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턴가 우리 사회에서 ‘갑을관계’란 말이 자주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갑을’이란 계약을 맺을 때 단순하게 계약 당사자들을 각각 지칭하는 수평적 용어이다. 요컨대 그것이 신분의 높낮이, 또는 서로간의 주종이나 우열 관계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랬던 것이 갑이 항상 을에 우선하여 등장하는 데서 전하여 어느 틈에 갑과 을은 서열을 따지는 용어가 되었고, 갑을관계는 양자 간의 수직적 관계를 의미하는 용어로 인식되게 되었다. 이제는 갑을관계라고 하면 대중들은,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다양한 강자와 약자, 지배자와 피지배자, 명령하는 자와 명령받는 자의 불평등 관계를 떠올린다.

21세기의 중요한 화두 가운데 하나로 소통, 즉 의사소통(Communication)을 이야기 한다. 소통은 한자로 ‘疏(트일 소)’와 ‘通(통할 통)’이라고 쓰며 국어사전에서는 ‘막히지 않고 잘 통함’, 또는 ‘뜻이 서로 통하여 오해가 없음’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너도 나도 외치는 소통이 사전적 정의처럼만 이루어진다면 그 무엇을 걱정하겠느냐 만은, 다수의 사람들은 이러한 소통조차도 쌍방향이 아니라 일 방향으로 하려하니 문제이다. 즉 서로 통하려는 게 아니라, 자신의 의견만 옳다하고 자신의 뜻만 전달하려 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그게 마음대로 되지 않으면 각자가 가진 힘으로 상대를 제압하려 하고, 어느 틈에 양자 간의 힘겨루기가 되고 이렇게 ‘갑을관계’는 형성된다.

언론에서는 자주 ‘갑의 횡포’가 보도된다. 화풀이처럼 다른 사람들의 인권을 유린하거나 폭력도 마다않는 기업의 대표, 백화점이나 음식점 등에서 직원들에게 함부로 하며 모욕적 언사를 퍼붓는 사람 등등. 이런 기사를 마주할 때면 사람들은 공분하며 그들을 공격한다. 그런데, 가만 돌이켜 보면 온전히 그들을 탓할 수 있는 사람은 과연 누구인가란 생각을 한다. 폭력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모욕적 언행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우리 모두는 소위 ‘을’일 수 있는 사람들에게 완벽하게 수평적으로 대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자녀라는 이유로, 제자라는 이유로, 이 세상을 먼저 경험한 선배라는 이유로....서로의 의견이 다를 때 상대의 입장이나 의견은 듣지도 않은 채, ‘나는 옳고 너는 잘못’되었다는 식으로 감정의 폭력을 휘두르지는 않았을까?

혹은 내 시간에만 맞추어 일방적으로 약속을 정한다거나, 나의 감정에, 나의 취향에 다른 사람이 동참하기를 강요하기는 않았는지. 더 나아가 직업으로나 연령으로나 상대적으로 ‘윗사람’의 위치에 있는 경우가 많다보니 ‘나의 선행’이 뜻하지 않게 ‘상대의 불편’을 강요한 것은 아닐까란 생각을 한다. 언론에 보도되어 공분을 산 행동들과 차이는 있겠지만, 이 모든 행동의 가운데에 자기중심적 사고가 지배하고 있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그리고 그 자기중심적 사고는 결국 스스로에게 너그럽지 못한 자존감의 결핍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베트남 출신의 유명한 승려인 틱낫한 스님은, 그의 저서 『화』에서 ‘마음이 너그러워지는 다섯 가지 훈련’을 설파한다. 그 첫 번째 자각 훈련은 삶을 존중하기, 두 번째 자각 훈련은 너그러움 기르기, 세 번째 자각훈련은 성에 대하여 책임지기, 네 번째 자각훈련은 깊게 귀 기울이기와 사랑의 말하기, 다섯 째 자각훈련은 무조건적이 아닌 의식적인 소비하기가 그것이다. 요컨대 화를 낸다는 것은 스스로의 마음이 너그럽지 못하기 때문이고, 마음이 너그럽지 못한 것은 그 개인의 자아 존중감이 낮고, 자신에 대한 확신이 없는 데서 오는 일종의 피해의식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의사결정에는 당연히 입장의 차이가 따르게 마련이고,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상대방의 의견보다 내 의견이 합리적일 수도 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일방적으로 강요할 수는 없다. 적어도 소통이라면 상대의 의견도 존중하며 설득해야 한다. 상대가 나보다 어리고 미숙한 존재라고 해서 내 의견을 강요한다면 그것이 갑의 노릇, 소위 말하는 갑질을 하는 것이다. 물론 요즘은 슈퍼 을도 존재하지만, 그러나 대부분의 을은 아직 서럽다. 어렵고 힘들더라도 상대의 의견을 충분이 들어주며 설득하고 이해시키는 것, 그것이 바로 소통이다. 오늘도 여전히 억울한 사람들이 외침이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갑을관계가 아닌 소통의 관계로 거듭 나기를 바란다.

김상진 한양대 교수, 한국시조학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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