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학의 전래와 수용”

▲ 천진암 성지. 한국천주교회의 발상과 관련된 곳이다.


책으로 전파된 서학

서학(西學)은 17세기 초에 중국을 통해 조선에 전래되었다. 서학은 이른바 유럽문화의 충격인 ‘Western Impact’의 뜻을 더 함축하고 있다. 이때의 서학은 서양의 과학기술과 종교가 모두 포함된 용어이다. 그러나 18세기 말 이후 조선에서 서학이라 지칭할 때는 대개 서교(西敎), 즉 천주교신앙만을 가리키기도 한다.

우리 역사에서 천주교 신앙을 비롯하여 과학기술이 포함된 서학은 특이하게도 사람에 의해 전파된 것이 아니라 한문으로 쓰여 진 책을 통해 전래되었다. 특히 조선에서 천주교가 수용되는 과정에서 드러난 특징은 선교를 통하지 않고 조선인 스스로의 자발적 노력에 의해서 이뤄졌다는 사실이다. 세계사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천주교의 자발적 수용은 명말 청초 이래 중국에 입국한 선교사들이 쓴 한역서학서(漢譯西學書)라 불리는 번역서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마테오 리치 등 당시 선교를 위해 중국에 온 예수회(Jesuite) 선교사들은 선교의 방편으로 그리스도교 교리와 함께 서양의 과학문화를 한역(漢譯)한 책을 발간하였다. 그런데 이들 선교사들이 전한 신앙은 중세 스콜라 철학을 기반으로 한 그리스도교였다. 중국 선교 1세대인 마테오 리치를 비롯한 예수회 선교사들은 그리스도교를 중국사회에 잘 전파하기 위해 중국의 주류사상인 유학에 주목하였고, 결국 보유론(補儒論)에 입각하여 그들의 신앙을 설명했다. 보유론은 중국의 유교와 서양의 그리스도교가 교리상 서로 충돌하는 것이 아니며,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은 유교의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여 완성시켜 준다는 논리였다. 보유론은 유교사회에서 서양의 그리스도교를 거부감없이 선교하기 위해 만들어낸 논리였다.

17세기 이래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전래되었던 서학관련 한문서적들은 대부분 보유론의 입장에서 저술되고 번역된 것이었다. 당시 이 책을 읽었던 중국과 조선의 지식인들은 유교문화의 전통을 포기하지 않고도 천주교를 받아드릴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천주교에 대한 호불호는 있었지만, 대체적으로 조선후기 지식인들은 서양 문물 중에서도 국가를 발전시킬 과학기술에는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수용에 긍정적이었다.



▲ 자명종
서학 전래의 ‘신호탄’

서양문물이 공식적으로 조선에 전래된 것은 1631년이다. 명나라에 사행사로 갔던 정두원(鄭斗源)이 귀국길에 등주에서 선교사 로드리게스로부터 천주교 서적과 함께 천문도, 천리경, 자명종 등 서양의 과학서적과 기기를 가져오면서 부터이다. 이 사건을 조선후기 서양문물 전파의 신호탄으로 보기도 한다. 이 무렵에는 실학자 가운데 일부가 서양의 과학문명에 대해 관심을 보였으며, 파급 정도는 크지 않았다.

서학에 대한 조선 지식인들의 관심은 18세기에 들어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북경에 가는 사신들은 서양의 서적과 문물기기를 살피고 천주교 성당을 둘러보는 것이 기본 코스였다. 이들은 서양 선교사들을 만났고, 한역서학서를 읽은 뒤라 이전보다 훨씬 심도있게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어느덧 마테오 리치가 쓴 『천주실의』는 중국에서 흔하게 사오는 책이 되었고 서학에 관심있는 지식인들이라면 읽어 볼 수 있었다. 마테오 리치는 『천주실의』에서 그리스도교의 유일신을 유교의 상제(上帝)에 결부시켜 ‘천주(天主)’라는 개념으로 중국에 소개하였다. 그러나 조선에 천주교가 수용될 당시 ‘천주’개념을 중심으로 한 보유론은 이미 중국 교회에서 비판받고 있었다. 때마침 조선에서도 1791년의 윤지충사건을 계기로 서학을 탄압하는 길로 접어들었고, 이러한 과정에서 조선 교회 창설에 참여했던 양반 지식층들은 천주교를 떠나 자신이 원래 속했던 유교문화로 회귀해갈 수밖에 없었다.



