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중·후기 (7)김육과 경기 대동법의 전개

조선시대 중·후기-7. 김육과 경기 대동법의 전개

병자호란 이후의 국가 재정 논의

조선은 1636년(인조 14년) 병자호란에서 패배하자 청으로부터 커다란 재정적 압력을 받았다. 청은 수차례에 걸쳐 대규모의 병력 파병을 요구했고 전쟁으로 피폐해진 조선에 막대한 식량을 요구했다. 1644년(인조 22년)에 명나라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청이 북경을 차지한 뒤로도 조선의 재정 부담은 줄지 않았다. 해마다 청나라 사신이 조선을 방문했고 이들을 접대하느라 국고가 탕진될 지경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이 모든 것의 부담은 온전히 백성에게 돌아가는 것이었다. 조선 조정은 백성에 대한 지속적 부담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었고 재정 상황에 대해서도 재정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요구가 조정의 안과 밖에서 제기됐다. 조선시대에 국가 재정 문제를 해결하는 방책은 백성이 세금으로 바치던 특산물인 이른바 공물의 수취 방법을 바꾸는 ‘공물변통’에 있었다.

당시 위정자들은 공물변통이 필요하다는 데는 모두 공감했지만, 구체적 방법에서는 이견이 있었다. 지나치게 높은 공물 가를 낮추고, 그렇게 거둔 공물 가를 정부와 왕실이 절약해서 쓰자는 소극적인 의견과 토지 결당 수취액을 고정하고 공물 수취의 중간 과정을 합리화하자는 적극적인 의견이 그것이다. 공물 수취의 중간 과정을 합리화하자는 의견은 결국 ‘대동법’이라는 제도 개혁으로 입법화됐다.



▲ 대동법 시행 기념비. 김육은 1638년(인조 16년)부터 대동법을 강력히 건의했다. 대동법은 그로부터 13년 뒤, 1651년(효종 2년) 충청도에 첫 번째로 실시됐다.
대동법의 시행

조선 후기 실학자 정약용은 대동법을 높이 평가했다. 조선시대 지식인들은 대체로 정전제(井田制)를 이상적 제도로 생각했는데, 정전제의 현실적 구현이 바로 대동법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병자호란을 온몸으로 겪었던 반계 유형원 또한 대동법에 동의한 인물이다. 그가 ‘반계수록’ 집필에 착수한 해는 충청도에 대동법을 실시하기로 결정된 직후였다.

대동법은 이전까지 오래 누적된 조세 운영의 수많은 문제점들에 대한 개혁이었고 조선후기 시행됐던 가장 합리적인 세법이었다. 대동법은 토지 1결당 백미 12두만을 납부하게 하는 세법으로 그간 공물·진상·관수(官需)·쇄마(刷馬) 등 각종 명목으로 잡다하게 거둬들여 균등하지 못했던 조세를 형평하게 만든 것이다. 대동법은 이미 이원익과 한백겸의 건의로 1608년(광해군 원년) 경기도에 실시한 적이 있었지만, 전국적으로 확대되지는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638년(인조 16년) 김육이 충청감사로 제수되면서 대동법 시행을 강력하게 건의했다.

김육은 1649년 효종이 즉위하자 대동법 실시를 강력히 요구했다. 이 과정에서 당시 조정에서 사림세력을 대표하여 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김집(1574~1656), 김상헌(1570~1652)과 정치적으로 충돌했다. 하지만 결국 김육의 요구가 받아들여져서, 1651년(효종 2년) 충청도에 대동법을 실시하기로 결정됐다.

충청도에서의 대동법 실시는 이후 대동법의 전국적 확산에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 처음부터 대동법 실시에 적극적으로 찬성했던 사람은 많지 않았다. 많은 조정 관료들이 대동법의 취지를 긍정하면서도, 그 실현 가능성에 의문을 가졌었기 때문이다. 개혁의 폭이 너무나 크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충청도 대동법은 대동법이 충분히 실현 가능한 것임을 증명함으로써, 다른 지역으로의 확산에 기폭제가 됐다. 그 결과 1658년(효종 9년) 전라도 해읍, 1666년(현종 7년) 전라도 산군과 함경도, 1678년(숙종 4년) 경상도, 1708년(숙종 34년) 황해도 순으로 대동법 혹은 지역 실정에 맞는 공물변통이 이뤄졌다.

김육은 대동법의 실시가 백성을 구제하는 방편이면서 국가 재정 확보에도 도움이 되는 시책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대동법이 국가 재정을 부족하게 만드는 세법이라 생각하는 이들이 많아 실제 운영에는 진전이 없었다. 그러나 효종의 등극과 함께 김육이 우의정에 제수되면서 전기가 마련됐다. 김육은 효종에게 충청도와 전라도에도 대동법을 실시할 것을 건의했고 대동법이야말로 곤궁에 빠진 백성을 구제할 구민책이라 주장했다. 결국 김집(1574-1656) 등 산림 출신들과 불화를 낳기도 했지만 결국 효종 2년 호서지방에서도 대동법이 실시됐다. 김육은 호서 대동법에 만족지 않고 호남으로 확대 실시를 꾀했고 호서 대동법의 성공적인 시행에 힘을 얻어 1658년(효종 9년)에 호남지역에도 대동법이 실시됐다.

