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대 대통령 선거 출마를 선언한 정의당 심상정 후보는 1959년2월20일 경기도 파주 휴전선 근처에서 태어나 부모님을 따라 초등학교 4학년때 서울로 이사올 때까지 산나물을 캐며 성장했다. 어린 시절 그는 반에서 1~2번을 다툴 정도로 키가 작고 말이 없는 아이였다. 잠재돼 있던 그의 리더십이 분출되기 시작한 것은 충암여중에 다닐 때다.고교야구가 큰 인기를 누리던 시절 야구 명문인 충암고등학교의 경기가 있는 날이면 학생들이 동원됐고, 야구를 좋아했던 심 후보는 야구 학생기자를 하며 야구장을 찾아다녔다.

1년 재수 후 1978년 서울대 역사교육과에 입학했다. 초등학교 교사인 아버지의 뒤를 이어 교사의 꿈을 키웠기 때문이다.

심 후보는 1학년 때 구로동에서 노동야학인 ‘한얼야학’ 교사로 활동한 데 이어 2학년때 공활을 했고, 대학 3학년때인 1980년 구로공단 대우어패럴공장 미싱사로 취직하면서 노동자의 삶을 시작했다.

물론 부모님은 이 사실을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다. 1985년 구로동맹파업으로 그가 전국에 지명수배되면서 TV 9시 뉴스에서 심 후보의 얼굴이 구로동맹파업 주모자로 1계급 특진에 500만 원의 현상금이 걸린 채 나오자 부모님은 큰 충격을 받았다.

남편 이승배씨는 1986년 당시 노동운동을 함께한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의 소개로 처음 만났다. 서울대 동양사학과 출신인 이씨는 시위로 무기정학을 당한 후 노동운동의 길을 걷고 있던 중이었다. 두 사람은 1992년 늦깎이 결혼했다.

심 후보는 공안당국으로부터 ‘위장취업자’로 낙인찍혀 탄압을 받다 1993년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구로동맹파업 이후 전노협 쟁의국장 등으로 활동하면서 무려 11개의 죄목으로 10년 넘게 수배생활을 했다.

심 후보는 수배 생활 중에도 서울노동운동연합(서노련) 결성을 주도해 서노련 중앙지원장을 맡았으며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 쟁의국장과 조직국장, 전국금속노동조합 사무처장 등을 역임했다.

금속노조 사무처장으로 지내던 2003년 임금 삭감 없는 주 5일제 근무를 관철하며 ‘철의 여인’이라고 불리기 시작했다.

2004년 민주노동당 비례대표 1번으로 17대 국회에 입성한 심 후보는 재정경제위원회 소속으로 삼성의 편법·탈법·불법 행위와 론스타의 외환은행 인수 문제를 지적하는 등 맹활약을 펼쳤다.

그는 2007년 민주노동당의 대통령 후보 경선에 나서 결선투표까지 진출하는 이변을 일으켰으나, 권영길 후보에 5.48%p 차이로 밀려 고배를 마셨다. 이후 심 후보는 민주노동당을 탈당하고 진보신당을 창당한다. 18대 국회의원 선거에 나서지만 낙선했고 2010년에는 경기도지사에 출마했지만, 국민참여당 유시민 후보 지지를 선언하며 사퇴했다.

이후 2012년 통합진보당 소속으로 19대 총선에서 당선돼 국회에 다시 입성해 정의당을 창당했다. 그리고 그해 대선에서 대선 출마 의지를 밝혔으나 야권 단일화 차원에서 민주당 문재인 후보를 지지하며 또 한 번 후보 등록을 포기했다. 정의당 원내대표로 활동하다가 2015년 7월 정의당 대표에 선출됐다. 2016년 4월 총선에서도 과반 이상의 득표를 받으며 진보정당 최초의 3선 중진 의원이 됐다. 하지만 정작 심 후보는 “정치인 심상정의 인생 절반은 실패”라고 평가했다. 언제나 양보해온 탓이다.

그래서 심 후보는 이번 대선만큼은 완주한다는 각오다. 심 후보는 “선거 때마다 완주냐, 사퇴냐 묻는 정치관행이야말로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라고 중도 사퇴 가능성을 일축하면서 19대 대선 레이스에서 ‘철의 여인’으로 재등장했다.

라다솜기자/radasom@joongb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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