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후기 (10)경기인의 삶


▲ 김득신作 반상도, 지본수묵담채, 27x33  북한평양조선미술관 소장
▶조선후기 경기인(京畿人)의 삶



풍속화가였던 김득신(1754∼1822)의 반상도(班常圖)다. ‘반상’이란 양반과 평민이다. 길 가다 양반 행차를 만난 백성(百姓) 부부가 넙죽거린다. 패랭이를 쓴 남편의 허리가 90도 이상 꺾여 머리는 이미 땅 끝을 향하고 있다. 몸을 지탱해주던 지팡이를 땅에 놓은 후였다. 육족(六足, 말의 다리 넷, 말을 끄는 하인의 다리 둘)도 모자라 뒤편에 짐꾼까지 대동한 양반님네는 사뭇 기세가 당당하다. 그를 버틴 말은 힘겨운 듯 뒤춤이 엉거주춤하다. 주인을 모신 하인조차 백성 부부에게 던지는 시선이 곱지 않다. 거들먹거림이 속내까지 배어있다. 경기인을 포함한 조선후기 보통사람들의 삶이었다. 이런 평범한 이들의 삶을 엿보려 한다.



▲ 양주별산대놀이 중 애사당놀이.
양반과 백성(常民)

한 사회학의 연구성과에 따르면, 조선시대에 인구는 16세기에 1천만명을 넘었고, 임진왜란·병자호란 전후 감소했다가 18세기 중엽 1천7백만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증보문헌비고’라는 자료에서도 비슷하다. 특히 1669년(현종 10년) 5백만 명에서 1693년(숙종 19년) 7백10만 명으로 급속히 증가했다가 이후 6백40여만명과 7백50여만 명의 사이를 지속한다. 이 통계는 직역을 부담하는 정호(丁戶)를 기준으로 한 것이서 세배 정도를 곱하면 추정이 가능하다. 급속한 감소와 증가 원인은 콜레라·두창 등 전염병, 농업생산력의 증가와 도시화였다. 조선후기 경기도의 인구수는 정호를 기준으로 55만명에서 67만명 사이다. 약 170만에서 200만 명 가량으로 추정된다.

‘사대부의 나라’ ‘양반 사회’였던 조선사회에서는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역할이 분명했다. 본래 10% 내외였던 양반은 점차 늘어났고, 임진왜란 이후 조선의 백성들은 모두 양반이 되려했다. 변화하는 산업구조에서 우월한 경제력을 갖춘 농상공인과 천민들은 양반으로의 신분 상승을 꾀했다. 다산 정약용(1762~1836)은 신분세탁을 빗대어 조선후기 신분제의 붕괴를 알렸다. “상민들이 군역을 면하기 위한 방법의 하나로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다른 사람으로 바꾸어 버리거나 족보를 위조한다”. 그 실태는 심했다. 울산의 경우, 1729년(영조 5년) 계층구조가 양반 26%, 상민(백성) 60%, 노비 14%였다. 그런데 양반층은 꾸준히 증가하여 150여 년이 지난 1867년(고종 4년)에 양반 64.5%, 상민 34%, 노비 0.5%로 바뀌었다. 양반만 있는 세상이 되었다. 억지스럽지만, 울산의 경우는 경기도에도 적용될 수 있다. 상부가 비대하고 하부가 좁은 위태한 역삼각형의 구조였다. 족보가 수없이 만들어지던 200여 년 전, 우리는 누구나 족보를 가진 양반이 되고 있었다.