▲ 송하한유도


가평에 잠거한 경세가 김육

대동법을 입법화한 김육(金堉, 1580-1658)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발발했던 조선 초유의 국난 시기를 살았던 인물로 그의 현실 개혁은 조선이 처해있던 위기 상황과 무관하지 않았다. 왜란과 호란은 백성을 도탄에 빠지게 했고, 정부는 국가 재정을 비롯한 전후 복구 문제가 급박한 실정이었다. 전란 후 재정 복구책이 실시되는 과정에서 가장 영향력을 발휘했던 인물이 바로 김육이었다. 당시의 위정자들은 파탄이 난 국가 재정만을 생각했지만, 김육은 백성들을 구제하는 것이 첫 번째 일이라 생각했다. 10여 년간 농사꾼으로 살았던 김육이야말로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제할 최고의 적임자였다.

경기 대동법의 실시를 성공시킨 김육은 어린 시절 문학청년이었다. 12세에 ‘육송처사전’과 ‘귀산거부’를 지어 글 솜씨를 뽐냈고 ‘소학’을 읽다가는 “낮은 벼슬아치라도 진실로 사물을 사랑하는 마음을 두어야지 사람들을 구제할 수 있다”는 정자의 글을 읽고 백성 구제의 큰 뜻을 품기도 했다.

김육은 13세에 임진왜란을 경험했다. 피난 중에도 옷소매에 항상 책을 지녀 손에서 책이 떨어지지 않게 했다. 어린 김육을 고달프게 한 것은 전쟁만이 아니었다. 부친인 김흥우가 31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면서 가세가 기울기 시작한 것이다. 부모를 일찍 여읜 슬픔 속에서도 김육은 열심히 과거 준비를 했다.

1604년 한성의 사마시 초시와 회시에 급제하고 성균관시에서 수석을 차지했다. 소과를 통과한 후에는 본격적으로 벼슬길에 나가기 위해 문과시험 준비를 했다. 그러나 당시는 광해군대로 정인홍 등 대북파가 득세하던 시기였다. 서인의 정통을 계승한 김육으로는 조정에서 벼슬하고 싶지도 않았고 기회도 없었다. 김육은 광해군의 조정에 나갈 뜻을 접고 1613년 가평의 잠곡 청덕동 화개산 아래에서 가족과 함께 농사를 지으며 안빈낙도의 생활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거처할 집이 없어 굴을 파고 헛가래를 얽어 살았고 낮에는 나무하고 저녁에는 송진으로 불을 밝혀 책을 읽었다. 김육은 이곳에서 잠거했다. 세상이 어려우면 몸을 숨겨 때를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경세에 뜻을 둔 김육으로서 산골짜기에 몸을 숨기고 평생을 살아야 할 체질은 아니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집권하자, 곧바로 6품직의 벼슬을 받아 의금부 도사가 됐다. 마흔넷의 나이에 처음 얻은 벼슬이었다. 그러나 벼슬을 그만두고 과거시험에 응시해 정식으로 벼슬 생활을 시작했다. 인조대에 김육이 빠르게 벼슬길에 나간 것은 광해군대에 과거 응시의 뜻을 접고 가평 산골짜기에서 몸소 농사를 지은 그의 행실이 크게 평가를 받았기 때문이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세자시강원으로 있었던 김육은 세자를 따라 피난을 갔고 오십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는 시무책을 올리기도 했다. 김육의 강직한 성품은 왕을 능멸하는 것으로도 비춰졌다. 1629년에 관직을 삭탈당하자 한강을 바라보는 양근(현재 양평군 옥천리) 소천에서 우거하며 때를 기다렸다.

김육이 중앙으로 다시 진출한 것은 1632년 5월이었다. 홍문관 부수찬, 이조정랑, 사간원 사간 등을 지냈고 인조의 깊은 신임을 받아 승정원에서 근무하기도 했다. 중앙에서의 관직도 화려했지만, 목민관으로서의 치적도 탁월했다. 1635년 안변도호부사 시절에는 안변 관아의 무기고를 정비했고 관북 지역 유생들의 학풍을 진작하고 병사들을 조련했다. 이 시기에 생활이 안정되자 그는 자신의 집안 문적을 정리해 ‘청풍세고(淸風世稿)’를 엮었다.

김육은 일생 동안 4번을 중국에 갔다. 3번에 걸쳐 북경에 사신으로 다녀왔고 한 번은 심양에서 장기간 체류했다. 명말청초의 격변기에 중국의 사정을 눈으로 보면서 체험했으므로 누구보다 중국을 잘 알고 있었고 조중 외교에 일정한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그의 첫 사행은 1636년(인조 14년) 그의 나이 57세 때였다. 당시 관직은 정3품 당상관으로 안변도호부사 임기를 마친 뒤였다. 보통 동지사는 정2품 이상의 고관을 파견하는 것이 관례였으나, 위험한 해로로 가는 것이어서 기피하는 사람이 많았다. 김육은 정기 사행인 동지·성절·천추진하사에 임명돼 해로로 명조의 북경을 왕래했는데, 그의 사행은 명나라로 간 마지막 사행이었다, 1646년에는 사은사로, 1650년에는 대신 자격으로 북경을 왕래했다.

김육은 17세기 중반 동아시아 역사의 가장 중요한 고비에 중국에 있었다. 그는 중국에서 많은 것을 배우며 느꼈고, 선진적인 중국 문물이나 제도를 조선에 도입하고자 했다. 이러한 경험들이 그가 다른 관념적인 성리학자들 보다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사회개혁 정책을 추진하게 된 배경이자 실학의 선구자로 인정받는 요인이 됐다.

정성희 실학박물관 책임학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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