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란 때마다 타국에 내줬던 군사요충지

수도 서울 한복판에 130년간 외국군대가 주둔하고 있는 땅이 있다. 용산이다. 조선시대 용산은 교통의 요지이자 한양의 관문이었다. 한강 포구 중에서 수심이 깊고 숭례문(남대문)까지 거리가 10리 이내에 있었다. 이 때문에 전국에서 세곡과 진상품을 실은 조운선이 몰려들었다. 용산에서 남대문까지 만초천을 따라 난 도로가 넓고 평탄하여 물류집산지로 발전하였다. 또한 군사 요충지로 외적이 침략할 때는 외국군대의 주둔지가 되었다.

고려 몽고침략기에는 몽고군이 용산 지역을 병참기지로 활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임진왜란 때는 평양까지 올라갔던 왜군이 조선·명나라 연합군에 패퇴하여 내려와 용산에 주둔하였다. 조선 말기에는 청이 임오군란을 계기로 주둔하였는데 1894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군이 차지하였다. 일본은 용산에 조선주차군 병력을 주둔시키고 만주를 침략하는 전진기지로 삼았다. 이 과정에서 남산 기슭 남영동과 삼각지 등에 이르는 토지를 헐값으로 강제 수용하였다. 이중 115만평을 군용기지로 사용하고 나머지는 일본인 거류지로 삼았다.

1945년 해방이 되자 미군이 이 땅을 차지하였다. 미군은 일본군 병영을 접수하고 미7사단 병력 1만5천명을 주둔시켰다. 1948년 미국은 자국의 지상병력과 국방예산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군대를 한반도에서 철수하였다. 그러나 1950년 6.25전쟁이 터지자 다시 들어와 용산에 주한미군사령부를 설치하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처럼 외국군대가 용산에 주둔하게 된 데는 첫째는 한강을 통해 쉽게 서울에 접근할 수 있다는 점, 둘째는 남산을 점령하면 수도인 서울을 쉽게 장악할 수 있다는 점, 셋째는 운송이 편리하고 퇴로를 항상 확보할 수 있다는 점 등이 고려된 것으로 보인다.

풍수지리적으로 보면 미군주둔지가 보기 드문 명당에 해당된다. 본래 용산 지명은 이곳 지형이 용의 형상을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용은 지극히 귀한 존재로 최고 존엄을 뜻한다. 옛날에는 왕의 얼굴을 용안, 책상을 용상, 옷을 용포라고 하며 왕을 용에 비유하였다. 이러한 이유 때문인지 고려 숙종 1년(1101) 남경을 설치할 때 그 후보지로 용산이 거론되었다. 당시는 풍수지리가 도읍지 선정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미칠 때였다. 결과적으로는 김위제의 상소를 받아들여 지금의 사대문 안인 삼각산 남쪽, 목멱산 북쪽 평지에 건설되었다. 그렇지만 용산이 거론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풍수가 좋았다는 것을 뜻한다.


용산의 태조산은 서울 강북 지역 대부분을 관장하는 북한산(836m)이다. 여기서 나온 산맥이 중조산격인 보현봉(700m), 형제봉(462m), 북악산(342m), 인왕산(340m)을 거쳐 용산 지역의 소조산(주산)인 남산(262m)을 만들었다. 그리고 남쪽으로 야트막하면서도 순한 맥을 10여리 뻗어 한강에 이른다. 풍수에서는 산세의 흐름이 중요하다. 큰 산에서 아래로 내려올 때는 산세가 점차 낮고 순해져야 길지를 만든다. 산세가 순하다는 것은 암석 없는 흙산으로 변한다는 뜻이다. 반대로 암석이 많은 산은 기가 세고 험해서 길지를 만들 수 없다. 청와대 터를 좋지 않게 보는 이유는 바로 뒷산에 암석이 많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용산은 완만한 능선이 지나는 구릉 지형이다.

남산을 용산 쪽에서 바라보면 두 개의 봉우리가 보인다. 남산타워가 있는 것을 서봉, 동쪽을 동봉이라 부른다. 용산 미군기지는 서봉에서 내려와 보국을 형성한 메인 포스트(main post) 지역과 동봉에서 내려와 보국을 형성한 사우스 포스트(south post) 지역으로 나눈다. 이들 사이를 이태원로가 가로지르고 있다. 북쪽 메인 포스트에는 주한미군사령부와 한미연합사령부 등 지휘부가 위치한다. 남쪽 사우스 포스트에는 미군의 주거시설과 병원 등이 배치돼 있다. 서울 도심 한가운데 외국군대가 주둔하고 있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은 아니다. 서울의 균형발전을 저해할 뿐 아니라 기름유출 등 마찰이 끊이지 않는다.

한·미 양국은 미군기지를 평택으로 이전하기로 합의했다. 서울시는 미군기지가 이전하면 그 부지를 국민녹지공원화 할 계획이다. 이때 청와대를 지금의 메인포스트 지역으로 이전하면 어떨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미군의 지휘부가 있었던 만큼 군사적으로 안전하고 면적도 22만평이나 된다. 무엇보다도 지금의 청와대에 비해 풍수가 좋다. 이를 통해 역대 대통령들이 겪었던 불행을 끊고, 향후 외국군대가 주둔하지 못하게 할 수 있다. 또한 청와대가 국민과 가까이 있음으로서 소통의 정치를 할 수 있을 것이다.

형산 정경연 인하대학교 정책대학원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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