▲ 김홍도作 논갈이, 단원풍속도첩. 보물 527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 농민

“농업이 세상의 가장 중요한 산업”이다. 지금은 농업을 생산(1차)과 가공(2차)에 더하여 체험 등의 서비스(3차)를 융복합한 6차 산업으로 범주하기도 한다. 하지만, 불과 백여 년이 채 지나지 않은 때만하더라도 농업은 국가산업의 근간이었다. 백성의 먹거리와 직결된 이 업을 담당하는 사람들이 농민이었다. 산수화나 풍속화에서 농민은 목가적인 모습으로 그려졌지만, 전혀 다른 삶을 살았다. 그들은 양반으로 묘사되는 땅주인과 관청의 1차 수탈 대상이었다. 땅 주인에게 몇 배미를 겨우 빌려 농사짓는 소작이 대부분이었다. 혹 땅을 가지고 있더라도 요즘같은 봄날에조차 주린 배를 움켜쥐고 ‘보릿고개’를 넘어 하루하루를 겨우 연명할 뿐이었다. 봄철의 농사일로는 입춘과 우수가 있는 정월의 농사준비, 경칩과 춘분이 있는 3월의 논밭갈이와 약재 캐기, 가축 기르기, 청명과 곡우가 있는 4월의 파종과 과수(果樹) 접붙이기, 장 담그기 등이 있다. 정신없는 하루를 보낸다. 다산의 둘째인 정학유(1786∼1855)가 지은 ‘농가월령가’에 서술된 내용이다. 와중에 그들은 농요를 부르거나, 삼삼오오 두렁에 앉아 왁자지껄 얘기했다. 입춘에 보리뿌리의 개수로 풍흉을 점치는 일도 빼놓지 않았다.

‘삼시 세끼’ ‘조석 두끼’. 이덕무(1741~1793)는 ‘청장관전서’에서 아침저녁으로 한 되(800~1000g), 끼 당 다섯 홉(400~500g) 정도를 먹는다고 했다. 그 손자인 이규경(1788∼?)은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 2월~8월까지는 세끼, 9월~정월까지는 두끼를 먹는다고 했다. 농사일로 바쁜 나날과 손이 조금 한가한 때의 끼니는 달랐다. 점심은 말 그대로 “뱃속에 점을 찍을 정도로 간단한” 옵션널(Optional)이었다. 모내기가 한창인 때는 새참까지 다섯끼를 먹기도 했다. 서유구(1764∼1845)는 ‘임원경제지’에서 “남쪽사람들은 쌀밥, 북쪽사람들은 조밥을 잘 짓는다”고 했다. 지방마다 약간 달랐겠지만, 경기인들은 대체로 쌀밥을 먹었다. 논농사를 주로 지었기 때문이다. 춘궁기에는 보리밥 내지 잡곡밥, 감자?고구마 등을 먹기도 했다. 조선전기 시흥 출신의 강희맹(1424~1483)은 자신의 농사와 관련한 책인 ‘금양잡록’에서 호미질 나갈 때 꼭 챙겨야 할 것으로 술단지를 들었다. 힘겨운 노동의 새참으로 술-대부분은 막걸리-이 빠질 수 없음이다. 상류층에서 즐겼던 청주와 소주는 그림의 떡이었을게다. 혹 춘궁기에 금주령이라도 내려지면, 시름을 잊을 그 나마의 위로도 빼앗겼다.

그런데 논농사에서 이앙법(모내기)이 일반적인 농법으로 자리잡았다. 밭농사에서 씨를 고랑에 뿌리는 견종법이 발달했다. 농사일은 많이 줄어들었다. 이앙법은 김매는 일의 60~70% 정도를 줄여주었고, 견종법은 소를 이용한 우경(牛耕)을 확산시켰다. 농민들은 연초?면화 등 상업작물의 재배에 눈을 떴다. 임노동을 고용하여 생산한 농작물을 시장에 내다 파는 농가가 나타났다. 조금 어려운 말일지 모르겠지만, 농업을 통해 경제적 부를 창출한 광작농(廣作農)이 그들이다.



