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모지교' 정승 9명 배출한 조선 8대 명당

조선 8대 명당의 하나로 평가받는 약봉 서성(1558~1631)의 묘는 경기도 포천시 설운동 산1-14에 있다. 재실 뒤쪽 묘역에는 아버지 서해(徐?)와 할아버지 서고(徐固)의 묘가 상하로 있다. 아버지 묘가 조부 묘보다 위에 있는 역장이다. 답사를 다니다보면 명문가 일수록 역장을 한 곳이 많다. 대표적으로 율곡 선생 묘는 어머니 신사임당 묘보다 위에 있다. 이로보아 옛날에는 역장보다는 자리를 더 중요시 여긴 것 같다. 서성의 묘는 부모 앞의 능선에 있다.

달성서씨는 광산김씨, 연안이씨와 함께 조선 3대 명문으로 꼽는다. 특히 광산김씨 중에서 사계 김장생 후손, 연안이씨 중에서 월사 이정구 후손, 달성서씨 중에서 약봉 서성의 후손들이 현달하였다. 약봉파가 번창한데는 약봉의 어머니 고성이씨(固城李氏)의 공이 크다. 그녀는 안동에서 아버지 이고와 어머니 한양조씨 사이의 무남독녀로 태어났다. 본래 이고는 임청각에서 살다가 결혼과 함께 소호헌으로 분가하였다.

고성이씨는 비록 부자 집에서 태어났지만 어린나이에 온갖 시련을 겪었다. 3세 때 어머니를 여의고 숙모에게서 자랐다. 5세 때는 악질에 걸려 그만 청맹과니(겉으로 보기에는 눈이 멀쩡하나 앞을 보지 못함)가 되었다. 11세 때 부친마저 명나라에 사절단으로 다녀오다 세상을 떠났다. 혈혈단신이 된 그녀는 15세 때 안동에서 퇴계의 문하생인 서해와 결혼하였다. 서해는 신부가 장님인줄 모르고 결혼 길에 나섰다가 뒤늦게 이를 알았다. 그냥 돌아가자는 삼촌의 재촉에 개의치 않고 결혼하여 서성을 낳았다. 그러나 서해는 결혼 5년 만에 23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홀로된 고성이씨는 아들을 잘 키워야겠다는 일념으로 친정부모에게 물려받은 유산과 집을 처분하여 한양으로 이사하였다. 한양 약현(지금의 중림동)에는 시동생인 서염이 살고 있었다. 그녀는 길지로 소문난 집터를 사들여 새로 집을 지었는데 안동의 옛집과 같이 지었다. 이를 본 서염이 두 모자가 사는데 너무 집이 크지 않느냐고 하자, 이씨부인은 내 생전에 이 집이 협소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그녀는 이곳에서 술과 떡을 만들어 내다 팔았다. 솜씨가 좋아 명성을 얻었는데 여기서 약과·약주라는 말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서성도 호를 약봉이라고 하였다.

한양 살림살이가 어느 정도 자리가 잡히자 시아버지와 남편의 묘를 포천으로 이장하였다. 풍수지리에 관심 많은 부인인지라 유명한 지관의 자문을 받아 자리를 잡았겠지만 묘에 얽힌 전설이 있다. 이장할 때 상여대가 부러졌는데 날까지 어두워졌다. 어쩔 수 없이 노숙을 해야 했다. 이때 한 노인이 나타나 커다란 기와집으로 안내하더니 푹신한 잠자리까지 마련해주었다. 편안하게 잠을 자고 아침에 일어나니 기와집은 온데간데없고 풀밭이었다. 길을 떠나기 위해 상여를 드니 꼼짝을 하지 않았다. 장정들이 달려들어 힘을 써보아도 마찬가지였다. 하는 수 없이 그 자리에 묻을 수밖에 없었다. 그 자리가 바로 서고와 서해의 묘다.


그 뒤로 발복이 시작되었다. 서성은 문과에 급제하여 병조좌랑과 6도 관찰사를 병조·형조·호조·공조·예조판서를 역임하였다. 서성의 네 아들 또한 모두 현달하였다. 장남 서경우는 인조 때 좌의정, 차남 서경수는 종친부전첨, 셋째 서경빈은 과천현감, 넷째 서경주는 선조의 장녀 정신옹주와 혼인하여 부마가 되었다. 이후 서성의 후손들은 조선말까지 약300년 동안 문과급제자 122명, 정승(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9명, 판서 30명, 대제학 6명, 당상관 28명, 3대 정승, 3대 대제학 등 수 많은 인물들을 배출하였다.

이곳은 한남정맥과 천보산맥이 크게 원을 그리며 형성한 포천 분지 안에 있다. 한남정맥은 백두대간 추가령에서 갈라져 나와 포천 백운산·국망봉·강씨봉·청계산·운악산·국사봉·죽엽산을 지난다. 그리고 축석령에서 북쪽으로 천보산맥을 뻗어 해룡산(661m)과 왕방산(736m)를 세운다. 서성 묘의 주산은 해룡산이다. 여기서 활발하게 용맥이 내려오는데 산세가 점차 낮고 순해진다. 용맥은 작은 개울을 만나 멈추는데 앞에는 넓고 평탄한 들판이 펼쳐져 있다. 들판 가운데는 포천천이 남에서 북으로 흐르며 명당수 역할을 하고 있다.

풍수지리의 조건인 용·혈·사·수·향의 조건을 완벽하게 갖춘 곳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묘역 뒤로는 군부대가 주둔하며 지기를 짓누르고 있다. 앞에는 온갖 개발로 산이 깎여 옛 모습이 사라져 가고 있다. 이와 함께 서씨 가문의 영광도 사라지지 않을까 염려스럽다.

형산 정경연 인하대학교 정책대학원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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