예방을 하고 연구도 해야 하며 관리에도 많은 경비가 소요되는 질병을 누가 쉽게 하려 할 것인가.

아이들의 죽음을 지켜봐야 했던 부모들은 나라에 기대했다. 그러나 나라에서는 힘없는 백성의 고통에 눈을 감았다. 게다가 개인의 문제로 치부했다. 백성들은 나라가 백성들의 고통을 외면한 데 대해 불만을 가졌지만 힘이 없어 어디에도 하소연하지 못했다. 백성들은 ‘병이 들면 무당을 시켜 푸닥거리만 하고, …… 효험이 없으면 체념하고 죽어갈 뿐’(‘촌병혹치’의 서문 중)이었다.

“내가 글을 읽고 도를 배우는 것은 천하의 인명을 살리기 위함이다”(‘종두설’)

이는 다산이 내린 학문적 정의이다. 책을 읽고 공부를 한다는 것은 세상을 올바르게 살고 모든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길을 찾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아들을 잃은 아버지 정약용은 고통을 받고 있는 이웃을 구할 방법을 찾았다. 이 결과가 ‘마과회통’이다. 이 책은 자신의 고통을 다른 사람이 겪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자신과 같이 고통받는 아버지들이 없기를 바라면서 지은 것이다. 다른 사람의 고통에 대해 눈 감지 않았던 다산의 실학(實學)의 참 모습이다.

75세를 살다 간 다산 정약용을 제대로 읽어내는 것은 쉽지 않다. 다산이 살아온 삶의 편폭만큼이나 많은 시간과 적지 않은 지면도 할애돼야 할 일이다. 다만 다산의 몇몇 인생의 변곡점이 됨직한 사건과 계기들은 우리 시대의 문제들, 우리의 고통들에 몇 가지 지혜를 준다. 희망 주의, 이웃과 공감, 마음의 대화와 소통 등으로 요약할 수 있는 지혜이다.

김형섭 남양주역사박물관 학예사, 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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