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중·후기-8. 경기도의 기근참상과 구휼정책

▲ 남한산성(해동지도), 산성 안에 구남창, 동창, 북창, 별창, 수창, 영창 등이 창고가 있다. 이런 창고의 비축곡이 기근이 들면 경기도에 지원됐다.
참혹한 6년(1666년~1671년)

기근이란 경제위기이다. 오늘날 경제위기는 금융에서 비롯되지만, 전통시대는 흉작에서 비롯됐다. 경제위기는 사회를 송두리째 뒤흔든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따라서 과거 기근이 왜 발생했고 수습 과정이 어떻게 진행됐고 향후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는 우리에게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대목이다.

경기도 역사에서 가장 참혹한 시기를 들라면 1666(현종 7년)부터 1671년(현종 12년)까지를 들 수 있다. 이때 내리 6년간 기근이 들었기 때문이다. 1666년에는 대기근이 들었다. 1670~1671년에도 그랬다. 6년 동안 연거푸 기근이 든 경우는 한국 역사상 유래를 찾기 힘들다. 1~2년 또는 2~3년이 보통이었다. 이런 점에서 이때 경기도에 미친 기근의 위력은 쉽게 짐작될 수 있다.

전통시대 기근은 봄·여름 철 가뭄에 의한 흉작으로 찾아왔다. 이때 경기도 역시 그랬다. 1667년 윤4월에 임금이 가뭄으로 구언(求言)하는 교지를 내렸고 5월에는 여러 곳에 근시 및 중신을 보내어 여러 곳에 기우제를 지내게 했다. 8월에 영의정 홍명하가 “올해 가뭄이 이토록 심하게 들었는데, 경기 지방의 흉년이 다른 도에 비해 더욱 심합니다.”라고 했으니, 경기도 가뭄은 심했음에 분명하다. 또한 기근은 여름·가을 철 홍수로 인한 흉작으로도 찾아왔다. 이 외에 풍해, 냉해, 충해에 의해서도 기근이 들었다.

이런 점 때문에 각계각층은 수리시설 확충에 관심을 가졌다. 하지만 정부 관심 부족과 기술력 부족, 그리고 수리시설을 독점하고 개간하려는 사리사욕 때문에 소기의 성과를 거두기 어려웠다. 그 결과 농사철에 비가 제 때 오지 않을 경우 직격탄을 맞을 수 밖에 없었다.



강화도·남한산성 곡물 방출

기근이 들면, 식량이 바닥난다. 사람들은 굶주리기 시작한다. 이때 지자체(군현)나 중앙정부에서 가장 먼저 취한 방법은 비축 곡물을 방출하는 것이다. 지자체의 비축곡은 가장 먼저 고갈된다. 바로 이어서 중앙정부의 비축곡이 방출되어야 하는데, 경기도는 다른 지역보다 좋은 조건을 두 가지나 지니고 있었다.

첫째, 도내의 강화도와 남한산성에 거대한 군사시설이 건설돼 있고 그곳에 방대한 곡물이 비축돼 있었다. 1667년 5월 경기도의 백성들이 매우 굶주린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임금이 “강화도와 남한산성의 곡식을 나누어서 진휼해야 되지 않겠는가?”라고 말했다. 우의정 정치화가 “앞으로 경기를 진휼할 재물은 오로지 이것만을 믿고 있습니다.”고 답했지만, 쉽지 않은 문제였다. 이들 비축곡은 비상시 군량미여서 함부로 방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식량이 바닥난 상태에서 이 원칙만을 고수할 수 없었다. 뒷날을 생각해 강화도 비축곡 500석을 방출하는 데에 그쳤다. 1669년 기근 때에는 경기감사의 요청의 의해, 강도미(江都米) 7천 석과 남한미(南漢米) 3천 석을 꺼내어 도민들에게 환곡으로 나눠줬다. 환곡이란 이자를 붙여 원곡을 회수하는 것이다. 1671년 기근 때에는 경기감사 오정위(吳挺緯)가, 종자로 쓸 벼와 진구에 쓸 곡물을 얻어 각 고을에 옮겨 보내기를 청하니, 조정에서 강화도의 벼 7천600석과 쌀 8천 석 및 남한산성의 쌀 6천 석을 지급했다.