성호학파의 서학 수용

서학은 실학자들이 관심을 가졌던 조선후기 외래사상이었다. 서학에 특히 관심을 가진 실학자는 성호 이익이었다. 그는 18세기 전반에 서학에 대한 인식을 지식인 사회에 심화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중국을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이익이 상당수의 한역서학서를 접할 수 있었던 것은 부친의 공이 컸다. 부친인 이하진은 사행으로 북경에 갔다가 수천 권의 서적을 구입해 왔는데, 그 가운데는 명말청초에 중국에서 활동하던 예수회 선교사들이 쓴 서학 서적이 상당수 있었다. 당시 이익은 『직방외기(職方外記)』를 비롯하여 『천주실의(天主實義)』 · 『천문략(天問略)』 등 20여 종이 넘는 다양한 서학서들을 읽었다.

성호 이익은 서학 전반에 대해 폭넓게 이해한 인물이었지만,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다. “천주는 곧 유교의 상제와 같다. 그런데 천주를 공경하여 섬기고 두려워하여 믿는 태도는 바로 불교의 석가와 같다.”라 하여 천주교를 불교와 동일시하였다. 성호 이익은 천주교 신앙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었지만, 서양과학에 대해서는 그 탁월성을 인정하고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결국 성호 이익의 양면적 입장은 성호학파 안에서 서학에 대한 두 갈래의 입장 차이가 나오게 되는 양상을 초래하였다.

성호 문인들은 정통 유교 입장에서 천주교 교리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취하는 공서파(攻西派)와 과학기술과 윤리적 해석을 수용하는 신서파(信西派)로 분리되었다. 이익의 초기 제자들인 신후담·안정복 등 공서파의 대표주자들은 서양과학에 별다른 관심도 없었고 천주교 교리에 대해서는 매우 비판적 반응을 보였다.

반면, 성호의 후기 제자들과 그 계승자들인 권철신·이가환·이벽·정약용 등은 서양과학기술에 적극적인 관심을 가졌고, 천주교 신앙에까지 빠져 들어갔다. 권철신을 중심으로 문인들이 모여들어 강학하던 천진암의 주어사 강학회에서는 당시 천주교 교리에 깊은 이해와 확신을 가졌던 이벽이 참여하면서 사실상 천주교 교리에 관한 토론이 일어났던 것이다.

이가환은 이익의 종손으로 정조의 깊은 신임을 받아 공조판서에까지 오른 인물로 특히 수학과 천문학 등 서양과학에 해박했다. 이벽은 천주교 교리에 대해 가장 해박한 이론가였으며, 『성교요지(聖敎要旨)』나 「천주공경가(天主恭敬歌)」라는 천주교 교리를 해설하고 찬양하는 가사를 저술하기도 하였다. 이벽의 저술은 유교와 천주교의 조화를 염두에 둔 예수회의 보유론적 논리를 계승한 것으로 천주교 신앙과 유교가 서로 보완할 수 있는 입장에서 쓰여진 것이다.

이처럼 조선후기 서학을 조선에서 처음으로 수용한 계층은 성호 이익의 문인들이었다. 이들은 대개 신분상 양반들이었고 정치사상적으로는 기호(경기도) 남인 출신으로 중소지주적 특성을 가지고 있던 인물이었다. 이들 가문은 남인들이 축출되는 ‘경신대출척’이후 정치적으로 소외되다가 정조년간의 탕평책에 힘입어 다시 조정에 나갈 수 있었다. 이들은 당시 청나라 학풍의 영향을 받아 육경六經 중심의 고학古學에 관심을 가졌고, 현실성과 실천성이 떨어져 버린 예학 중심의 성리학적 학문풍토에 비판적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더욱이 이들은 고학 연구를 통해 선진 시대의 유학을 연구하며 성리학 이외의 여타 사상, 즉 양명학에 대해서도 탄력적 입장을 가졌고 이는 결국 서학을 수용하는데 까지 이르게 하였다.

18세기 서학을 수용했던 지식인들은 유교와 천주교의 조화, 즉 보유론에 기초한 ‘한역서학서’를 통해 서학을 접했고, 서양문물에 대한 호기심과 관심에서 점차 신앙으로 발전해 나간 특징을 가지고 있다. 서학은 조선사회에 대한 비판의식과 시대정신을 치열하게 고민했던 조선 지식인들이 몰두했던 신사조였다. 그러나 학문적 관심에서 출발한 서학은 점차 신앙으로 옮겨갔고, 천주교 박해 이후에는 신앙은 물론이고 학문적 관심마저도 멀리하게 되었다.

정성희 실학박물관 책임학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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