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연한 봄이다. 주말에 내렸던 봄비 뒤엔 새싹들이 파릇파릇 돋을 것이 틀림이 없다. 우리나라는 사계의 차이가 너무나 뚜렷하여 모든 절기를 온전히 다 즐길 수 있다.

흥미로운 점은 국민성도 자연환경 못지않게나 역동적이라는 것이다. 각자 희로애락이 분명하여 쉽게 즐거워했다가도 쉽게 분노한다. 인종의 동질성까지 고려한다면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느 민족보다도 서로 공유하는 집단 정서가 강렬하달 수 있겠다.

소위 ‘냄비근성’이라는 것이 적절한 표현일 수도 있을 것인데, 이는 대다수가 몰입하는 사회정치적 이슈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어떤 시점에는 정치적 이슈가 어느 시점에는 안전의 이슈가 또 어떤 때는 교육이나 보육 이슈가 시민사회의 담론을 주도한다. 언론은 이슈 만들기를 선점하기 위하여 앞 다투어 동일한 기사를 반복적으로 재생산하고 시민들은 또 저대로의 감정을 실어 이슈에 몰입한다. 종일 티비만 켜면 똑같은 내용을 좌우 나누어 논평하다 보니, 일상생활 속에서도 좌인지 우인지를 가르려고 하는 이상한 풍조가 생겨나 이도 저도 아닌 쪽은 존재 자체를 하지 않는 듯 맞서 대결한다.

워낙 열정이 넘치는 국민성이다보니 내 편 네 편 좌우로 가르기에도 열심이다. 정치인들은 더더욱 이런 기조를 이용하기에 몰두하니 세상이 꼭 원래부터 두 쪽이었던 것처럼 아우성이다.

그런데, ‘내 편 네 편 가르기’는 꼭 한국인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심리학에서도 이런 현상의 불가피성에 대해 연구한 적이 있다. 타즈펠이라는 심리학자는 서로 안면이 없던 학생들에게 추상화 두 개를 보여주고 그림에 대한 선호도에 따라 소속 집단을 정하였다. 그런 후 일정한 시간동안 아무 의미가 없는 단순 작업을 수행하게 하고, 이후 실험참가자들에게 서로에 대한 선호도를 평가하게 하였다. 결과는 매우 흥미로웠는데, 애당초 어떤 이권도 개입되지 않은 무관한 사람들도 일단 그림에 대한 선호도로 인해 집단이 갈리게 되면, 자신과 동일한 집단 구성원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평가를, 상대 집단의 구성원에게는 부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이는 전혀 의미 없는 정보만으로도 일단 네 편, 내 편을 가르게 되면 집단의 소속에 따라 타집단 구성원에 대해서는 매우 편파적인 태도를 지닌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즉 단순한 차이 지각만으로도 차별이라는 것은 매우 쉽게 일어나며 구성원들에 대한 다양성 지각은 쉽지 않게 된다.

이런 일이 발생하는 원인에 대하여 심리학에서는 인간이란 원래 ‘인지적인 구두쇠’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즉 세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자극을 처리함에 있어 우리의 인지적 처리의 용량은 매우 제한되어 있어서 어떻게든 자극을 조직화하고 단순화하여 처리를 하게 되는데, 그러다보니 복잡하고 세세한 부분까지 처리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는다고 한다.

동시에 ‘기본적 귀인착오’라는 것도 있어서 자신에게 발생한 문제는 외부에서 그 원인을 찾고 타인에게 발생한 원인은 내부에서 원인을 찾는다고 한다. 즉 남이라고 생각하는 상대에 대해서는 원래부터 그는 혹은 그들은 나쁜 사람이었다는 식의 극히 단순화된 지각을 하게 된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다양성이라는 것이 온전히 존재하기란 매우 어렵다. 좌이지만 우이기도 하고 우이지만 좌이기도 한 입장이라는 것에 대해서, 우리의 인지구조는 귀를 기울일 만큼 여유가 없다. 그저 쉽게 대비가 되고 선명한 입장만이 쉽게 입력이 되는 것이다.

요즘 유행하는 용어 중에 ‘사이다’라는 것이 있다. 그 반대말은 ‘고구마’일 것이다. 심리학자들의 주장을 고려하자면 인간은 원래 선명한 ‘사이다’를 좋아하게 되어 있다. 하지만 현실은 전혀 ‘사이다’처럼 결론이 나지 않는다. 훨씬 복잡하게 얽혀 있어서 세세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언제라도 실수를 하고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세세한 것까지 인지적으로 처리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우리에게는 여유가 없다. 얼핏 보고 넘겨버리면 온통 ‘사이다’같이 명백한 일처리를 한 것 같겠지만 세월이 흐르면 그 당시의 결정이 후세에 많은 출혈을 가져올 수도 있는 것이다.

필자가 대학을 다니던 시절은 비교적 정답이 명확해보였다. 왜냐면 그때는 사회 전체가 한 방향을 강요하고 있어서, 다른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만으로도 올바르다는 확신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은 매우 다르다. 더 이상 인지적 구두쇠 노릇을 하다가는 복잡다단한 세상에서 도태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신중하고도 세심한 주의력이 필요한 시기이다.

이수정 경기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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