둘째 항상 방대한 비축곡을 보유하고 있는 수도와 경기도는 접하고 있다. 1667년 6월에 임금은 경창(京倉)의 쌀 300석과 좁쌀 400석을 내어 경기 지역의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라고 명했다. 경창이란 관료들 녹봉을 지급하기 위한 창고다.

이렇게 군사기지와 경창의 비축곡을 다량 방출해 일정한 효과는 보았지만, 몇 가지 문제가 발생하고 말았다. 우선은 경기도의 수령 가운데 진휼할 곡식을 사사로이 쓴 사람이 있었다. 각 고을의 수령들이 민결(民結)에 따라 응당줘야 할 숫자를 덜어내어 사사로이 서울에 사는 사람에게 주었으므로 백성들이 원망하는 말이 퍼지고 있었다. 굶주린 경기도 사람에게 갈 곡물이 서울의 수령 지인들에게 갔다는 말이다. 또 다른 문제로 너무 많은 곡물을 방출하다 보니 회수가 어려운 상황에 이르고 말았다. 경기도에 나눠 준 곡물이 무려 22만여 석이나 돼 원수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형세이기 때문에 특별히 절반만 받아들이게 했다. 상환능력이 없는 채무자에 대해서는 절반만 회수하고 절반은 유예하겠다는 말이다.



급식소 운영

곡물이 바닥나 굶주리고 있는 사람에게 무료 급식을 시행하는 것도 급선무였다. 이때 여러 날 굶주린 사람에게는 따뜻한 밥을 주는 것이 아니라, 죽을 쑤어서 주어야만 소생할 수 있다. 그래서 각 고을에서는 읍내나 인구 밀집 지역에 죽소((죽 죽)所)를 설치해 운영했다. 그렇다고 무한정 죽소를 개설할 수는 없어, 1월15일부터 5월10일 정도까지 운영했다.

1668년 1월에 경기도 기아자들은 날마다 죽을 끊여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조정에서는 2월 2일부터 죽을 끓여 진구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경기감사에게 분부했다. 경기감사는 도내 기민들에게 죽을 쑤어줘 진휼했는데, 처음에는 남녀노소 1천524명이었으며, 그 뒤에는 2천800여 명으로 불어났다. 그때 굶주린 나머지 죽은 백성들이 광주(廣州)뿐만 아니라 경기도 곳곳마다 꽉 차 있을 정도였다. 기근이 심해 긴박했던 1670년 12월에는 규정을 무시하고서 1월 시작과 함께 죽소를 설치하자는 요청이 있었다. 이듬해 1671년에도 죽소를 개설했는데, 1월16일부터 2월20일까지 죽을 먹으러 간 굶주린 경기도 백성이 10만67명이었다. 이때 임금이 “경기도에 굶주린 백성이 수십 만 명이라고 하니 듣기에 놀라운데, 나라의 저축이 이미 바닥이 났으니 어떻게 진휼을 계속할 수가 있겠는가?”라고 했으니, 경기도 기근의 참상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이처럼 비축곡을 다량 방출하고 죽소를 규정 외로 운영해 기아자를 구제하는 데에는 일정한 효과를 보았다. 그러자 인근 도의 기아자들이 사회복지 시설이 잘 되어 있는 경기도로 속속 몰려들고 있었다. 1667년 6월에 승지 민유중이 “신이 지난번 관동 지방에 가서, 유리걸식하는 굶주린 백성들이 어린아이를 업고 도로에 연이어, 경기와 호서·영남 지방으로 흘러들어 오고 있는 자가 매우 많은 것을 눈으로 보았는데, 보기에도 참혹하였습니다.”고 말했다. 이런 일은 이때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황해도 사람들도 온 적이 있었다.



세금 감면

기근이 들어 당장 먹을 것이 바닥난 상황에서 백성들을 구제하는 길로 세금을 감면하는 일도 있었다. 1667년에는 경기도의 전세와 대동미 전부를 감면하게 했다. 1669년에는 대동미 12두 가운데 2두를 감하는 조치를 취했다. 1671년에는 전세를 실어 나르는 데에 민폐가 적지 않을 것이니 받아서 모두 본도에 둬 구휼할 밑천으로 삼으라고 했다.

