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후기 (11)개항의 문명사적 의미와 경기도

▲ 운양호사건 이듬해인 1876년 강화도에서 일본의 구로다와 협상을 벌여 병자수호조약을 체결, 조선의 개항에 중요한 임무를 수행했다. 그는 당시 협상 전말을 ‘심행일기’라는 기록으로 남겼다.
한국 근·현대 시대구분과 개항

1876년 개항은 한국 근대사의 기점이다. 이에 대한 논란이 없지는 않다. 왜냐면 한국사교과서는 개항을 민족주의 관점으로 서술하기 때문이다. 개항은 일본이 조선에 대한 경제적 침탈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강제 병합의 출발점이 되는 사건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구조사적으로 볼 때, 당시의 국제관계에서 조선이 외세에 의해 개항을 당하는 것은 시간문제가 아니었을까? 일국사적으로는 시행착오를 하면서 상당한 시간은 걸리겠지만 근대로의 내재적 발전을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세계사적인 맥락에서 보면 그것은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당시 한반도는 대륙과 해양의 러시아와 일본이라는 두 제국 사이에 끼어있었다. 둘 사이에서 조선왕조가 과연 줄타기를 하면서 근대로의 이행이라는 목표에 도달할 수 있었다고 믿는 역사가는 거의 없다.

개항은 오늘날 한국의 문명사적 위치와 한국인의 삶의 방식의 기원을 이룬다는 점에서 모던의 기점이다. 한국사의 특이성은 영어 modern이 근대와 현대의 이중으로 번역된다는 점이다. 왜 그런가에 대해서는 많은 설명이 있을 수 있지만, 민족주의 관점으로 한국사를 봐야 한다는 당위가 그런 시대구분을 만든 요인이라고 생각한다. 한국 근대사 대부분의 시간이 일제 식민지시대다. 그런데도 식민지근대화론을 수용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한국사를 민족의 역사로 봐야 한다는 민족주의사관이 시대는 근대인데 근대화는 그 때 일어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모순을 낳게 한다. 결국 모던을 근대와 현대로 나누는 시대구분은 국가가 없었던 일제 강점기와 독립 국가를 형성한 이후를 구분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생겨났다. 일반적으로 한국사에서 근대란 일제 식민지시대이고 현대는 분단시대다.

한국 근현대사를 민족사로 보면 미완성이고 비극의 플롯으로 이야기된다. 하지만 세계인들은 오늘의 한국을 실패한 나라가 아닌 성공의 귀감이 되는 나라로 여긴다. 대한민국은 원조를 받다가 원조를 주는 나라로 변신한 세계에서 거의 유일한 국가다. 이 성공의 역사를 식민지 반봉건 vs. 국가 독점자본주의와 같은 민족주의와 마르크스주의 사이에 벌인 사회구성체 논쟁으로는 설명이 안 된다. 1980년대를 풍미한 이 논쟁은 현실사회주의의 붕괴와 함께 무의미한 것으로 판명이 낳다. 프랑스의 역사가 미슐레는 “역사가가 역사를 만드는 만큼 역사가 역사가를 만든다.”는 말을 했다. 그의 말처럼 1980년대 시대정신의 세례를 받고 역사가가 된 세대가 대세를 이루는 한국 역사학계에서 그 영향력은 아직도 막강해서 한국 근현대사 연구를 지배한다. 오늘날 세계는 근대를 넘어서는 탈근대 담론이 나오고 디지털 세계화시대를 맞이했다. 지금 우리는 인류 역사상 가장 큰 변화가 가장 빠르게 일어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이 같은 문명사적인 대변혁을 맞이해서 한국 역사학은 근대 역사학의 전형적 거대담론인 민족과 계급의 관점을 탈피해서 한국사를 새롭게 해석하는 패러다임을 제시해야 한다.


▲ 만국공법, 개항으로 중화사상에서 탈피한 조선은 하나의 독립국가로서의 위상을 갖기 위해선 국가가 한 단위가 되는 만국공법의 질서에 편입해야 한다는 인식의 각성이 일어났다.

