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남자가 수면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는 데 몰두해있다. 그러한 남자의 모습을 애타는 눈빛으로 지켜보는 여인이 있다. 여인은 바로 옆에 있는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남자의 무관심에 말은 못한 채 애틋한 시선으로 바라만 보고 있다. 아름다운 여인이 곁에서 간절함을 표현해도 그것을 알아채지 못하고 오직 물속의 제 모습만 바라보고 있는 남자의 마음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 존 윌리암 워터하우스(John William Waterhouse, 1849-1917), ‘에코와 나르키소스’ 1903년, 캔버스에 유채, 109×189cm, 리버풀 워커미술관

그리스로마신화 속에 등장하는 숱한 이야기 중에는 안타까운 감정을 유발하는 사랑이야기가 적지 않다. 연못의 수면에 비친 자신의 모습과 사랑에 빠져 끝내 죽음에 이른 사내와 사랑하는 사람을 앞에 두고도 사랑을 고백하지 못한 채 오직 메아리로만 남게 된 나르키소스와 에코의 사랑이야기도 그중 하나이다. 이 신화는 큐피드와 프시케, 아폴로와 다프네, 비너스와 아도니스, 피라모스와 티스베 등과 함께 문학예술에 많은 모티프를 제공한 이야기에 속한다.

잘 생긴 외모로 여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나르키소스. 지독한 자기애로 결국 허망한 죽음에 이른 신화 속의 인물이다.

‘자기도취증’을 뜻하는 심리학 개념인 나르시시즘(narcissism)도 나르키소스의 신화에서 유래되었다. 적당한 나르시시즘은 각박한 현대를 살아가는데 최소한의 자존감을 주는 긍정적 측면이 있다. 그러나 나르키소스(Narcissus)처럼 자기만족의 허상 속에 갇혀 결국 자신을 병들게 하거나 죽음에 이르는 지독한 나르시시즘은 부정적 측면이 강하다.

아름답지만 수다스러웠던 에코는 제우스의 애정행각을 들키지 않게 하려 했던 행동으로 헤라의 저주를 받아 타인의 마지막 음절만 되풀이하는 형벌을 받았다. 이 형벌로 에코는 나르키소스를 사랑했지만, 그의 끝음절만 반복하다 끝내 자신의 진실한 사랑을 밝히지 못한 채 죽어 목소리만 남겼다.

나르키소스와 에코의 이뤄지지 못한 비련은 때때로 여러 상황으로 비유된다. 자아도취에 빠진 채 타인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는 사람, 속마음 대신 오해할 수 있는 말만 되풀이하여 불신과 거짓을 확대하는 사람을 대변한다. 자기애에 빠진 나르키소스나 진실을 전달할 수 없는 에코는 허상과 거짓으로 뒤섞인 현대사회의 한 측면이다.

변종필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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