토지세 외에 군포를 감해주기도 했다. 그러면 군포에 의지해 온 기관의 경우 수입이 줄어들 수밖에 없는데, 그런 기관은 부족한 수량을 호조에 비축된 것과 병조·훈련도감의 군포를 가져다 충당해 쓰도록 했다. 이때 경기 지방의 각종 신역(身役)을 지금 견감해야만 한다는 요청에 의해, 경기도 안에서 재변을 당한 고을의 노비신공도 경감해 백성들의 어려움을 돌봐주도록 했다. 노비신공이란 중앙부처에 소속된 노비의 몸값을 말한다.

그리고 공물을 줄여주기도 했다. 경기도의 공물 가운데 호피와 표피가 있는데, 흉년이 든 1667년과 1670년에 각각 그것을 감하도록 했다. 호피와 표피는 이른바 산척(山尺)들이 산 속을 헤집고 다니며 호랑이와 표범을 잡아서 조달하는 것인데, 기근이 든 해 그렇지 않아도 열악한 이들이 공물을 마련한다는 것이 큰 부담이어서 이런 조치를 취한 것이다.

이러한 세금 외에 백성들을 괴롭히는 행정행위를 기근이 들면 금하게 하는 조치도 취해졌다. “수령을 맞이하고 보낼 때에 굶주린 백성들이 그 폐해를 많이 받고, 진구하는 책임을 또한 신참 수령에게 맡길 수가 없습니다. 각도의 임기가 찬 수령들을 내년 보리 가을까지 그대로 잉임시켜 진구하는 일을 책임지우소서.”라고 했듯이, 수령 교체를 중단했다. 그리고 도망간 노비를 잡으러 다니는 노비추쇄도 금지시켰다.



▲ 금천현감 이보가 진휼을 잘 실시해 주민들을 많이 살려냈다는 실록 기사
굶주림과 전염병으로 죽다.

비축곡을 방출하고 무료 급식소를 운영하고 세금을 감면해도 결국 굶주림을 이기지 못해 죽은 사람이 적이 않았다. 거기다가 전염병까지 돌아 굶주림으로 면역력을 상실한 사람들을 덮쳤다. 1668년에 도내 전역에 죽은 자가 넘쳤다. 1671년에는 1월 한 달 동안 전염병으로 죽은 자가 100여 명이나 됐다. 우역(牛疫)이 돌아 소도 많이 죽어 백성들이 경작할 의욕을 잃고 말았다. 굶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도적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분노한 나머지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상황이 이에 이르기 전부터 지역 재력가들은 사비를 들여 구휼에 나섰다. 그러면 주민들이 그 공로를 기억하기 위해 ‘구휼비’ 또는 ‘공적비’ 등을 세웠다. 물론 쌀값이 오르는 때를 이용해 돈을 버는 악덕 재력가도 있었다.

또한 수령도 구휼에 나섰다. 자체 비축곡, 정부 지원곡, 신규 모금곡 등으로 진휼을 실시했다. 정부는 수령의 진휼 실태를 감독하기 위해 암행어사를 파견했다. 어사에 의해 잘하거나 못한 수령이 보고됐다. 1671년 김만중 어사에 의해 “경기도 안의 진휼 정사는 금천(衿川)이 가장 잘하였습니다.”고 보고됐다. 당시 금천현감은 이보(李(더부룩할 보))였다. 김만중은 이보가 “소금·간장·채소 따위 물건을 미리 비축해 뒀다가 섞어서 죽을 만들어 굶주린 백성을 먹이고 병을 앓는 사람을 따로 유치해 정성껏 구완해 치료했기 때문에 금천 백성은 한 사람도 죽은 자가 없다 하니, 참으로 아름답습니다.”고 칭찬했다. 이런 현감에 대해 금천 사람들이 선정비를 세워 그의 덕을 기렸을 것인데, 현재 그 비석은 찾아지지 않는다. 반대로 진휼곡을 빼돌리는 등 악행을 저지른 수령도 있었다.

이런 일을 위해 수령은 지방관청에 진휼고라는 기구를 뒀다. 후대의 자료이지만 ‘경기지’를 보면, 양주목에 진휼고가 있었다. 이곳에는 자체 진휼용 곡물이 비축돼 있었다. 또 수령의 진휼 행정은 기록으로 남겨진다. 후대의 일이지만, 서유구는 수원유수로 있으면서 ‘화영일록’에 7차례 분진(分賑)을 실시한 내용, 중앙에 곡물을 지원해달라고 요청한 내용 등이 기록돼 있다.

김덕진 광주교육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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