개항을 보는 시각의 문명사적 전환

오늘의 한국이 어디서 기원하고 어디로 가야 하는가? 이 물음의 화두가 되는 것이 1876년 개항이다. 한국사의 당위론적인 해석이 아니라 이미 일어났던 일들의 인과관계로 역사를 보면, 개항은 적어도 3측면에서 한국 근현대사의 기점이다. 첫째, 개항은 한반도의 세계사적 위상이 중화세계로부터 전지구로 바뀌는 전환점이다. 둘째, 개항을 통해 조선은 쇄국에서 벗어나 자유무역과 개방경제로 진입했다. 셋째, 개항을 계기로 조선은 농업사회에서 상공업사회로 변하기 시작했다. 조선왕조가 과연 농업경제를 포기하고 공업화를 추진할 역량과 비전을 가졌는지는 미지수다. 확실한 건 개항을 한 이후에도 조선은 공업화를 못했기에 일제 식민지로 전락했다는 사실이다. 이와 비교해서 오늘날 대한민국의 번영은 공업화를 성공적으로 이룩했기에 가능했다.

개항을 위와 같은 3 가지 의미를 통합적으로 해명할 수 있는 해석틀이 문명사관이다. 프랑스의 아날 역사가 르 고프는 “문명은 무엇보다도 시간과 공간을 어떻게 다스리느냐에 의해 정의된다.”고 했다. 이런 문명의 정의는 인간·시간·공간이라는 역사 3간(間)이라 지칭할 수 있는 3요소를 결합해서 인간 삶의 변화를 종합적으로 고찰하는 역사인식의 가장 큰 범주다. 근대란 역사 3간을 근본적으로 바꿔놓은 시대다.

역사 3간의 재구성을 통해 근대 문명으로의 전환을 총체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세계관의 변동이다. 개항은 오늘날의 한국인들이 갖고 있는 세계관이 성립하는 계기라는 점에서 우리 당대의 기원이다. 세계의 중심이 중국이 아니라 지구는 둥글기 때문에 중심은 없다는 세계관의 변동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지도다. 전통시대의 고지도는 중국이라는 태양을 도는 위성국으로서 조선을 상정하는 중화세계질서에 입각해서 그려졌다. 하지만 서양 과학이 들어오면서 중국이 세계의 지리적 중심이 아닐 뿐 아니라 문명의 중심도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중화사상에서 탈피한 조선이 하나의 독립국가로서의 위상을 갖기 위해서는 국가를 단위로 한 관계망으로 연결되는 만국공법의 질서로 편입해야 한다는 인식의 각성이 일어났다. 한국사에서 이런 세계관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 일어나는 결정적 계기가 되는 사건이 바로 1876년 개항이다.

전근대와 근대의 세계관의 충돌을 잘 보여주는 것이 강화도 조약 체결 당시 조선과 일본 대표 사이의 담화다. 조선 측 접견 대관이었던 신헌은 조약 체결의 전말을 ‘심행일기(沁行日記)’로 기록했다. 여기에는 그가 일본 측의 전권대사인 구로다 키요타카(黑田淸隆)와 병자년(1876년) 1월 18일에 나눴던 대화가 나온다.



신헌 : 조약은 무슨 조약인가

구로다 키요타카 : 귀국 지방에 개관해서 함께 통상하는 것이다.

신헌 : 300년 동안 통상하지 않았던 적이 있었는가? 그런데 지금 갑자기 따로 요청하는 것은 실로 이해할 수 없다

구로다 키요타카 : 지금 천하 각국에서 공통적으로 행해지는 일이며, 일본도 각국에 이미 공관을 많이 열었다.