▲ 김득신作 대장간, 간송미술관소장

-억말숭본(抑末崇本) 사회에서의 상공인

“본업(本業, 농업)을 중시하고 말업(末業, 상공업)을 억제한다‘. 조선사회의 산업관을 보여주는 말이다. 그렇지만 생필품의 거래는 삶에서 필수적인 것이다. 자연 장터와 상인의 역할이 필요했다. 경기도에는 광주 사평장과 송파장, 안성 읍내장, 교하 공릉장 등이 유명했다. 장터를 돌아다니는 행상도 증가했다. 조선후기 상공업 추세의 큰 변화는 전문상인집단의 등장이다. ’가게‘, ‘에누리’ 등이 떠오른다. ‘가게’는 서울의 시전(市廛)에 상인 수가 늘어나면서 정식 상가 옆에 임시로 지은 점포인 가게(假家)에서 유래했다. 또 ‘에누리’는 상품의 원가에 더 붙인 이문(이익)을 말하는데, 가게도 갖지 못하고 거리에서 손님을 끌어오는 ‘여리꾼’, ‘여리’에서 유래했다. 시쳇말로 ‘삐끼’다.

시전상인들은 상권(商圈)을 독점하기 위해 길거리 장사인 난전(亂廛)을 금지하는 ‘금난전권(禁亂廛權)’을 빌미로 온갖 행패를 부렸다. 1791년(정조 5년) 조선 정부는 금난전권을 폐지하고 아무나 상행위를 할 수 있는 정책을 단행했다. ‘신해통공(辛亥通共)’이다. 그 명분은 소상인과 도시빈민의 반발을 무마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배경에는 시전을 대체할 수 있는 세수원 확보가 있었다. 서울로 들어가는 물자를 장악하고 상설시장을 연 사상도고(私商都賈)라는 상인의 성장이다. 그들은 삼남은 물론, 함경도와 강원도, 평안도와 황해도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길목을 거점으로 곡물·소금·생선·면포·지물·수공품 등을 거래했다. 또 개성상인 등과 연계하면서 서울의 상권을 장악했다. 양주 다락원과 포천 송우점, 한강의 송파와 마포 등이다. 사상(私商)들은 산지에서 직접 물건을 사와 송파장·양주장 등에서 판매했다. 장터의 흥을 북돋우려 광대나 놀이패를 고용하여 공연도 했다. 송파산대놀이, 양주별산대놀이였다. 하지만 얼마 후 그들은 시전상인을 대신해 쌀 등의 상품을 독점하며 또 다른 폐해를 일으켰다.


곰방대를 물고 한가롭게 담배를 피우고 있는 호랑이의 모습이 그려진 민화 속에는 평등하고 평화로운 세상을 꿈꾸는 백성들의 염원이 담겨 있다.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은?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이라는 속담이 있다. ‘아주 오랜 옛날’이라는 말이다. 어찌 하필 호랑이와 담배일까? 담배가 조선에 들어온 때는 임진왜란 이후다. 끽연이 유행한 때는 17세기 이후다. 따라서 이 속담이 만들어진지는 기껏 4백여 년 남짓이다. 하멜은 표류기에서 “당시 조선에서는 4~5세 때 담배를 배우기 시작해서 피우지 않는 남녀가 없었다”고 했다. 조금은 과장된듯하다. 담배 한 근이 은 한 냥의 가치였다고 하니, 굉장히 비싼 편이었다. 요즘에 비할 바 못된다.

조선후기에는 권력의 상징이기도한 호랑이를 익살스런 동질감과 친근감으로 해학하고 풍자했다. 담배와 관련한 속담을 만든 배경에는 귀하고 천한 구분없이 국왕 앞에서 함께 맞담배질(?)을 하던 그런 이상향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감춰진 은유다. 신분 차이가 없었던 ‘아주 오랜 옛날’이 아니면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은 가능하지 못했다. 조선전기보다 백성(평민)들이 성장하고 있었지만,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을 맞지 못했다. 1894년 갑오개혁, 신분제의 폐지로 적어도 법적인 차별은 없어졌다. 그렇다고 사회적 관습까지 사라졌을까?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조선후기 경기인들은 이런 삶을 살았다.

김성환 경기문화재단 정책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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