신헌 : 우리나라는 동쪽 바다에 치우쳐 있어서 자수(自守)할 뿐이니, 과연 각국의 최근사정이 어떠한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대체로 양국에서 영원히 우호하기를 바란다면 마땅히 폐단 없이 오래 지속하루 있는 방법을 생각해야 한다. ... (중략) 나라의 풍속이 검소하여 옛 풍습을 편안히 여기고 새로운 법령을 싫어하므로 설령 조정에서 억지로 명령해서 시행하더라도 반드시 기꺼운 마음으로 복종하지 않을 것이다. ... (중략) 이후의 결과를 생각해보면 이해를 충분히 알 수 있으니 이미 수백 년 동안 교역을 행해왔던 동래 왜관에서 예전과 같이 계속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구로다 키요타카 : 양국이 저간에 격조하게 된 것은 조례가 불명확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약을 영구히 변치 않은 장정으로 삼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하면 다시는 양국이 단절되는 사단이 생기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는 모두 시행하지 않을 수 없는 만국공법이 이로써 결정해서 조처해야 한다.



신헌은 정약용과 김정희의 문하에서 실학을 배우고 개화파의 거두인 박규수의 추천으로 접견 대관이 된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다. 하지만 그는 아직 중화주의 세계관에서 벗어나지 못함으로써 새삼스럽게 조약에 근거하여 새로 통상관계를 맺어야 할 이유에 대해 알지 못했다. 개항 이전의 조선은 중화주의 시스템에 갇힌 조공국이었다. 신헌이 생각한 통상은 중화세계질서라는 시스템 내에서의 교류를 의미한다. 이 교류의 문법에 의거하면 대원군이 척화비로 명시했듯이 서양은 배척해야 하는 오랑캐이다. 일본 측에서 보면, 이는 교류가 아닌 쇄국이다.

근대란 신분에서 계급으로 사회질서가 변화된 시대를 지칭한다. 같은 맥락에서 개항이란 조선이 중국의 조공국의 위상에서 탈피하여 다른 국가와 조약이라는 계약을 통해 만국공법의 국제질서로 편입하는 출발점이 되는 사건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은 수출로 먹고 사는 나라다. 한국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원조를 주는 나라로 탈바꿈 할 수 있었던 것은 세계를 향해 개방한 덕분이다. 이 같은 시스템 전환의 출발점이 1876년 개항이기에 한국 현대사의 기점이면서 한국 문명사의 근대적 기원이 된다.



▲ 혼일강리역대국지도, 조선의 중화사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지도다. 후에 서양 과학이 들어오면서 조선은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연합
한반도 통일시대 ‘제 2의 개항’과 경기도

역사는 돌고 돌아서 시진핑 시대에 중국이 일대일로(一帶一路, One Belt One Road)를 통해 신중화주의 질서를 관철시키려는 기도를 한다. 시진핑의 일대일로에서 한반도는 동쪽 끝에 해당한다. 이런 한반도에 미국이 사드를 배치하는 것은 시진핑의 일대일로에 큰 장애물임에 틀림없다. 21세기 미국과 중국 사이에 낀 한국이 독자적인 문명권을 형성할 수 있는 발판은 한반도 통일이다. 한반도는 대륙문명과 해양문명이 충돌하는 요충지일 뿐 아니라 두 문명이 한류와 난류처럼 만나는 문명의 어장이다. 1876년 개항은 한반도가 중국의 대륙문명권에서 서양의 해양문명권으로 중심 이동한 것을 의미한다. 이후 남북분단은 대륙문명과 해양문명의 단절을 초래했다. 따라서 앞으로 다가올 한반도 통일은 절단된 문명을 다시 잇는 ‘제 2의 개항’을 의미한다.

한반도 통일이란 결국 경기도 통일이다. 1876년 개항이 당시 경기도에 속했던 강화도와 인천에서 이뤄졌다면, 21세기 한반도 통일의 현장이 경기도다. 경기도가 한반도 문명사의 새로운 장을 여는 장소가 되기 위해서는 지리적 위치를 넘어 제 4차 산업혁명을 선도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우리가 일본에 의해 개항을 당하지 않고 스스로 근대로의 이행을 할 수 있었던 일말의 가능성이 이른바 실학이었다. 경기도는 그 실학의 중심지다. 경기도가 18세기에 미처 못 했던 역할을 21세기 디지털문명 시대에 수행할 때, 한반도가 미국과 중국의 샌드위치 신세에서 벗어나 통일시대의 문명사적 꿈을 실현시킬 수 있다.

김기봉 경기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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